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남편과 저는 20대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귀화했습니다.
현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저의 민족성은 한국이지만, 태어나기는 중국에서 태어났고,
현재 국적은 일본입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모두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이지만
특별히 잘하는 언어도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저의 민족성 때문에 저를 한국인으로 분류하고
한국 사람들은 저의 억양 때문에 저를 중국인으로 분류합니다.
또 중국 사람들은 저의 국적 때문에 저를 일본인으로 분류합니다.
국제 정세가 민감해질 때면 입장이 곤란해져서
도대체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해서 걱정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들을 데리고
친척이 살고 있는 한국과 중국에 많이 놀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아들이 중국과 한국을 싫어하고 일본만 좋아합니다.
아들이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옛날에는 주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만 평생을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평생 한국에서만 살고
한국 안에서도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면 평생 경상도에서만 살고
경상도 안에서도 경주에서 태어났으면 평생 경주에서만 살았어요.
그런데 시대가 변화하면서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전라도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울산의 공장에 취직해서 이주해 자랐다면
자신이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 헷갈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나라 안을 벗어나서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미국으로 이주해 살거나
조선족으로서 중국에서 태어났는데 살기는 일본에서 산다든지
하는 모습이 있겠죠.
이러한 추세는 세계화로 인해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겁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화하는 속도에 맞춰서 사람들의 생각도 함께 변화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향이 어디야?’, ‘어느 나라 출신이야?’ 하는 질문은
과거의 문화에 젖은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종교를 갖고 있으면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님과 같은 종교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종교를 가질 수 있어요.
세상이 그만큼 다양해지면서 정체성의 분류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국적이 미국인데 민족은 한국 사람이라면
이것을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분류합니다.
이처럼 중국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등으로
정체성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정체성도 다양해졌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불교인이 됐다면
크리스천 부디스트(Christian Buddhist)라고 합니다.
기독교계 불교인, 한국계 미국인과 같은 것이
바로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니?’와 같은 질문은
옛날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입국할 때 ‘국적이 어디니?’ 이렇게 묻습니다.
질문자는 일본이라고 대답하면 되겠죠. ‘
모국어가 뭐냐?’ 하고 물으면
한국어라고 대답하면 되고
‘어디서 태어났니?’ 하고 물으면
중국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전에는 없던 변화된 모습이에요.
과거의 문화에 젖어서 고정관념을 갖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질문자가 대답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묻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에 옛날 방식으로 묻는 사람이 있다면
질문자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돼요.
안 그러면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상대에게 되물어도 됩니다.
국적을 묻는 것인지, 태어난 곳을 묻는 것인지, 모국어를 묻는 것인지
상대에게 되묻고 질문에 맞게 대답하면 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 살았다면 한국어를 잘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가서 자랐다면
한국에서 평생 산 사람보다 한국어를 잘 못합니다.
또한 미국에 평생 산 사람보다 미국어를 잘 못합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결과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나는 한국말도 잘 못하고, 미국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나는 한국말도 할 줄 알고, 미국말도 할 줄 안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된 자기 정체성입니다.
질문자는 3개 국어를 하는 장점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야 합니다.
일본어가 일본 사람보다 부족하고
중국어가 중국 사람보다 부족하고
한국어가 한국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비교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애초에 모국어만 써 온 사람보다
질문자가 더 잘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한 가지의 언어만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세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관점을 잡아야 합니다.
질문자가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면
조금 더 오래 살아보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와 같은 사람의 수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민자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예요.
여러 소수민족을 합쳐서 중화민국이 된 것이니까요.
그런 것처럼 질문자도 그냥 세계인이에요.
국적은 일본이고, 민족성은 한국이고, 태어난 곳은 중국인 세계인일 뿐입니다.
...
질문자의 아들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국적이 일본인 일본 사람입니다.
물론 엄마와 할머니가 한국의 민족성을 띠니까
아들은 한국계 일본인이 되겠죠.
아들이 ‘한국어를 배웠으면’ 하는 건 질문자의 생각이고,
아들은 그게 싫으면 안 할 자유가 있는 겁니다.
물론 아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더 유리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 부모들이
예전에는 자식에게 한국말을 안 가르쳤습니다.
영어만 잘하면 되지
한국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K-문화가 발전하고 인기를 얻으면서
요즘은 미국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게 유리한 입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굳이 한국말을 안 가르쳐도
한국계 젊은이들이 스스로 한국말을 배웁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들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한국계나 중국계라고 차별을 받았거나
반기지 않는 분위기를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신에 대해서 입을 닫고
오히려 일본 사람으로 보이려는 방어적인 심리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
한중 관계가 나쁘면
중국의 조선족들 입장이 곤란해지고
한일 관계가 나쁘면
일본 교민들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또 한국에 사는 일본계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어요.
함께 섞여서 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 아들에게 너무 간섭하려 들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아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숨기려고
일부러 아이에게 한국말을 안 가르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아이에게 한국말을 하는데도
아이가 그걸 싫어한다면
크게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아이가 한국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면
밖에서는 일본말을 하더라도
집에서는 한국말만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가 집에서 일본말을 했을 때
엄마가 대답을 안 하면
본인이 급할 때는 한국말을 하게 될 겁니다.
아이에게 한국말을 쓰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질문자 자신이 집에서 한국말을 사용하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개선되지 않을까 싶어요.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현재 한국에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여성이 10만 명 정도가 있습니다.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도
질문자의 아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에 갔더니 놀림을 받거나 차별하는 분위기를 느껴서
베트남어를 안 배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자기 정체성이 약해져서 오는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베트남계 아이들을 모아놓고
베트남어로 웅변대회를 한다든지,
베트남어 노래 대회를 개최해서 상품으로
베트남 외갓집에 다녀오게 하는 걸 기획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베트남계 사람인 것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어머니를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연방 하원의원으로 한국계 여성 의원이 처음으로 당선됐는데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분입니다.
그분은 연방하원 개원식에
붉은색 저고리와 보라색 치마 등 한복을 입고 취임 선서를 해서
언론에 회자된 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 속에서 혹시 어머니가 자신을 못 알아볼까 봐
한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어머니를 존중하는 자세는
자신의 민족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기 정체성 확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인 자신이 먼저 당당해져야 합니다.
아이가 정체성을 숨기려는 것을 보니까
질문자는 별로 당당하지 못했는가 봐요?
내가 태어난 곳과 내 민족을 숨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처럼
비슷하게 생길수록 숨기려고 합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말만 안 하면 구분이 안 되니까
숨기려는 심리가 일어나는 거죠.
북한에서 온 사람이나 조선족도
한국에서 말을 안 하면
한국 사람과 구분이 안 되니까 자꾸 숨기려고 하거든요.
차별받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민족 차별이든 성차별이든,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아이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숨기면서 살 때는 심리적으로 괴로움이 큽니다.
그래서 그냥 터놓고 사는 게 가장 좋습니다.
질문자의 경우는
아이들에게 너무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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