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손석희앵커브리핑(2018)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개나리 소굴, 진달래 소굴, 그리고 천막들…

Buddhastudy 2018. 5. 1. 19:00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60년대 초·중반서울의 남산

저희들 같은 꼬맹이들은 학교가 파하면, 혹은 쉬는 날이면 마치 뒷산 오르듯이 남산을 섭렵하고 다녔습니다.

 

봄이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어나서 우리들은 그런 골짜기마다 개나리 소굴, 혹은 진달래 소굴이라 이름 붙이고, 꽃잎이 시들어 그 소굴들이 사라져 갈 때마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는 했지요.

 

그런데 그 골짜기마다에 눈에 띄는 것이 또 있었으니 바로 대형 천막들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군용처럼 보이는 대형 국방색 천막들

그들은 그 평화로웠던 개나리와 진달래 소굴 속에 있었습니다.

 

듣기로는 한국전쟁 때 피란을 내려온 사람들이 딱히 머물 데가 없어서 남산골에 들어와 천막을 친 것이라 했습니다.

하긴 전쟁이 끝난 지 기껏 7,8년이 되었을 때이니 아직도 그 상흔은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천막들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불과 몇 년 차이로 다행히 비껴간 전쟁의 비극을 아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주는 존재들이었던 셈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불안그리고 공포

전쟁을 겪은 세대와 그 직후 베이비붐 세대인 저희들은 비록 겪은 것과 겪지 않은 것의 커다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난과 불안

 

그리고 공포를 마치 유전자처럼 공유하고 있었던 것

아니,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세대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우린 두렵다고조되는 전쟁 위협이 진짜 전쟁으로 번질까 두렵다. 살아있고 싶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 한강 <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뉴욕타임스 기고 2017107

 

나이로 치면 베이비붐 세대보다도 한참 아래인 1970년생 작가 한강이 뉴욕타임즈에 쓴 글을 오랜 만에 다시 꺼내봅니다.

 

그는 북한과 미국이 한창 이른바 말폭탄을 주고받던 시기에 전쟁을 겪은 한 70대 노인의 공포를 모티브로 이런 공포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늘 내재돼있는 한국인들의 삶을 자조했었지요.

 

지난 금요일 이후에 남과 북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한낱 봄날의 꿈처럼 허무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늘 우리의 것이지만, 이것이 꿈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기대와 당위 역시 우리의 것이기에

 

작가 한강이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전해드립니다.

이 세계에 태어난 약하지만 순수한 존재로서누가, 우리에게, 평화가 아닌 시나리오를 말할 것인가?

- 한강 <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뉴욕타임스 기고 2017107

 

그리고 그 평화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만 있다면

개나리와 진달래 소굴 속에 웅크려 있던 대형 천막들에 대한 기억도 한결 가벼워질 것 같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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