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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_흔들리지 않게 결정심으로 향하는 신심 [큰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종범스님 ]

Buddhastudy 2021. 2. 8. 20:09

 

 

안녕하십니까?

세등선원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많이많이 들었습니다.

듣기만 하던 세등선원을 직접 와서 참배하고 둘러보니까

도심 속에 아주 복잡한 도시 속에 있는데도 산중사찰처럼

환희심이 나고 장업스럽고 여법해서 제 마음이 깊은 데서부터 즐거운 생각이 솨악~ 올라옵니다.

아주 축하드립니다.

 

오늘 드릴말씀은요, 신심과 정진

그런 내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심은 결정심, 결정하는 마음이 신심이거든요.

부동심,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신심이에요. 결정심, 부동심.

정진은 끊임없이 실천하는 게 정진이거든요.

하다 말다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이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없이, 끊어짐이 없이, 끊임없이 끝없이

계속 실천해 나가는 그게 정진입니다.

 

그러면 신심은 흔들리지 않게 결정스러운 마음으로 향하는 것인데

무엇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향하는가?

우리 불성이에요. 불성.

불성에 대한 믿음이에요.

 

금강경에 보면

일체유의법은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는 생멸법이거든요.

생멸법은 몽환포영과 같다. 꿈과 같고 환과 같다.

여로역여전이라,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꿈과 같고 환과 같다는 얘기는 허망하다는 얘기고요

이슬 같고 번개 같다는 얘기는 무상하다는 얘기.

 

일체유의법은 다 허상하고 무상한데

허망하고 무상함을 아는 마음이 있는데

죽으면 죽는 줄 알고, 살면 사는 줄 알고, 그 아는 마음, 그게 불성이에요.

허공을 보면 허공인 줄 알고, 땅을 보면 땅인 줄 알고.

 

가끔 보면 대한민국에 노인들이 많아요, 사실상으로.

제가 40년대 출생을 했는데, 그때는 골목마다 아이들만 많았어요.

그래서 가는데 마다 아이들이 혼나고 쫓겨나고 아이들의 가치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늙어보니까 가는데 마다 노인들이라.

노인 값이 안 나가요. 값이 안 나가.

 

어릴 때는 아이들 값이 안 나가더니, 나이 드니까 노인 값이 안 나가.

이거 이상한 시대에 내가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늙는 줄은 누가 아느냐? 이 말이거든요.

늙는 건 우리 몸인데, 허망하고 무상한 몸인데

그 몸이 늙는 줄을 누가 아느냐?

그 아는 마음이 그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세상을 향해서 쫓아가면 항상 허망하고 무상한 고통이 있는데

그 아는 마음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적멸락이 있다고 그래요.

적멸은 나고 죽음이 없는 게 적멸인데요

 

나고 죽음이 없는 불성락이 있다. 이거죠. 불성락.

고통은 생멸에 있고, 진정한 즐거움은 적멸에 있는데

그 적멸락을 극락이라고 해요. 극락.

그 적멸락을 또 안락이라고 그래요. 편안하고 즐겁다고.

그 적멸락을 상락이라고 그래요. 항상 상, 즐거울 락, 항상 즐겁다고.

 

그래서 우리 몸도 허망하고 무상하게 없어지고

세상도 허망하고 무상하게 변하는데요

30년 전에 보던 대전이 오늘날 대전이 아니에요.

유성이 그렇게 변한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고향이 저 청양인데 청양에 가면 어릴 때 뛰어놀던 운동장이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도 못하겠어요.

 

이게 세상입니다.

세상은 다 변해요.

산천도 변하더라고요.

어릴 때는 산에 올라가면 큰 나무가 별로 없었어요.

전부 민둥산이 많고 벌거벗은 사태 난 산이 그렇게 많았어요.

그래서 나무 심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즘은 가는데 마다 나무가 울창해서

옛날 40, 50년 전의 우리나라가 아니에요. 도시도 40, 50년 전의 도시가 아니고.

 

사람도 변해요.

옛날에는 노인들이 흰머리가 많아서 백발노인이라고 그랬는데

요즘 백발노인 한 분도 없어요. 전부 까매.

머리가 안 세는지, 요즘에는. 머리 센 노인 보지를 못해요.

이렇게 변하는 거예요.

몽환포영이요, 여로역여전이라, 꿈과 같아요. 헛개비와 같아.

 

그런데 그렇게 변하는 줄을 볼 줄 알고

변하는 줄을 느낄 줄 아는, 그게 불성이거든요.

눈은 이 눈 모습이 옛날 눈 모습이 아닌데

그 보는 능력은 같아요.

그래서 변하는 속에 변하지 아니하는 불성이 있다.

 

그래서 능엄경 같은 데서는

환상 속에 진실이 있다, 이래요.

환상은 이 몸이거든요. 몸은 수시로 늙어가고 변해가는데

거기에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진실이 있다.

환상신체, 신체는 환상인데, 불성은 실상이다.

 

그 불성으로 돌아가야 모든 근심·걱정에서 해탈을 해요.

몸과 물질에 얽매이면 끝이 없어요.

그걸 윤회의 고통이라고 하거든요.

윤회라는 얘기는 되풀이된다는 얘기죠. 오고가고 오고가고.

 

그러니까 이 몸과 물질에는 되풀이되는 고통이 있는데

그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마음을 찾아 들어가면

거기에는 생멸없는 진실락, 적멸락, 기쁘다, 슬프다는 락이 아니라

항상 즐거운 상락, 지극히 즐거운 극락,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이 있다.

그게 불성이거든요.

 

그래서 불성에 대한 법문이 많아요.

구경일승보성론이라고 하는 논에서는 불성에 대한 법문을 어떻게 했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불이 다른 건 다 태우는데 못 태우는 게 하나 있다고 그래요.

그게 뭐냐하면 허공이라고 합니다. 허공.

불이 다른 건 다 태우는데, 허공은 태울 수가 없다.

불로 허공 태우려고 그러면 안 된다.

 

약소무시처 (태우려고 애를 써도 태울 수 없다)

태우려고 애를 쓴다면 태울 수 없는 일이다.

 

여시노병사(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이와 같이)

늙고 병나고 죽는 것이

 

불능소불성이라.

불성은 태울 수 없다.

 

노병사는 불과 같고, 불성은 허공과 같은데

불이 허공을 태울 수가 없듯이, 늙고 병나고 죽는 것이 불성을 태울 수가 없다.

그런 법문이 있어요.

 

그리고 불성은 일체중생에게 다 있고, 산천초목에게 다 있고, 우주 만물에 다 있어서

크려고 하면 온 허공법계에 가득하고도 남고

작으려고 하면 티끌보다도 더 작아서

청정미묘불성이라, 이렇게 얘기해요.

청정이라는 건 섞인 게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미묘하다, 보이는듯하면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고.

형상에 속하지 않아요.

형상에 안 속하는 걸 미묘하다고 하거든요.

무상심심 미묘법이라, 그게 형성에 속하지 않는 가르침이다, 이 소리거든요.

그 얘기는 불성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불성의 세계는 이런 거라.

불성을 밝히고 보면 우리 몸도 불성이요, 하늘도 불성이요, 땅도 불성이요,

화화초초 두두물물이라, 옛날에 그렇게 했는데

옛날 내가 어릴 때 큰스님들한테 법문 들어보면 전부 한자 말만 많이 해서 어렵고 재미가 별로 없었고 그랬는데 심오한 맛은 있더라고요.

모든 것이이렇게 말하지 않고 화화초초 두두물물그랬어요.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그냥 하나하나 물건물건이 불성 아닌 게 없다 그랬는데

요즘 제가 그래요.

 

제가 옛날 큰스님들처럼 말만 하면 한자를 써요.

그런데 그걸 안 쓰고 싶어도 그걸 안 쓰면 직성이 안 풀려요, 하다 만 것 같고

한자를 하나 탁 집어 넣으면 실감이 확 나는데, 그냥 어벙벙하게 말하고 나면 허전해.

모든 것이이러는 것보다 화화초초 두두물물이 이러면 그냥 ㅎㅎㅎ 뭐가 확 잡히는 것처럼 이렇단 말이에요.

 

화화초초 두두물물이 전부가 불성이에요, 전부가.

그래서 이 불성을 하나 밝히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요.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불성을 못 밝히면 근심걱정이 안 끊어지니까 그걸 생사 윤회라 그래요.

적멸해탈 생사윤회.

적멸은 불성인데 생사없다, 이 말이거든요.

 

사나대지 이 모든 만물은 생겼다 없어졌다 하지만

허공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불성은 항상 빛나고 움직이고 활동하는데 생멸이 없다.

그래서 묘법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묘법.

생멸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묘법이에요.

 

그런데 그런 불성을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몰라서 고생이에요. 없어서 고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있는 걸 바로 아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러거든요.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는 거 바로 아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여실지견이라, 실답게 알고 본다. 여실, 실답게 진실과 같이.

그럼 지금 여기 앉아서 햇빛 드는 것도 알고, 바람 부는 것도 알고, 말소리 듣는 것도 알고

그게 불성이에요.

그런데 햇빛 쫓아가고 말소리 쫓아가고 그러면 그게 생사에요.

쫓아가면 생사이고 안으로 밝히면 불성이다.

 

생사가 불성이지, 불성하고 생사하고 근본이 다는 건 아니에요.

쫓아가면 생사에요. 죽고 사는 거예요.

밝히면 불성이에요. 밝혀라.

그러면 그게 불성인데 불성은 해탈이다.

 

그래서 요즘에 보면 명상이라든지, 마음치료, 마음공부,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그런데 이 명상이나 치료, 외국말로 힐링이라는 말을 많이 쓰거든요.

무슨 병이 그렇게 많은지 힐링을 한대.

병없는 걸 바로 알 아야 되지, 병을 딱 인정해놓고 치료하려고 그러면 억만년 해도 안 되거든요.

불성에는 병이 없다.

그 병없는 불성을 바로 보면 모든 병이 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나에게는 무슨 병이 있다. 어릴 때 상처를 받아서 병이 생겼다.

어머니가 나를 잘못해줘서 그때부터 생채기가 났다,

이따위 소리 하면 안 돼요, 그게.

그냥 그대로 병없는 불성을 그냥 바로 보면 병 다 없어져요.

아 이거 참내...

 

본래 이렇게 법당 높은 데하고 저 마당 낮은데 하고 이중으로 갈라지면 박수가 잘 안 나와요. ㅎㅎ

박수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밖에서 듣는 거 하고 안에서 듣는 거 하고 틀리거든요.

문 다 열리고 바람소리가 더 시원한데 말소리가 들리겠어요?

 

그러니까 불성으로 돌아가야 모든 병이 다 없는 거예요.

불성으로 돌아가야.

괴로운 마음을 인정하고 나는 괴로움이 조상한테서 왔다. 부모한테서 왔다.

이러면 그것이 병이에요.

 

그러면 괴로운 마음이 무엇인고 하고 괴로운 마음을 안으로 내조반조를 하면

안으로 본다가 내조이고, 돌이켜 본다가 반조거든요.

비칠 조, 본다 이 소리예요.

안으로 보고 돌이켜서 딱 보면 거기에는 불성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삶과 죽음도 없고, 희노애락 근심걱정 전혀 없고

오로지 밝고 밝은 불성만 하나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치료에요.

 

병을 내가 만들어서 덮어 써넣고, 내가 그 병으로부터 나오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 자기 그림에 자기가 속상해하고 무서워하고 병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 그림자에 놀라서 자빠지고 넘어지고 상처받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따라오는 그림자를 보면 저놈의 그림자가 따라온다 해서 계속 도망가면

그게 안 없어져요, 그림자가.

그러면 딱 서서 그림자를 딱 보면

, 이건 나한테서 나왔다. 그림자가 없다. 나한테서 나왔다.’

이게 정신치료거든요.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게 정시치료이지, 병을 인정해놓고 그 병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이것은 잘못된 거거든요.

바로 그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