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러면은 랜덤으로 뽑을게요.
랜덤으로 하나 뽑겠습니다.
(저는 탐진치에 기반하여 나타난 결과인 파멸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상황이 왔을 때
그게 파멸로 가는 길일까 봐 두려워요.)
이해가 되죠?
(탐진치도 상대성 안에서 진선미와 하나인 건가요?)
물어보셨어요.
(탐진치도 결국 진선미로 가는 과정인가요?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진선미의 승화입니까?)
물어보셨습니다.
--상대성으로 본 탐진치와 진선미
되게 중요한 질문인데요.
상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방금 나온 질문에서 테마가 되는 게 뭐냐면은
탐진치와 진선미에요.
해석을 해보자면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탐욕’ 탐욕이에요.
그다음에 가운데 ‘지’는 분노예요. 화내는 거 있죠? 화내는 거.
그다음에 맨 마지막 ‘치’는 어리석을 치인데
어리석음이라는 뜻보다는 ‘진리를 모른다’의 뜻에 가깝습니다.
근데 이걸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비이원을 모음에 가까워요.
그래서 이원성에 남아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단순히 치 자를 어리숙하고, 어벙하고
이렇게 해서 모르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무리 내가 똑똑하고 잘났다고 그래도
비이원성을 모르는 상태가 치예요.
--탐진치와 배중률
그래서 대표적인 탐진치 중에 치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명인들이 되게 많아요.
대표적으로 누가 있을까요?
철학 하시는 분들이 조금 싫어할 수도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람이 서양 철학의 아버지입니다.
이 사람이 내세웠던 논리가 뭐냐 하면 배중률이라는 게 있어요.
배중률 들어보셨어요?
A는 B or C라는 뜻이에요.
한 번 A가 B라고 정의가 되면은
C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가 돼요. 버려집니다.
한 번 A가 C라고 규정이 되어지면
B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뭐예요? or예요? 그거예요.
이 사람이 당대 최고의 브레인이었어요.
너무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뭡니까? 어디에 속해요?
치에 속해요?
이유는 뭡니까?
비이원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비이원을 모르기 때문에.
이거는 마음공부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치에 대한 설명이에요.
이걸 갖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그냥 들이대시면 안 돼요.
“너 비이원 알아? 몰라?” 하면
“너는 어리석은 놈이야.”
결국 “나 비이원 알아, 조금 알아” 하면
‘내가 너보다 높아’
이런 거 아니에요. 이런 거 아닙니다.
--언어와 이원적 실체론
이 배중률 때문에 어떤 논리가 생겼냐면요.
이원적 실체론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이원적 실체론이라는 게 생겼는데 이거는 뭐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고유의 존재값을 가지고
독립적인 실체로서 존재를 한다’라고 생각해 버리게 만들었어요.
우리가 뭐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하죠?
뭘 사용해 전달을 하죠?
언어죠.
언어가 딱 생기면서
이원적 실체론이 어떤 하나의 언어적 개념에게 적용되는 순간
뭐가 일어납니까?
실체화가 일어나버려요.
예를 들어볼게요.
‘나’ 하는 순간 뭐가 생겨요?
‘너’가 생겨요.
‘나’ 하는 순간 뭐가 생겨요?
‘나’ 아닌 것이 생겨요.
그러면서 뭡니까?
단순히 나와 너라는 개념으로 구분 지어놓은 것에 불과한데
뭐가 돼버려요?
나는 곧 죽어도 ‘나’가 돼버리죠.
B OR C예요.
너는 곧 죽어도 너가 돼버리죠.
실체화가 딱 일어납니다.
실체화가 일어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여기로 떨어지는 거예요.
탐진치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 뭐냐면은
언어가 가져오는 이원적 실체화를 만들어 내는 주범이기 때문에
이치로 빠지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탐진치 중에 비이원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부터
탐진치가 탄력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많은 분들이 탐진피를 뭐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해요?
배척, 외면하고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탐진치의 배척이 탐진치이다
대표적인 탐진치의 화신을 뭐라고 불러요?
에고하면 탐진치의 덩어리
그래서 뭡니까?
꺾어버려야 할 대상, 정복해야 할 대상, 죽여버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들을 하게 돼요?
이것 자체가 뭐예요?
배척하고 있는 이거, 이것 자체가 뭐예요?
진이에요.
분노거든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에고라는 것을 대상화를 해서
‘이 에고는 내가 반드시 극복하고 버려야 할 대상이다’라고
언어를 통해서 규정을 딱 지어버리는 순간
그게 실체화가 되죠.
아까 말씀드렸어요. 실체화가 되죠.
그러면서 뭐가 일어나요?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요?
분노가 일어나요.
분노가 일어나면서
마음공부를 해서
‘나는 진선미를 추구를 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라는
기특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알고 보면.
자기한테는 기특한데 뭐에 사로잡히게 돼요?
‘진선미를 추구해야겠다’라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돼요.
[탐]이죠.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돼요.
탐진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까지 다 있습니다.
탐진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탐진치에 기반해서 마음을 내고 살고 있어요.
근데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비이원을 공부를 하게 되면 이 부분이 알려져요.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를 추구하고 있죠.
구도행을 합니다, 수행을 합니다, 마음 공부를 해요.
하면서 미묘하게 마음 안에 어떤 마음이 생겨요?
이 마음공부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 세속적인 부분은 또 어떻게 돼요?
외면해 버려요.
뭐예요? 그게?
탐진치에 다 들어가 있죠.
탐진치를 우리가 배척하려고 하고 있는 그 순간 자체가
사실 뭐라 얘기예요?
탐진치라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 탐진치와 상대 되는 개념이 진선미라고 써놨습니다.
진실한 것, 선이라고 부르는 것, 선악 할 때
아름다울 미, 자인데
탐진치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인 진선미에 대해서 알고 나서
이 진선미를 또 추구하려고 하죠.
결국 뭐예요? 어떻게 해도 탐진치예요.
그런데 여기서 되게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탐진치를 추구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바꾸기 자체는 힘들어요.
그리고 탐진치 자체는 우리 삶 안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이건 무슨 얘기냐면
에고라는 것도 없애버릴 수가 없다라는 얘기예요.
그러면 뭘 하면 돼요?
관점을 바꾸면 돼요.
관점을 바꾸면은 탐진치와 진선미가 같은 것이 됩니다.
이게 비이원이에요.
비이원= 두 가지 근원이
서로 다른 근원이 아니다라는 얘기예요.
--탐진치의 상대성
불교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불이,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예요.
탐진치하고 진선미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자세히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상대성에 의존하지 않고 나타날 수 있는 게 없어요.
있을까요? 한번 찾아볼까요?
홀로 있을 수 있는 것
홀로 있을 수 있는 것 있을까요?
없어요, 진짜 하나도 없어요.
여기 여자분들 계시죠?
여성분들, 본인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요?
남자가 있기 때문에 알아요.
남성분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요?
여자가 있기 때문에 알아요.
여성 혐오자들, 뭐 남성 혐오자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이유가 뭐예요?
단순히 그런 심리적인 상태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아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그런 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내가 혐오하고 있는 남성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여성 자체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상대성에 기반해서 바라보게 되면
지금 내가 어떤 남성 자체를 혐오하고 있는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현상하고 있죠.
그런데 남성을 혐오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존재하려면
뭐가 또 있어야 돼요?
혐오의 대상이 되는 남성이 있어야 돼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이게 상대성이에요.
진선미는 탐진치하고 떨어져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 뭐라 얘기입니까?
동전의 양면과 같고
이 손의 손바닥과 손등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손이라고 딱 할 때
뭐라 그래야 돼요?
아무 생각 없이 손바닥하고 손등을 전부 다 손이라고 하죠.
그런데 왜 세상을 살아갈 때는 이게 적용이 안 될까요?
재밌지 않습니까?
비의원이에요, 손하고 손등이.
전부 다 뭡니까? 손바닥도 뭐예요? 손등은 뭐예요?
손이에요.
--양쪽 다 진리의 표현이다
탐진치와 진선미가 동일한 무엇의 표현입니까?
진리의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선미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탐진치를 탐진치로 볼 수가 없게 돼요.
탐진치의 자리에다가 악이라는 것을 써놓고
진선미의 자리에다가 선이라는 것을 써놔 볼게요.
악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워하죠.
선 미워하시는 분 계세요?
악을 미워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악을 없애버리려고 하죠.
그리스도교 신자분들 계세요?
교회, 성당 다니시는 분들.
네 계십니다.
저도 그리스도교 수사였고
모토가 뭐냐면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한테 부여된 명칭 중에 하나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에요.
가능할까요?
불가능해요.
이유는 뭡니까?
악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면은 동시에 뭐도 사라져요?
선도 사라져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계셨어요.
“선과 악이라는 것
이건 이름 붙여놓은 단순한 개념에 진하지 않습니까?
그 개념을 지워버린다고 해서
그 개념에 해당하는 어떤 그 내용물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라고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탐진치가 되든, 진선미가 되든, 아니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되든
개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재밌죠, 개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거는 없어요.
이름을 딱 붙입니다.
개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이름표를 딱 붙여요.
뭐예요 그거?
개념이에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그럼, 뭡니까?
세상의 본래 모습, 실체가 사실은 뭐라 얘기예요?
개념이란 얘기예요.
--탐진치와 진선미는 하나로서 같은 것이다.
이 개념들이 흘러가야 됩니다, 움직여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개념과 개념이 연동해야 돼요.
생각과 생각이 만나서 흘러가야 돼요.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관념이라고 부릅니다.
탐진치와 진선미는 관념이라는 하나의 흐름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상대성으로 존재를 하면서
완벽한 존재의 표현을 이루어 내는 요소예요.
그렇기 때문에 드러난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은 탐진치하고
그것의 상대성으로 상대적으로 좋은 것을, 긍정적인 것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은 진선미하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입니다.
동일한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논리를 사용하거나 할 때 이 부분들을 보셔야 돼요.
이제는 본질을 보셔야 돼요, 드러난 형상이 아니라.
드러난 형상으로 볼 때는 달라요.
탐진치하고 진선미가 모습이 달라요.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어디 가서 꽂혀버리는 거예요?
모습이 다르다라는 얘기는 뭡니까?
명색이 다르다라는 얘기예요.
이름하고 형태가 다르다라는 얘기예요.
이름하고 형태가 다르다라는 이유만으로
이원적 실체론에 딱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빠지게 되고 나서 뭐 해요?
두 개를 분리시켜 버리죠.
탐진치는 탐진치이고 진선미는 진선미가 되는 거예요.
탐진치와 진선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한 방에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면요.
가장 좋은 방법이.
이렇게 한번 사유를 해보는 겁니다.
진선미라는 개념,
선이라는 개념을 존재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작용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은 탐진치가 나타났을 때 탐진치가
내가 나서서 ‘내가 탐진치 역할을 할게’라고 지원을 해서 나타났을까요? 자원을 해서?
그럴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탐진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뭐란 얘기입니까?
감이 오세요. 조금씩?
다르게 한번 질문해볼게요.
여러분들 앉아 계신 여러분들 한 분도 빠짐없이
내가 남들보다 조금은 착한 사람이라고 예를 들어서 생각하고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선한 사람인 거예요.
여러분들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악당들이 있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가 확 오세요?
왜?
세상의 악당들이 넘치고 있죠? 악한 사람들이 넘치고 있죠.
그 이유는 뭐예요? 주범이 누구라는 얘기예요?
그러면은 그 악당, 그 탐진치
얘네들은 홀로 나타날 수가 없이
내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표현되기 위해서 필요한
상대적인 개념인 거예요.
결국 뭐예요? 얘도, 제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죠. 희생자죠.
그래서 탐진치와 진선미 간의 우열을 가르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거니와
우열 자체가 없습니다.
진선미가 탐진치보다 우월하다 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또 있어요. 이렇게 한번 볼게요.
불교의 교훈 중에 ‘선업도 업이다’라는 얘기가 있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왜 선업이 업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피해자?
악. 그거예요.
선업이라는 것을 지음으로써
뭐가 세상에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악업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그러면 탐진치와 진선미를 둘로 딱 갈라놓고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으로 추구를 하면서 살아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이 사고방식마저도 사실은 뭐예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에요.
‘평소에 왼쪽을 택해서 살아가다가
이제는 오른쪽을 택해서 살아가야겠구나.’
‘녹색 볼펜 쓰다가 빨간색 볼펜으로 바꿔야겠구나’라고
볼펜 색깔을 바꾸는 것에 불과합니다.
질문 내용에도 있었어요.
“진선미를 추구하며 살아야 되나요?”
그게 아니라는 얘기예요.
진선미는 그것을 억지로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에요.
진선미를 억지로 추구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진선미가 아니게 돼요.
왜?
자연으로부터 무위자연으로부터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억지로 추구하는 그 순간 뭐가 돼요?
탐진치로 떨어져버려요.
왜?
인위가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선업도 업이다’라는 얘기 이해되세요?
세상에 악당이, 악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들 때문이라는 얘기에요.
이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얘기입니까?
그리고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함부로 하시면 돌 맞아요.
어디까지나 진리탐구하고 마음공부하시는 분들
이 카테고리 안에서 이런 얘기도 잘하셔야 된다.
컨트롤 하셔서.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반박을 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없어요.
반박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이 세상의 악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선을 없애면 돼요.
그럼, 여기서 또 고찰이 들어갑니다.
탐진치라는 것을, 진선미라는 것만을 남기기 위해서
공격해서 없애버린다면은
그 행위는 진선미일까요? 탐진치일까요?
아주 미묘한 형태의 탐진치예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이 마음이 보통 인간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예요? 뭐가 생겨요?
자기방어적 자세가 생겨버려요.
이게 종교적인 카테고리로 발전해버리면 뭐가 되는 겁니까?
호교론이 되는 거예요.
나의 종교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한쪽 만을 주장하는 거죠.
배타성을 가져오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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