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처음 전법회원이 되어 포살에 참여하면서
계율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제 수준에서는 계율을 100퍼센트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
몇 가지 예를 들면,
첫째, 현대인들이 구입하는 모든 물건이 포장되어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빵이나 커피, 설탕, 떡 등 거의 모든 음식이 중독성 있는 물질인데,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계율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청소를 한다는 것은 세균, 곰팡이, 이런 것들을 죽이는 일도 되는데요,
세균과 곰팡이도 엄연히 생명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청소는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기, 지네, 바퀴벌레, 이런 것들도 생명이지만
집에서 사람에게 접근하면 그것도 죽여야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이 계율도 지키기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결국 ‘어차피 나는 계율을 다 못 지켜’ 이러면서
형식적으로만 포살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질문자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어요.
우리는 수행자로서 믿음이 있어야 되고,
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리고 법에 대한 실천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질문자는
첫째, 법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율을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커피나 차 같은 거 안 마시고, 마약 같은 거 안 하고, 담배 안 하고 사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하지만 그 행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렵습니다.
그 행동을 안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에요.
담배가 들어오기 전에 신라시대 사람들은
담배 안 피우고도 잘 살았잖아요?
설탕이 들어오기 전에 설탕 안 먹고도 다 잘 살았잖아요?
커피가 들어오기 전에 커피 안 먹고도 잘 살았잖아요?
그런데 이거 안 먹으면
사람이 못 산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백년 전에 누가 비닐을 썼습니까?
아무도 비닐 안 썼어요. 그러고도 잘 살았잖아요.
그러니 내가 못하는 것일 뿐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살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살면서 보이지 않는 미물을 죽이고 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참회를 해야 됩니다.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발우공양을 할 때 외우는 소심경에도
‘한 방울의 물속에도 팔만 사천 마리의 벌레가 있구나,
내가 만약 염불을 하지 않고 이 물을 마시게 되면
살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살생을 하기 위해서 이 물을 마시는 것은 아니에요.
물을 먹다 보니
그 속에 나도 보지 못하는 생명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것에 대해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해치는 경우가 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과 어떤 눈먼 비구 사이의 대화를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눈먼 비구가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아서 개미가 죽었습니다.
자자 시간에 다른 스님들이
‘저 비구가 살생을 했습니다’ 하고 문제 제기를 하니까
본인은 ‘제가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눈먼 비구가 계율을 어겼나, 안 어겼나 하고 논쟁이 됐는데
부처님께서 ‘그 비구는 살생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어떤 비구니 스님이 숲속에서 혼자 정진하다가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러자 비구들이 ‘저 비구니는 음계를 범했다’ 하고 노닥거렸습니다.
그런데 비구니 스님은 자기가 음계를 범했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당한 거지, 내가 즐긴 게 아니다’ 하고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비구니는 음계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니 대중들이 이걸 가지고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하고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말아야 하고
지구환경 위기 속에서 가장 큰 오염 물질인
플라스틱을 줄이도록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못 지킬 때 ‘이것은 못할 수밖에 없다’ 하고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지키지 못하면 당연히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참회한다면
그건 맞지가 않아요.
진지하게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못 지키더라도 참회는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비닐 포장에 든 사탕을 먹고 참회하게 되면,
이 사람은 플라스틱이나 더 큰 것을
노골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자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을 어겼지만
참회를 한 덕분에 더 큰 것을 막게 됩니다.
만약 커피 같은 중독성 물질을 마시고서 참회를 한다면
적어도 술을 먹고 취한다든지, 마약을 섭취하는 것은
아예 꿈도 안 꿀 수가 있습니다.
‘커피 먹는 게 뭐 어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술 한 잔 먹는 거 뭐 어때?’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는 ‘마약 그것 좀 하면 어때?’ 이렇게 될 위험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대해서 자각을 하고 있으면
큰 것에 대해서 미연에 방지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어쩔 수 없고 큰 것만 지킨다’ 이러면
차츰 큰 것도 다 어기게 됩니다.
개미 한 마리 안 죽이려는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어요?
그런데 ‘개미 같은 건 죽여도 돼’ 이러면
‘토끼도 죽여도 돼’ 이렇게 되고
심지어 ‘사람도 죽일 수 있어’
이렇게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참회를 건성으로 해서도 안 되고
잘못했다고 죄의식을 너무 가져서도 안 됩니다.
죄의식은
잘못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18계를 다 지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못 지킨다고 다른 사람도 못 지킨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정도에 따라서 18계를 다 어기고 참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두 개 어기고 참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너는 몇 개 참회하느냐’, ‘나는 몇 개 참회한다’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아야 됩니다.
참회는 각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참회하는 것도 아니고
참회할 게 적다고 훌륭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계율은 모두 지켜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못 지키는 것에 대해 참회하고 늘 자각함으로써
한두 개씩 줄여 나가야 합니다.
같은 참회를 하더라도 매일매일 어기던 것이
한 달에 두세 번 어기는 것으로 줄었다면
매일매일 어겨도 참회를 한 번 하고
한 달에 한 번 어겨도 똑같이 참회를 한 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회의 개수나 횟수가 얼마냐고 묻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똑같이 참회를 해도 한 사람은 30번을 어기고 참회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한 번 어기고 참회하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술 먹고 참회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쩌다가 일하는 중에 맥주 한 잔 갖다줘서
마시고서 참회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참회하는 개수나 횟수를 갖고
이 사람은 잘 됐고, 저 사람은 안 됐다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서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일을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회는 각자 자각해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참회를 몇 번 하든 관계없이
늘 그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서
가능하면 범하지 않는 쪽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계율을 범할 때가 있어요.
다만 알고서도 의도적으로 계율을 어긴다면
그것은 계율 정신에 어긋납니다.
나도 모르게 깜빡해서 어겼다가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돌이키는 것이 참회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포살과 참회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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