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0)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저에게 찾아오는 행복은 한계가 있나요?

Buddhastudy 2020. 8. 25. 20:13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여러 가지 요소요소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상당히 궁금하고 그런 것들을 쫓다보면 약간 부자연스러움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고요

그런 행복한 걸 찾다보니까 좀 더 강렬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로또를 하나 사야하는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만약 로또가 된다면 제 평생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 복이 다하는 건 아닌가 그 순간 그런 두려움이 있는게 제 첫 번째 질문이구요

 

두 번째는 아기를 키우고 있는데

주말에는 집사람이 일을 하다 보니까 온전히 아이와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아버지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알려주신다면

개인적으로 마음에 담아 두고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뭐였지?

인간은 누구나 다 요행을 바랍니다. 자기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돈만 있다면...

지위가 승진한다면...

뭐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인간의 꿈이고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이고 그런데

그건 누구나 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욕심이라고 하는 성격은 깊이 나중에 다 시간이 지나놓고 여러분들이 살펴보면

마약하고 똑~~같은 중독증상이 있다.

 

예를 든다면 마약 1g을 맞았을 때 쾌락이 100이었다.

다음에 1g을 맞았을 때는 그게 99가 되고, 98이 되고, 96이 되고

쾌감이 점점점점 떨어져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쾌감을 일정하게 유지하거나 더 높이고 싶은 게 또한

우리의..

그러니까 마약을 한두 번 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마약을 하게 되면 그 쾌감을 유지하거나 더 증폭시키기 위해서 투여량을 시간의 흐름을 늘릴 수밖에 없고

그 투여량을 늘리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증상까지 가게 된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절대로 안 그런다고 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거든요.

 

그것처럼 우리들의 욕망이라는 것도 내가 요기까지만 되면 나는 바랄 게 없다.

나는 요기까지만 되면 바랄 게 없다.

이렇게 되는데, 욕망이라는 성격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약하고 똑같아서

그게 되면 거기서 조금 더 늘고, 조금 더 늘고, 조금 더 늘고

그다음에 또 쾌락이라는 어떤 일이 성취되었을 때 기쁨이라고 하는 효과가

갈수록 똑같은 어떤 일이 되면 감소하게 돼요.

 

그러면 그것을 유지하거나 늘리기 위해서는

또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그래서 이 욕망을 따라가서는 인생이 끝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부처님이 세속에 있을 때 욕망을 따라갔다가 이게 끝이 없는 줄을 발견하고

그걸 버렸단 말이오.

두 번째 길은 욕망의 길을 무조건 억압하는 게 고행이에요.

그것도 끝 간 데까지 갔지만 안되어서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나, 이렇게 살펴보면서

 

욕망을 따라가면 욕망의 노예가 되고

욕망을 억압하게 되면 어떠냐..

그것 또한 욕망의 작용에 따른 반작용이기 때문에

그것 또한 스트레스가 되죠.

 

다시 말하면 욕망을 억압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긴장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긴장은 스트레스다 이렇게 볼 수 있거든요.

참는 건 다 스트레스에요.

참지 않으면 증폭이 되는 거요.

 

이 두 길이 이 세상에서 제1의 길, 2의 길

1의 길을 쾌락, 2의 길을 고행, 이렇게 말하는데

붓다는 그 두 가지 길의 모순을 발견하고 제3의 길을 발견했는데

그게 바로 중도라는 거요.

 

그것은 욕망을 알아차릴 뿐

욕망을 알아차릴 뿐이에요.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린다.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는다.

드러난 모습은 따라가지 않으니까 참는 거하고 똑같은데

참는 것은 긴장이 되는데, 이것은 알아차리기만 하기 때문에 긴장도 없는 거요.

편안~~~한 상태!

 

여기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이런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이런 욕망을 가지면 안된다 하면 제2의 길이 되고

이런 욕망을 정당화하면 제1의 길이 되는 거요.

 

나한테 마약과 같은 이런 욕망이 끊임없이 일어나는구나.

또 욕망이 일어나네.”

이렇게 다만 알아차릴 뿐이에요.

 

그걸 따라가지도 말고

그걸 나쁘다고 규정짓지도 말고.

 

내가 중생이다 보니까 욕망, 욕구가 끝없이 일어나는구나하고

다만 알아차리고 알아차린다.

 

이런 관점을 가지만 거기로부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유로워지는데

그걸 따라가면 지금 얘기한데로

자기는 고통에 빠지게 돼요.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이 자기가 지금 추구하는 행복은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얻어지는 행복을 추구하거든요.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만족이 일어나는데

그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는데

그러면 반드시 불만족이 반작용으로 반드시 되풀이되기 때문에

그런 행복을 추구하면 반드시 그런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고락이 윤회한다고 그래요.

윤회는 사람이 소 되고, 개 되고, 말 되고가 윤회가 아니에요.

 

컴퓨터도 사양이 비슷해야 호환이 되지

사양이 차이가 되면 호환이 돼요? 안 돼요?

사람하고 소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이 비슷할까? 호환이 될까? 안 될까?

 

택도 없는 소리,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그거는 옛날에 인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온 거예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고 어쩌고.. 생각하듯이

인도사람들이 생각한 건데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그런 게 아니고

고락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돌고 돈다, 이게 윤회에요.

이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게 해탈이에요. 열반이고.

 

자기가 욕구의 충족을 통하는 걸 행복으로 삼으면

반드시 고만한 크기의 불행이 늘 반작용으로 되풀이 된다.

그걸 자각해야 해요.

 

그럼 자기가 지금 요렇게 인생이 좀 재미가 있으니까

어떤 더 큰 마약 같은 더 큰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곧 큰 불행을 야기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욕심을 냈기 때문에 불행이 온다,

벌 받아서 불행이 온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어떤 것이 행복이다가 아니라

이렇게 삶에 충실하면 그저 잔잔히 느껴지는 일상사가 행복이에요.

행복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현실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에요.

뭐 욕망을 충족해야,

대통령이 된다고 행복이 아니에요.

 

지금 대통령님 행복할까? 힘들까?

그러니까 그거 좋은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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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두 번째 질문...

아이는 대부분 엄마의 영향을 받고 자라기 때문에

엄마가 지금 정신적인 약간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 다 부모 중에 특히 누구다?

엄마 문제잖아, 그죠?

 

그러기 때문에 자식을 키우는 엄마는 심리상태가 안정되어야 돼.

그래야 자녀의 정신건강이 좋아져요.

 

뭘 먹이고 뭘 입히냐는 거는 자기 욕망이지

애한테는 하등 중요 안해요.

아이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의 안정된 심리,

편안한 상태에서 엄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이렇게 볼 수 있거든요.

 

그러면 애기엄마가 그런 상태를 유지하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기엄마, , 내 부인이죠.

부인이 가능하면 좀 그런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적절한 역할을 하는 것.

이게 내가 내 자녀를 가장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일이다.

 

두 번째, 애가 나가서 동네 아이들 형아하고 놀면서 그 나름대로 사회성을 배우는 거예요.

그걸 내가 대신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옛날에 부모가 자식을 여럿 낳아서 키울 때는 저희끼리 저절로 사회성을 공부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아이들에게 5명에게 사탕을 5개씩 나눠줬다.

그런데 막내가 울면서 더 달라 그런다.

 

그러면 엄마가 큰애보고

하나 동생 줘라이렇게 명령을 내려서 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엄마가 밖에 외출하면 큰애가 가만히 있을까? 뺏을까?

뺏겠죠. 귀싸대기를 두드려 패든 해서

내놔!” 뺏어가버려요.

 

그러면 그 속에서 자신의 헛된 욕망이 조절이 되는 거요.

그런데 부모는 그걸 절대로 못 해요.

부모는 자식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냥 애 해달라는 대로 해준다, 이 말이에요.

 

그럼 요즘 애를 하나, 둘을 낳아 키우기 때문에

이 아이는 자기 또래의 사회성을 배울 기회가 없어요.

오직 어른하고만 관계를 맺으니까 항상 자기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속에서

어린 심리가 형성되기 때문에

이게 평생을 가는 거요.

 

아무리 군대 가서 훈련받고 해도

무의식세계에서 지맘대로 안되는 것에 대한 불만은 끝이 안나게 된다.

 

그래서 공동육아가 필요하고

애들이 밖에 나가서 형이나 동생하고 어울리면서 한 대씩 두드려 맞고도 오고, 울고도 오고

이런 것을 난리를 피우면 안 되고,

거기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사회성을 형성하는 거다.

 

그랬을 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놀아주고

같이 기억에 남겨주고

나를 네가 오래도록 기억해라

그거 아까 저 엄마처럼 ..욕심이에요.

어디 자기 놀 데 없어서 애 기억에 남아서 뭐하려고 그래?

자기가 외로운 존재인가 봐.

 

그러니까 내가 애 속에 어떤 기억에 남을 거냐, 자꾸 이런 생각하지 말고.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해주면 돼.

아이가 진짜 어른이 되면 아빠 생각도 안 나는 게 제일 좋아.

 

임금이 진짜 백성을 잘 다스리면

임금이 누군지 모르는게 진짜 잘 다스린다. 이런 말도 있잖아, 그죠?

 

그런데 그런 문제에서 아빠가 애한테 직접 해줄 수 있는 건

애가 밖에 가서 친구들하고 싸우고 왔을 때

애는 지금 흥분해서 왔지만, 아빠가

아이고, 그랬니? 싸웠니? 어떻게 하다 싸웠니? 공놀이하다 싸웠니?

아이고, 걔가 그랬니? 그래그래. 그럴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이렇게 해서

애는 불안정한데 자기는 마음의 안정이 되어 있어야 돼.

 

그러면 아이가 아빠하고 얘기하거나 엄마하고 얘기하다가

심리가 저절로 안정이 되어서, 휙하고 나가 그 친구하고 논단 말이오.

이거는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오.

 

이게 부모가 그렇게 의젓함으로써

아이들이 불안한 심리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안정된 심리를 되찾아 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떠냐?

? 누가 때렸어? 가보자이래서 애가 나중에

엄마, 엄마 그만해. 그만해할 정도로 가서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애가 나중에 다시는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부모한테 안 하는 거요.

더 난리를 피우니까.

 

이런 것이 잘못된 아이를 모르고 하는 행동이다.

항상 자기 욕망대로 행동하는 거요.

아이에게 어떤 거를 심어줄 거냐를 생각 안하고.

 

아빠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한다. 너무 그러지 말고

굳이 유태인 같은데 보면 3살 때까지는 교육이라는 걸 하면 안 돼요.

4살이 넘어서 자아가 형성되면 애기 손잡고 옛날 얘기도 해주고

특히 역사 얘기가 좋아요.

전설따라 삼천리 같지만 단군신화도 얘기해주고

애기 손잡고 수원성 위를 걷고

이렇게 가능하면 이런 뭐랄까?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거를 해주는 게 좋아요.

 

엄마나 할머니들 따라 어릴 때 절에 가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염불소리 듣고 따라 꿇어앉아 있었던 게

할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 항상 그게 머릿속에 기억이 나고

교회 다니다가도 나이 50, 60이 되어 다시 그 기억을 따라 절에 오기도 하고 이러거든요.

 

그래서 그런 정체성을 심어주는 게 좋아요.

그건 엄마보다도 아빠가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게 좋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빠하면 기억나는게 뭐다?

돈 주는 사람. ?

애한테 자기가 잘 못 하니까 가끔가다 보면

뭐 필요하노? 뭐 줄까?“ 해서

주는 자이렇게 밖에 안 돼요.

아무 감사한 것도 없고, 그냥 필요할 때 뭘 사다주는 사람. 이런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에게 자꾸 물질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오히려 아이와 좀 같이 놀아주고 얘기해주는. 시간이 난다면

그런 정도의 역할을 하면 되지

자꾸 의도적으로 기계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교육하는 것은

커서는 그게 좋지만 어릴 때일수록 그렇게 의도적인 건 별로 부작용을 나타낸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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