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4. 모든 것은 다 마음 따라 일어난다.

Buddhastudy 2018. 6. 6. 21:15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어느 날 어떤 마을에 탁발을 하러 즉, 걸식을 하러 들어가셨는데, 조그마한 소년이 하나 훌쩍훌쩍훌쩍 울고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너 왜 우니?”

저희 아버님 때문에 저의 집은 망하게 됐습니다.”

왜 그러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그 할머니 생각 때문에, 그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무덤가에서 3년을 울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러니까 집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안 되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그 소년의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소년의 귀에다가 뭐라고 뭐라고 속삭였어요. 그래서 소년이 얼굴이 훤히 밝아지더니 고개를 끄떡끄떡 하고 갔어요. 조금 있으니 이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어.

 

누구 집 아들이 미쳤다는 거요. 어떻게 미쳤냐? 이 아이가 소가 죽어 있는데, 인도에서는 소고기 안 먹지 않습니까? 그죠. 소가 다니다가 죽으면 그냥 길거리에 놔둡니다. 그 소에게 꼴을 한 아름 베어서는 그 앞에 앉아서 계속 소한테

소야, 꼴을 먹어라. 소야 꼴을 먹어라. 소야 꼴을 먹어라.”

사람들이 죽은 소가 어떻게 꼴을 먹느냐? 하지마라.” 그래도 안 듣고 계속 하고 있다는 거요. 그러니 사람들이 그 집 아들 미쳤다는 거요.

 

이 소문이 퍼져서 그 아버지에게까지 들린 거요. 아버지가 그 얘기를 듣고 아들이 미쳤다니, 그러니까 어머니 생각하다가 아들 생각에, 어머니 생각은 없어지고 쫓아가봤어. 정말 그러고 있는 거요.

 

그래서 아들에게

죽은 소는 꼴을 먹지 못한다. 그러니 그런 헛된 짓은 하지 마라. 그만 둬라.”

그래도 아들은 아버지 말을 안 듣고 막무가내로 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아들을 보고 큰소리로 화를 내면서

, 이 놈아. 죽은 소가 어떻게 꼴을 먹어.” 그러니까 아들이 씩 아버지를 돌아보면서

아버지는요?”

그 순간에 아버지가 탁 깨쳤어. 뭘 깨친지 알겠어요? 이게 깨달음이오.

 

우리는 보통 어떠냐? 사람이 죽었다. 죽어서 슬프다. 울고불고 하면 당연하게 생각하죠.

하이고, 부모가 죽었으니 얼마나 슬프겠냐.” 그래서 위로를 해줘. 여러분들도 다 경험해봤겠지만, 위로받는다고 슬픔이 다 없어지는 것도 아니죠.

 

그렇지 않으면

뭐 그만한 일에 그래?” 이렇게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사람이 가서

거사님, 인생이란 다 태어나 죽는 거요.”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그래서 그게 해결이 됩니까? 안 되죠. 바로 우리가 하는 건 보통 이런 수준이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깨우쳐주는 거요. 그래서 그 마음속에 슬픔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요. 여기서 하나의 특징은 그 아버지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상황이 변한 게 아니죠. 죽은 어머니가 살아오신 게 아니잖아. 그죠? 그런데도 번뇌가 사라져요.

 

오늘 우리가 원하는 해결책은 뭐요? 부모가 돌아가셔서 울 때, 부모가 살아 일어나거나, 자식이 죽었다고 울 때 자식이 살아나야 이게 해결책 아닙니까. 우린 그런 해결책을 원하잖아. 그런데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고 바로 무지를 깨침으로 해서, 모순을 깨침으로 해서 바로 고뇌가 사라져 버린다.

 

이건 똑같은데, 여기서의 하나의 차이점은 이 아이의 과제에 대해서는 아이가 깨쳐서 문제가 됐어요? 아버지가 깨쳐서 아이 문제가 해결이 됐어요? 아버지가 깨쳐서 아이 문제가 해결이 됐지. 그럴 때 아이 입장에서 볼 때는 스스로 마음을 깨쳐서 해결된 게 아니라 주위조건이 바뀌어서 해결이 됐죠.

 

불법 안에는 이것도 포함이 되어있다. 모든 게 다 마음이다. 그 말은 맞는데, 불법은 그것만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뭔가를 깨칠 수 없는 조건의 이 아이에게 아이보고 깨쳐서 아버지가 울든지 말든지 해탈할 수 있는 길, 그런 거 안 일러줬어요.

 

이때는 아버지를 깨닫게 해서 아버지 문제도 해결이 되고, 어린 아이 문제도 해결이 되고. 그러니 모든 것은 다 마음의 문제다. 그건 원리적으로 맞아. 그러나 부처님은 어린 아이보고도

, 임마, 네가 깨쳐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제가 경험한 얘긴데, 10년도 훨씬 넘은 얘긴데, 제가 잘 아는 보살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그래서 문상을 갔어요. 시달림을 갔다. 그런데 이 보살님이 너무너무 슬피 우는 거요. 사정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서 4남매를 키웠다는 거요. 제가 찾아간 보살님이 맏딸인데.

 

너무너무 고생해서 다 키워서 막내까지 결혼 다 시키고 이제 우리 어머니 고생이 다 사라졌다 할 그 형편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거요. 그러니까 딸은 그 어머니 고생한 것만 생각들고, 어머니가 한 번도 편하게 못 살아본 그런 생각에 계속 우는 거요.

 

초상집에 우리가 가보지만, 계속 울면 간 사람도 좀 몸둘 바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위로를 했어요.

인생이라는 것은 다 태어나면 죽는 거야.” 이렇게 위로를 하면 울음을 뚝 그쳐야 위로하는 사람의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무가내요.

 

스님은 몰라요. 내 심정 몰라요.” 염불을 해줘도 울음이 끝이 안 나요. 내가 할 게 없어. 염불을 해주든지 위로를 해주든지 법문을 해주든지 하면 먹혀들어야 되잖아. 그런데 먹히는 거요. 백약이 무효야. 그러니까 머쓱한 거요.

 

여러분들은 이런 경험은 없겠죠. 스님은 그래도 어디가면 해결사 노릇을 좀 하는데, 이 집에서는 해결사가 안 되는 거요. 그래서 염불을 하고 있는 중에 일어난 해프닝인데, 그 영가를 위해서 염불을 하고 있는데, 그 집 애가 한 5살짜리가 있는데 ~’하고 방구를 꿨어.

 

애를 분위를 보고 참다가 참다가 꾸니까 아주 얌전한 소리가 났단 말이오.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에서 웃지도 못하고, 웃음을 나오려는 것을 전부다 입을 꽉 참고 염불을 하고 있는데, 얘가 참다가 안됐는지 ~ ~ ~ 뽀옹~~~” 하고 연달아 꿔버렸어요. 사람들이 참던게 터져서 다 웃어버렸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하고 울고 있던 이 상주도 따라 웃어버린 거요.

 

그때 제가 뭔가를 깨쳤어요. 뭘 깨쳤어요? 부처님이 방귀로 화현하셨구나. 부처님이 천백억가지로 화현하신다더니 그 말을 잘 몰랐는데, 이 순간에 방귀로 화현하셨구나. 내가 온갖 법문과 내 재주를 갖고 다해도 그 보살님의 슬픔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이 방귀소리가 그 보살님의 슬픔을 순간적으로 멈추어 버렸단 말이오. 이게 기적 아니오?

 

그 무겁던 마음이 한번 웃는 순간에 가벼워지고, 그 어둡던 마음이 한번 웃는 순간에 밝아지고, 이런 일은 부처님이 아니고 어떻게 이 기적을 만들겠어요. 그러니 바로 방귀가 부처님인 거요.

 

이렇게 해서 순간적으로 다 분위기가 웃는 분위기인데 갑자기 보살님이

아이고 우리 엄마 죽었지.” 하더니 또 울기 시작하는 거요. 여기서 뭘 알 수 있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슬프다.

 

그러면 방귀 소리를 듣고 왜 그 슬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느냐?

그 순간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그 사로잡힘에서 순간적으로 벗어나 버렸다.

그러니까 그 슬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런데 다시

아이고,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지.”하면서 그 순간에 또 사로잡히니까, 그 가볍던 마음이 다시 무거워지고 그 밝은 마음이 다시 어두워진 거요.

 

그래서 서암 큰스님께서 하신 법문 중에 이런 말씀이 있죠.

천년동안 어두웠던 동굴이 불 켜면 일순간에 밝아지고

천년동안 밝았던 동굴이 불 끄면 일순간에 어두워진다.

 

천년동안 어두웠기 때문에 불 켜면 천천히 밝아지거나

천년동안 밝았던 동굴이 불 끄면 천천히 어두워지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의 인연의 원리는 그래요. 그런데 이 깨달음은 인연과보를 뛰어넘어요. 이것이 불법이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슬픔과 괴로움은

다 어떤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상대가 욕을 할 때도

네가 나에게 욕을 하지.”라고 사로잡히니까

같이 덩달아 화가 나는 거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면

빙긋이 웃을 수가 있게 된다.

 

사람이 죽는다고 슬프면 지금도 매번 죽고 있습니까? 안 죽고 있습니까? 죽고 있죠. 우리가 슬퍼야 되는데 안 슬프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야 됩니다. 불이 났을 때, 먼데서 불난 것 보고 자기 집하고 관계가 없으면 불구경을 하잖아요.

, 저기 불났다.” 할 때 마음에 약간의 기쁨이 있잖아.

 

그러다가 자세히 보니까

, 우리 동넨데.” 그때 우리 집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딱 들면, 초조하고 불안해지죠. 그러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까 우리 동네가 아니고 옆 동네 같아. 그 생각이 딱 일어나면 안심을 하죠.

 

그러다 다시

우리 동넨데이러면 또 불안해지죠. 그래서 이것은

 

불이 났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고,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즉 자기 생각, 자기 소유물

자기라고 하는 것에 사로잡힐 때

괴로움이 생기더라.

 

그래서 일체 유심조라는 말은

이 모든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 번뇌라고 하는 것은

사로잡힐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다. 이런 말이에요.

 

이 컵을 금이라고 생각하면 금이 된다.

이런 의미의 일체유심조가 아니라

모든 고뇌, 번뇌는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요.

 

만 가지 번뇌가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일체의 번뇌가 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런데서 우리가 이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건 어떻게 이해합니까? 안 죽는 걸 생각해요.

 

죽었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에요.

죽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괴롭죠.

 

스님이 여러분께 말하기를

제가 저 히말라야에 가서 한 10년간 정진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갔어. “연락이 없을 거예요.” 하고 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다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어. 여러분은 몰라. 그럼 여러분들은 법륜스님이 죽은 거요? 안 죽은 거요? 안 죽었어.

“3년 되었는데, 5년 됐는데, 공부가 됐을까?” 늘 살아있어. 법륜스님이 죽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인도 가다가 자꾸 연락이 오니까, 그냥 인도에서 한국으로 연락이 왔어. 법륜스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화장을 해서 요만하게 뼈가루 봉지까지 왔어.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법륜스님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죽었죠.

 

법륜스님이 저 히말라야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도 여러분들은 법륜스님 다 죽어버린 거요. 그래서 날짜 잡아서 1주기 2주기 3주기 하는 거요. 재도 지내고 그럴 거요. 그러니까

 

살고 죽는 것이 밖에 있는 것 같은데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는

살고 죽음이 다 자기 마음에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탈북한 어떤 국군포로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 분은 6.25전쟁에 갔다가 포로가 됐어. 함경북도에 사셨는데, 그 소식을 전하러 고향에 가니까 47번째 제사를 지낸 이튿날 이었어요. 제가 가서 말하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겠죠.

 

그럼 지금까지 그 분은 돌아가셨어요? 가족들에게는 살아계셨어요? 돌아가셨지. 그럼 살아있다는 소문을 듣고 살은 거죠. 그럼 뭐가 복구된 거요?

 

마음에서 죽었다는 정보에서

살았다는 정보와 교체된 거지.

그러니까 이 도리를 잘 아셔야 되요.

 

죽어서 슬픈 게 아니라

죽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슬픔이 일어나는 거요.

 

바로 부처님이 그렇기 때문에 깨우침을 통해서 이 미묘한 이치, 이건 이 지구상에 아마 붓다이전에 안 사람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서 깨우쳐서 해탈시키는 거요.

저 사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는데 이렇게 깨달아서 해탈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치 악몽을 꾸는 사람이 강도에게 쫓기는데 아무리 도망을 가도 도망을 가도 그 강도로부터 못 벗어나다가 눈을 딱 뜨니까 벗어난 것과 같은 이치요. 이것을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한다. 여러분들도 이런 이치를 깨쳐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음의 번뇌가 있을 때도

이게 내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서 일어난다.

안으로 돌이켜서 보면 내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 원칙을 딱 견제하셔야 경험을 할 수가 있지, 이렇게 듣고 끄떡끄떡해도 상황이 딱 벌어지면 네가?!” 이렇게 되는 게 우리란 말이오.

 

이게 경계에 팔린다. 경계를 탓한다. 이게 현실이에요.

그러나 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기준을 딱 잡고 자꾸 연습을 해야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한번 연습을 해나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