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세등선원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많이많이 들었습니다.
듣기만 하던 세등선원을 직접 와서 참배하고 둘러보니까
도심 속에 아주 복잡한 도시 속에 있는데도 산중사찰처럼
환희심이 나고 장업스럽고 여법해서 제 마음이 깊은 데서부터 즐거운 생각이 솨악~ 올라옵니다.
아주 축하드립니다.
오늘 드릴말씀은요, 신심과 정진
그런 내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심은 결정심, 결정하는 마음이 신심이거든요.
부동심,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신심이에요. 결정심, 부동심.
정진은 끊임없이 실천하는 게 정진이거든요.
하다 말다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이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없이, 끊어짐이 없이, 끊임없이 끝없이
계속 실천해 나가는 그게 정진입니다.
그러면 신심은 흔들리지 않게 결정스러운 마음으로 향하는 것인데
무엇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향하는가?
우리 불성이에요. 불성.
불성에 대한 믿음이에요.
금강경에 보면
일체유의법은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는 생멸법이거든요.
생멸법은 몽환포영과 같다. 꿈과 같고 환과 같다.
여로역여전이라,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꿈과 같고 환과 같다는 얘기는 허망하다는 얘기고요
이슬 같고 번개 같다는 얘기는 무상하다는 얘기.
일체유의법은 다 허상하고 무상한데
허망하고 무상함을 아는 마음이 있는데
죽으면 죽는 줄 알고, 살면 사는 줄 알고, 그 아는 마음, 그게 불성이에요.
허공을 보면 허공인 줄 알고, 땅을 보면 땅인 줄 알고.
가끔 보면 대한민국에 노인들이 많아요, 사실상으로.
제가 40년대 출생을 했는데, 그때는 골목마다 아이들만 많았어요.
그래서 가는데 마다 아이들이 혼나고 쫓겨나고 아이들의 가치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늙어보니까 가는데 마다 노인들이라.
노인 값이 안 나가요. 값이 안 나가.
어릴 때는 아이들 값이 안 나가더니, 나이 드니까 노인 값이 안 나가.
이거 이상한 시대에 내가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늙는 줄은 누가 아느냐? 이 말이거든요.
늙는 건 우리 몸인데, 허망하고 무상한 몸인데
그 몸이 늙는 줄을 누가 아느냐?
그 아는 마음이 그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세상을 향해서 쫓아가면 항상 허망하고 무상한 고통이 있는데
그 아는 마음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적멸락이 있다고 그래요.
적멸은 나고 죽음이 없는 게 적멸인데요
나고 죽음이 없는 불성락이 있다. 이거죠. 불성락.
고통은 생멸에 있고, 진정한 즐거움은 적멸에 있는데
그 적멸락을 극락이라고 해요. 극락.
그 적멸락을 또 안락이라고 그래요. 편안하고 즐겁다고.
그 적멸락을 상락이라고 그래요. 항상 상, 즐거울 락, 항상 즐겁다고.
그래서 우리 몸도 허망하고 무상하게 없어지고
세상도 허망하고 무상하게 변하는데요
30년 전에 보던 대전이 오늘날 대전이 아니에요.
유성이 그렇게 변한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고향이 저 청양인데 청양에 가면 어릴 때 뛰어놀던 운동장이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도 못하겠어요.
이게 세상입니다.
세상은 다 변해요.
산천도 변하더라고요.
어릴 때는 산에 올라가면 큰 나무가 별로 없었어요.
전부 민둥산이 많고 벌거벗은 사태 난 산이 그렇게 많았어요.
그래서 나무 심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즘은 가는데 마다 나무가 울창해서
옛날 40 50년 전의 우리나라가 아니에요. 도시도 40 50년 전의 도시가 아니고.
사람도 변해요.
옛날에는 노인들이 흰머리가 많아서 백발노인이라고 그랬는데
요즘 백발노인 한 분도 없어요. 전부 까매.
머리가 안 세는지, 요즘에는. 머리 센 노인 보지를 못해요.
이렇게 변하는 거예요.
몽환포영이요, 여로역여전이라, 꿈과 같아요. 헛개비와 같아.
그런데 그렇게 변하는 줄을 볼 줄 알고
변하는 줄을 느낄 줄 아는, 그게 불성이거든요.
눈은 이 눈 모습이 옛날 눈 모습이 아닌데
그 보는 능력은 같아요.
그래서 변하는 속에 변하지 아니하는 불성이 있다.
그래서 능엄경 같은 데서는
환상 속에 진실이 있다, 이래요.
환상은 이 몸이거든요. 몸은 수시로 늙어가고 변해가는데
거기에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진실이 있다.
환상신체, 신체는 환상인데, 불성은 실상이다.
그 불성으로 돌아가야 모든 근심·걱정에서 해탈을 해요.
몸과 물질에 얽매이면 끝이 없어요.
그걸 윤회의 고통이라고 하거든요.
윤회라는 얘기는 되풀이된다는 얘기죠. 오고가고 오고가고.
그러니까 이 몸과 물질에는 되풀이되는 고통이 있는데
그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마음을 찾아 들어가면
거기에는 생멸없는 진실락, 적멸락, 기쁘다, 슬프다는 락이 아니라
항상 즐거운 상락, 지극히 즐거운 극락,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이 있다.
그게 불성이거든요.
그래서 불성에 대한 법문이 많아요.
구경일승보성론이라고 하는 논에서는 불성에 대한 법문을 어떻게 했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불이 다른 건 다 태우는데 못 태우는 게 하나 있다고 그래요.
그게 뭐냐하면 허공이라고 합니다. 허공.
불이 다른 건 다 태우는데, 허공은 태울 수가 없다.
불로 허공 태우려고 그러면 안 된다.
약소무시처 (태우려고 애를 써도 태울 수 없다)
태우려고 애를 쓴다면 태울 수 없는 일이다.
여시노병사(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이와 같이)
늙고 병나고 죽는 것이
불능소불성이라.
불성은 태울 수 없다.
노병사는 불과 같고, 불성은 허공과 같은데
불이 허공을 태울 수가 없듯이, 늙고 병나고 죽는 것이 불성을 태울 수가 없다.
그런 법문이 있어요.
그리고 불성은 일체중생에게 다 있고, 산천초목에게 다 있고, 우주 만물에 다 있어서
크려고 하면 온 허공법계에 가득하고도 남고
작으려고 하면 티끌보다도 더 작아서
청정미묘불성이라, 이렇게 얘기해요.
청정이라는 건 섞인 게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미묘하다, 보이는듯하면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고.
형상에 속하지 않아요.
형상에 안 속하는 걸 미묘하다고 하거든요.
무상심심 미묘법이라, 그게 형성에 속하지 않는 가르침이다, 이 소리거든요.
그 얘기는 불성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불성의 세계는 이런 거라.
불성을 밝히고 보면 우리 몸도 불성이요, 하늘도 불성이요, 땅도 불성이요,
화화초초 두두물물이라, 옛날에 그렇게 했는데
옛날 내가 어릴 때 큰스님들한테 법문 들어보면 전부 한자 말만 많이 해서 어렵고 재미가 별로 없었고 그랬는데 심오한 맛은 있더라고요.
‘모든 것이’ 이렇게 말하지 않고 ‘화화초초 두두물물’ 그랬어요.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그냥 하나하나 물건물건이 불성 아닌 게 없다 그랬는데
요즘 제가 그래요.
제가 옛날 큰스님들처럼 말만 하면 한자를 써요.
그런데 그걸 안 쓰고 싶어도 그걸 안 쓰면 직성이 안 풀려요, 하다 만 것 같고
한자를 하나 탁 집어 넣으면 실감이 확 나는데, 그냥 어벙벙하게 말하고 나면 허전해.
‘모든 것이’ 이러는 것보다 ‘화화초초 두두물물’이 이러면 그냥 ㅎㅎㅎ 뭐가 확 잡히는 것처럼 이렇단 말이에요.
화화초초 두두물물이 전부가 불성이에요, 전부가.
그래서 이 불성을 하나 밝히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요.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불성을 못 밝히면 근심걱정이 안 끊어지니까 그걸 생사 윤회라 그래요.
적멸해탈 생사윤회.
적멸은 불성인데 생사없다, 이 말이거든요.
사나대지 이 모든 만물은 생겼다 없어졌다 하지만
허공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불성은 항상 빛나고 움직이고 활동하는데 생멸이 없다.
그래서 묘법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묘법.
생멸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묘법이에요.
그런데 그런 불성을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몰라서 고생이에요. 없어서 고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있는 걸 바로 아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러거든요.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는 거 바로 아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여실지견이라, 실답게 알고 본다. 여실, 실답게 진실과 같이.
그럼 지금 여기 앉아서 햇빛 드는 것도 알고, 바람 부는 것도 알고, 말소리 듣는 것도 알고
그게 불성이에요.
그런데 햇빛 쫓아가고 말소리 쫓아가고 그러면 그게 생사에요.
쫓아가면 생사이고 안으로 밝히면 불성이다.
생사가 불성이지, 불성하고 생사하고 근본이 다는 건 아니에요.
쫓아가면 생사에요. 죽고 사는 거예요.
밝히면 불성이에요. 밝혀라.
그러면 그게 불성인데 불성은 해탈이다.
그래서 요즘에 보면 명상이라든지, 마음치료, 마음공부,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그런데 이 명상이나 치료, 외국말로 힐링이라는 말을 많이 쓰거든요.
무슨 병이 그렇게 많은지 힐링을 한대.
병없는 걸 바로 알 아야 되지, 병을 딱 인정해놓고 치료하려고 그러면 억만년 해도 안 되거든요.
불성에는 병이 없다.
그 병없는 불성을 바로 보면 모든 병이 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나에게는 무슨 병이 있다. 어릴 때 상처를 받아서 병이 생겼다.
어머니가 나를 잘못해줘서 그때부터 생채기가 났다,
이따위 소리 하면 안 돼요, 그게.
그냥 그대로 병없는 불성을 그냥 바로 보면 병 다 없어져요.
아 이거 참내...
본래 이렇게 법당 높은 데하고 저 마당 낮은데 하고 이중으로 갈라지면 박수가 잘 안 나와요. ㅎㅎ
박수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밖에서 듣는 거 하고 안에서 듣는 거 하고 틀리거든요.
문 다 열리고 바람소리가 더 시원한데 말소리가 들리겠어요?
그러니까 불성으로 돌아가야 모든 병이 다 없는 거예요.
불성으로 돌아가야.
괴로운 마음을 인정하고 나는 괴로움이 조상한테서 왔다. 부모한테서 왔다.
이러면 그것이 병이에요.
그러면 괴로운 마음이 무엇인고 하고 괴로운 마음을 안으로 내조반조를 하면
안으로 본다가 내조이고, 돌이켜 본다가 반조거든요.
비칠 조, 본다 이 소리예요.
안으로 보고 돌이켜서 딱 보면 거기에는 불성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삶과 죽음도 없고, 희노애락 근심걱정 전혀 없고
오로지 밝고 밝은 불성만 하나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치료에요.
병을 내가 만들어서 덮어 써넣고, 내가 그 병으로부터 나오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 자기 그림에 자기가 속상해하고 무서워하고 병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 그림자에 놀라서 자빠지고 넘어지고 상처받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따라오는 그림자를 보면 저놈의 그림자가 따라온다 해서 계속 도망가면
그게 안 없어져요, 그림자가.
그러면 딱 서서 그림자를 딱 보면
‘아, 이건 나한테서 나왔다. 그림자가 없다. 나한테서 나왔다.’
이게 정신치료거든요.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게 정시치료이지, 병을 인정해놓고 그 병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이것은 잘못된 거거든요.
바로 그거예요.
그러면 자기불성을 우선 믿어야 해요.
그래서 제사 지낼 때 항상 하는 법문이 있는데,
아유일권경하니 나에게 한권의 경이 있다, 경이 한 권 있어요, 나에게.
불인지묵성이라, 종이와 먹으로 된 경이 아니에요. 종이와 먹으로 되지 않은 경이 하나 있는 거예요. 불성이라는 얘기죠.
경이라고 그러면 종이 위에다가 먹으로 글씨를 써서 경이잖아요.
종이나 먹이나 글자로 된 경이 아니고 형상 없으면서 항상 빛나고, 형상 없으면서 항상 움직이는 그 청정미묘한 불성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게 나에게 있는 한 권의 경이다.
종이와 먹으로 되지 않는 경이다.
전개무일자, 글로 써서 뭘 밝히는 것이 아니라
상방대광명, 항상 대광명을 비춘다.
그 대광명을 어떻게 비추냐?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생각할 줄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이게 불성이에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게 불성이에요.
그게 보배에요. 천하의 보배.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게 불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전도행위라고, 뒤 밖인 행위라고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 불성은 접어두고
보이면 보이는데 쫓아가고, 들리면 들리는데 쫓아가고, 생각나면 생각나는데 쫓아가고, 움직일 때는 움직일 때 쫓아가서
자기 불성은 항상 진흙 속에 묻힌 보물처럼 묻혀있고
생사, 생멸에만 움직이면서 사는 게 오직 모르는 범부다, 이러거든요.
불성을 알면 보살인데, 불성을 모를 때 범부라고 그래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그것이 종이와 먹이 없는 한 권의 경인데
항상 광명을 비추고 있다.
그래서 제사지낼 때 이 염불로 계속 제사를 지내요.
또 그다음에는 화엄경 십정품이라고 품이 있는데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쫓아가는 것은 밤과 낮으로 비유를 했고
그 불성은 태양으로 비유를 했어요, 태양.
그래서 태양은 경에서 일천자라고 그래요. 일천자.
화엄경 약찬계에 보면 일천자 월천자 그러거든요.
그 천자는 하늘 천, 아들 자, 그냥 하늘이라 이 소리에요.
일은 하늘에 있는 해가, 이 소리거든요.
자는 어조사, 남자 여자처럼 그냥 명사 뒤에 붙이는 말이고요,
일천자 그러면 해. 해가 항상 밝아서 항상 비추는데
이 해가 말이에요, 일출명주요, 세상에 이렇게 나타날 때 일출을 할 때는 낮이라고 그러고
일몽명야라, 어느 세상에서 해가 떡 사라져서 일몰을 하면 밤이라고 한다.
화엄경 십정품에 있는 법문이에요.
그런데 해라고 하는 것은 주역불생이요,
동쪽에서 해가 쏵 솟아오지만, 그 솟아오르는 해가 보이지만, 아침에 해가 생긴게 아니다, 이거죠.
주역불생이라, 낮에도 생긴게 아니다, 해가.
난 어릴 때요, 아침마다 해가 동쪽에서 솟아오르는데, 참 신기하더라고요.
어디 해 만드는 공장이 있는 줄 알았어요.
어디서 해를 만들어서 아침에 해를 띄워 보내고 그런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무가 흔들릴 때가 되면 바람이 불더라고.
그래서 바람이 나무에서 생기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무가 없는 곳에 가면 바람이 없겠구나하고 넓은 들판에 가보니까 거기에도 바람이 있더라고.
그래서 이 바람이 절 넓은 데서 어디서 왔나 그랬더니
그때 생각에 저 먼 나무에서 바람이 생겨서 여기까지 왔겠지 이랬어요.
저 해라는 건 아침마다 보이지만 생긴게 아니거든요.
본래 해는 하나 뿐이에요.
해라는 건 저녁마다 안 보이지만 없어진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보이고 안 보이고 생멸을 하지만
불성은 보일 때는 보이는 데로 불성이고, 안 보일 때는 안 보이는 데로 불성이기 때문에
이 불성의 참 마음을 알고 나면
나고 죽고 보이고 안 보이는데, 일체 두려움이 없어요.
이걸 무유공포라고 그래요. 공포가 없다.
무유라는 말은 없다는 말이잖아요. 공포는 두려움이잖아요.
우리 범부들은 항상 근심걱정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밤과 낮만 알지 밤과 낮이 없는 태양을 몰라서 생기는 일이다. 이 말씀이죠.
그러면 그런 불성을 찾아갈 때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의외로 아주 간단해요.
그걸 전부 불교에서는 수행이라고 그러는데요,
불교에서 하는 모든 일은 이 불성을 찾는 방법이에요.
그걸 어려운 말로 수행이라고 그러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단행과 융행이 있는데
단행은 홑단, 한 가지만 하는 거예요. 홑으로, 홑으로 한 가지만.
융행이라는 건 원융할 융, 온갖 거 다 아는 거에요. 온 갖거.
그러니까 이 불성을 찾는 방법은
절하는 것도 불성을 찾는 방법이요
기도하는 것도 방법이요
보시하고, 공양하고 선행을 하는 것도 불성을 찾는 방법이요
일체 그 공덕행이 전부 불성을 찾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걸 백천수행방편문이라. 이래요.
방편이라는 건 가까이 간다 이 소리거든요.
그러면 수행방편문이 얼마나 많으냐?
백천수행방편문이라고 백 가지 천 가지 수행방편문이다.
우리가 절에 한번 이렇게 오는 것도 불성을 찾는 방법이에요.
경을 보는 것도 그 불성을 찾는 방법이에요.
경을 보는 게 아니라 불성을 보는 거거든요.
우리가 거울을 보면 거울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보러 가죠? 자기 얼굴 보러 가는 거예요.
거울 앞에 가 있어면 거울은 없고 자기 얼굴 뿐이에요.
경을 뭐하러 봐요. 자기 불성을 보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게 다.
공덕을 짓는 것은 전부 불성을 위한 것이고,
모든 원력이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그 불성의 도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공덕을 행하도록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그러니까 불교는 어떤 방법을 가르쳐도 불성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서 가르치는 거것이지
다른 거, 생사의 고통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그게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고, 기본 구조입니다.
그럼 불성을 보면 뭐냐?
박수치고, 조용하고, 말소리 들리고, 이걸 신통이라고 그래요.
불성을 보면 일체 행위가 다 신통인데, 신통이라는 거 알죠? 신비롭게 통하는 거.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저쪽으로 가는 행위가 신통이잖아요. 그게 불성이에요.
그런데 불성을 모르면
이것은 바람이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말소리다. 요렇게 구분만 해요.
이걸 분별이라고 해요. 나눌 분, 가를 별. 나눠서 가르기만 하는 거예요. 아주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게 불성인데,
그 불성을 찾아가는 방법이 수행이다.
그럼 수행은 여러 가지, 한길만 가는 것도 수행이고, 온갖 것을 다 함께 하는 것도 수행인데
단행과 유행이 있는데, 단생수행 유행수행이 있는데, 그 원리는 모두 똑같은 것에요.
원리는 뭐냐?
반조, 회심,
또 의상스님은 도리킬 반, 감정이라는 정, 반정이라고 그랬어요. 반정.
모든 감정을 돌이킨다. 돌이켜보면 해탈이 있어요. 쫓아가면 생멸이 있어요.
우리 범부의 삶이 전부 쫓아가는 삶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생활의 절대 근심걱정 안 하고, 즐겁게 자기 근본에 돌아가서 행복한 분들을 다 성인이라고 그래요.
자기 근본에 돌아가서 행복하면 성인이에요.
만날 취직 걱정하고 먹고살 거 걱정하고
이러다가 걱정하다 죽고, 헤매다 죽는 걸 범부라고 그래요.
병나면 죽는 거고요, 늙으면 죽는 거예요.
가만히 그래서.. 늙음을 알고 죽음을 아는 이놈이 뭔고?...
거기에 늙음도 죽음도 없어요.
그게 극락이에요.
그러니까 돌이키는 방법이 그게 수행의 근본이에요.
돌아가는 거예요. 기원, 돌아갈 기, 기원 원, 기원
반조, 돌이켜 본다.
회심, 마음을 돌이킨다. 감정을 돌이킨다.
돌이켜보면 수행이에요.
그런데 왜 여러 가지 공덕을 닦냐?
공덕이 많으면 많을수록 돌이켜보는 힘이 강해요.
몸이 건강해야 달리기를 잘할 수 있듯이, 공덕이 많으면 돌이켜보는 힘이 강해요.
여러 가지 그 공덕이 부족하면 장애가 많아서 여러 장애가 뒤따라와서 잘 안 돌아봐 져요.
그래서 그걸 조행이라고 그래요.
공덕은 돕는 행위이고, 돌아보는 행은 정행, 바로보는 행이다.
돌이켜보면 돼요.
돌이키는 게 수행이에요.
그리고 생활에 막 얽매이는 건 그건 생멸고통이에요.
그러니까 아직까지 먹고 살만한데, 20년 걱정하고, 30년 걱정하고 걱정하다 죽더라고. 참...
헤매다 죽고. 구하다 죽고,
언제 다 구해? 다 구하는 사람 제가 한 사람도 못 봤거든요. 구하다 죽어요.
그래서 이 생활 속에서 걱정을 적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삶이라는 것은 소비거든요. 소비.
이 소비를 생각을 가지고 소비하는 게 중요해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은 돈을 많게 쓰는 것도 중요해요.
적은 돈을 많게 쓰는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소비를 할 때, 그냥 생존소비로 만족할 수가 있어요.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소비를 아주 적게 하는데 그냥 만족해요.
이게 생존소비에요.
그저 집에 가스 있으면 되고, 쌀 있으면 되고, 소금 있으면 되고, 수돗물 나오고 그러면 사는 거예요.
아무 걱정 없어. 이걸 생존소비라고 그래요.
그다음에는 향락소비가 있어요.
향락은 즐거워야 해요.
옷을 입어도 명품을 입어야 만족하는 거예요.
머리를 해도 돈을 많이 들여야 기분이 좋고, 자동차도 아주 좋은 걸 타야 하고, 신발도 좋아야 하고
이렇게 고가품으로 고소비를 할 때 만족을 느끼는 그것을 향락소비라고 그래요.
그래서 자기의 소비가 자기 인격을 결정한다.
이래서 명품든 사람하고 보통 물건 든 사람하고 나란히 가면
명품든 사람을 인정하고 명품 안 든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게 향락이에요.
이렇게 하다 보면 명품만 명품만 찾다가 그냥 죽어요. 답이 없어요.
그다음에 만족소비에요.
만족이라, 그냥 만족하면 되는 거예요.
소비의 물량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물 한 잔 마시면 만족하면 그만이에요. 커피 안 마셔도 돼요.
그냥 뭘 하든지, 만족하면 그만이고요.
그냥 밥을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만족하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그 만족이 행복이거든요.
그걸 만족소비라고 그래요.
그리고 목적소비가 있어요. 목적소비.
무슨 목적을 하나 이루기 위해서는 거기에다 모든 걸 집중하고
내가 먹고 입고 쓰고 활동하는 데는 최대한 아끼고 줄인다. 이게 목적소비에요.
무슨 하나의 뜻하는 바가 있으면 그 뜻하는 바에 맞추어서 삶 전체가 통일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수행이 그냥 한 가지만 되는 게 아니라
그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다 거기에 합쳐져야 하거든요.
그게 융행과 단행이에요. 융행.
융행은 여러 가지가 함께 하는 것이고 단행은 한가지고 하는 거거든요.
그럼 우리 모든 게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물질을 통해서 우리 불성으로 돌아가고, 행동을 통해서 불성으로 돌아가고
또 무슨 경을 본다든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생각으로 집중하는 그런 걸 통해서 불성으로 돌아가고.
이게 전부 원리가 똑같거든요.
그래서 돌아가고 돌아가고 보면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고 밝아져서
바로 통하게 돼요.
이런 것을 원통이라고 그래요. 원통.
둥글 게 다 통한다고.
둥글게 다 통한다.
그러면 그걸 정진이라고 그래요.
정진인데, 처음에는 믿고 하는 거예요. 믿고.
믿고 하는 정진을 신행정진이라고 그러고, 점점 신행정진이 깊어지면 눈으로 불성을 보게 되요.
그걸 나타날 현, 볼견, 현견불성이라고 그래요.
현견불성이 되면 그걸 십지 중에 초지보살이라고 그러거든요.
눈으로 불성을 봐요.
우리가 이렇게 보면 이게 책이잖아요. 화엄경인데.
이걸 책이라고 보면 책이라는 분별이 앞을 가려서 이게 불성인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십지보살이 딱 되면 책이라는 분별은 없고 바로 불성을 바로 보는 거예요.
이게 책이면서 바로 불성이에요.
두두물물이 불성이다, 이 책을 없애야 불성이 아니라
두두물물이 개시불성이다, 책은 책대로 불성이고 꽃은 꽃대로 불성이고, 죽으면 죽는대로 불성이고 살면 사는대로 불성이고, 이런 거죠.
이렇게 딱 되면, 이 가운데서도 점점 깊어지고 깊어지고 깊어져서
가장 높게 되면 그걸 무상각(그 위에 더 없는 바르고 원만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그러거든요.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불성을 본 후에도 계속 정진하는 것을 정행정진(증득한 행위로 계속 닦아나간다)이라고 그래요.
증득할, 영수증할 때 증, 몸으로 체험한다는 말인데,
정행정진. 증득한 행위로서 계속 닦아 나간다.
불성을 보기 전에 믿고 하는 정진을 신행정진
보살지 위에 올라가면 다 정행정진이에요.
항상 눈으로 불성을 보면서 닦고 닦고 또 닦고
그게 성불이거든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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