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
내가 항상 그러죠.
한 가정에, 갖추어서 사는 가정이 있는데
이것이 공 덩어리 같다.
그러면 우리가 즉 말하자면
“얘, 아무개야!” 부를 때에
“네.” 그러고 아들 노릇을 하지
딴 사람 노릇을 하지 않죠?
그렇게 모습은 그대로 있는데 그렇게 바뀐단 말입니다.
바뀔 때는 보이지 않는 데서 아들로 그냥, 과거로 그냥 되는 거죠.
“아버지!” 할 때는 또 아버지 노릇 하느라고 바뀌죠?
속에서는 바뀌는 거예요.
거죽 모습은 안 바뀌어도.
속에서는 바뀌어서 돌아가는 겁니다.
“여보!” 하면
또 남편 노릇을 하는 데도 그냥 바뀌는 거죠.
바뀌는데 찰나에 바뀌는 거죠.
두고두고 바뀌는 게 아니라
찰나찰나 이렇게 바뀌는데
바뀌는 것마다 가만히 보세요.
바뀌는데 그 어떤 것이 어떤 걸로 내가 아빠로 바뀌었을 때 ‘나’라고 할 건가
또 “여보”하고 불렀을 때, 남편으로 되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아들로 불렀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나라고 할 수가 없죠.
한 가정 속에서 아버지라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나라고 할 수가 없어요.
열 식구라면 열 식구에 다 바꿔가면서 나투니까요.
여러분들이 보지 못하셔도 이렇게 바뀌는 걸 아시죠?
바뀐다는 거 아시죠?
바뀐다는 거 아시면
지금 우리가 잘못 살아나가는 것도
그냥 그렇게 바뀌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금방 찰나에 바뀝니다.
두고두고 바뀌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한 생각이 그렇게 바뀔 때에 찰나에 바뀌는 거다.
바뀌면 서서히 좋은 느낌이 온다.
좋은 느낌이 와서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좋은 생각으로써,
아무리 나빠도 나쁜 걸로 생각을 하지 마시고
좋게 이렇게, 진정코 믿어서
좋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우리가 배울 때는 ‘주인공! 주인공!’ 하고 이렇게 하지만
다 그것을 알고 보면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될 수 있게끔 될 때에
테레비를 보면서도 그런 악한 일을 제거하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이 한생각에 그렇게…,
나쁘게 될 텐데 좋게 된다.
근데 부부지간에도 싸울 텐데
조금, 어떡하든지 그렇게 싸우지 않게
‘너만이 싸우지 않게 할 수 있잖아.’ 한다면
그게 안 싸워져요, 절대로.
생각 없이 그냥 막 해대고
생각 없이 그냥 들어오는 대로 막 해대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싸움이 잦아지죠.
그런데 싸움 안하고 살 수 있는 그 방법이
우리가 싸움 안 하는 방법이 있는 반면에
태평이 거기 붙어 돌아간다.
아주 좋은 일로 인해서 웃고 살 수 있는 화목이 거기에 뒤따라간다.
여러 가지죠.
그러니까 요만한 거 하나도 에누리 없이 보살이라는 이름 없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 행동이 하나하나가 다 그거를 알아야 된다.
그래서 보살행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수행이 아주 몹시 이렇게, 진실로써 해보는 그런 행이
중생들을 가지고 이렇게,
자기 중생, 자기 몸속에 있는 중생들도
처음에는 배울 때 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알아야죠.
그러니까 남만 중생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도 중생이다.
자기 중생이죠.
모두가, 모두가 자기 아님이 없는 거죠.
이해가 안 가시죠?
자기 아님이 없다 하면은요.
예를 들어서 그 집에 할아버지로 계시다가, 어떤 가정에 할아버지로 계시다가
그 집 손주로 나왔어요.
손자로 나와 가지고선
“야, 이렇게 하면 아니 되는데 이럭하면 되니?” 하고서 차곡차곡 이렇게
어린애가 어른처럼 그렇게
“이럭하시면 안 됩니다. 이럭하시면 안 됩니다.” 하고 애가 그러니까
“참, 쟤 말이 옳아. 쟤 말을 들어서 전부 해나가면 하나도 손색이 없겠어.” 이러지만
그게 할아버지였거든요.
할아버지가 잘 살다가 그 자식들이 그냥 전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지탕해 버렸단 말이야.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보다 보다 못해 다시 그 집 자손으로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서 하나하나 이렇게
자꾸, 어린애라도 이렇게 말을 해가면서
“사람은 생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생각이 있으면 누구(가) 잘하고 잘못하고 이걸 떠나서
그저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그냥 닥치는 대로 이렇게 말을 하다 보니까
식구가 다 그 애한테, 애한테 말을 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
애가 자꾸 그러니까 그게 물이 들어서
그냥 식구가 다 그렇게 해서 잘 살게 되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그냥 온전히 이대로 살았으면
그냥 자식은 자식대로 있고 부모는 부모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고
이렇게 올라오다 보니까
그 뜻을 가지고 부처님은 일대사의 인연을 다 맺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뼈 한 무더기를 봐도
그것은 먼저 돌아가셔서 뼈가 되었으니까
내 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그렇다.
이런 뜻을 이렇게 얘길 하시면
그 뒤에 숨어있는 거를 먼저 알아야
이 뼈 한 무더기 놓고 절하는 그 뜻을 알죠.
그래서 한마디 하면
이 말을 하면 이 말부터 알아야 된다.
이 말을 했는데 이 말 근본대로 이 말을 알아듣질 말고
이 말 속에 있는 그 뜻을 알아야
이 말의 뜻이 올바로 들어간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과거의 부처님 법, 그것을 설법을 듣는데
그 설법을 들으려고만 하지 말고
우리가 현상에서 내가 생각해서…,
이 생활하는 것도 이게 설법 중에 제일 으뜸 나는 설법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생각해서
자기가 능동(성) 있게 지혜 있게 살아라.
생각을 해보세요.
사람들이 애들도 이리로 가라면 이리로 가고
이리로 가라면 이리로 가요.
왜냐?
사람이 유순하게 이렇게 다루면 그거를 생각을 하고,
대답도 안 하고 나가서도 그것을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냥 때리고 욕하고 뭐 별짓 다하고 그렇게 못살게 구는 부모한테는
나가서 생각하기를 오히려 아주 더 삐뚜루 나가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집안 구석구석이 나빠진다 이런 뜻이죠.
우리가 생각 한 번 잘하면 어떠냐.
생각 한 번 잘해서
그 잘하는 생각으로써 이 세상을 모두 살아나간다면
나 하나뿐이 아니라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도 그 본을 받아서
모두 건강하고 푸짐하고
그런 반면에 속에 있는 내 생명들은
그냥 있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나고 들고 나고 들고 이런단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데도 이 생명들이 나고 들고 나고 들고 이래서
나쁜 일도 하는 게 있는가 하면
내 생각에 의해서 나쁜 일도 하는가 하면
좋은 일도 합니다.
이렇게 묘한 법입니다, 이게.
그래 우리가 묘한 사람들이죠.
아주 묘한 사람들이에요.
수억 겁을 거쳐 나오면서 형성되고 진화됐으니
얼마나 묘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나쁘고 좋은 거는 미리 다 알고,
이럭하면 좋다는 것도 다 알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살아온 그 덤탱이를 착으로다가 두기 때문에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했습니다.
그거를, 고(苦)를 갖다가 집착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멸하고 없다.
없는 건데
너희들이 집착을 하기 때문에 있는 거다
이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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