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손석희앵커브리핑(2019)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6.11(화) '당신을 사랑하는 희호'

Buddhastudy 2019. 6. 12. 20:15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0여 년 전, 저는 이미 퇴임한 대통령을 2번이나 인터뷰했습니다.

마지막이 된 두 번째 인터뷰는 그의 동교동 자택 거실에서 있었지요.

이 거실에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인터뷰한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그는 저를 추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인터뷰 얘기는 과거에 앵커브리핑에서도 잠깐 쓰긴 했습니다만

오늘은 그때 그 장면에서 숨겨져 있던 1인치랄까

그 속에 있던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날 인터뷰가 끝나고 물러가려는 저를 그는 돌려세웠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를 돌려 세운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

 

그렇게 해서 제가 김대중 전대통령에게서

고향이 호남도 아니면서 무슨 삼합을 그리 좋아 하느냐

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던 점심을 먹고 오게 된 것이지요.

 

아래위 흰 정장을 차려입은 이희호 여사는 식사를 시작할 때 했던 한 마디

많이 드세요를 빼고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조용한 가운데 발하고 있던 존재감이란.

지금까지도 저의 기억에는 삼합을 두고 제가 DJ로부터 들었던 핀잔보다 그의 조용한 존재감이 더 선명하니까요.

 

대체로 역사 속 이름 없는 이들은 여성이었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조명이 켜진 세상의 뒤켠에는 감춰진 누군가의 알 수 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더랬습니다.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의 이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희호는 그렇게 김대중의 버팀목이 됐습니다.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 급히 서두르지 마세요

-19721219일 편지 (자료: < 옥중서신2 > 시대의창)

 

좁고 험한 길, 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에 더 희망이 보입니다.”

-1977521일 편지 (자료: < 옥중서신2 > 시대의창)

 

결혼식 열흘 뒤 감옥에 끌려가서 갇혀버린 젊은 정치인 김대중

 

그러기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뜻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1977617일 편지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는 희호라고 마무리된 아내의 편지는 그보다 강인했습니다.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했던 그의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날,

삼합으로 허기를 채운 점심 후에 동교동 자택을 나설 때도

이미 오래 전, 동교동 집 대문 앞에 걸어둔 김대중, 이희호나란한 부부의 문패는 그렇게 걸려있었습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