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과 베타적 종교
그리고 뭡니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경전이나 교리, 문자주의에 빠져버리게 되죠.
그리고 뭐가 돼요?
다른, 우리의 카테고리를 벗어나 있는
다른 것, 다른 것들은 전부 다 어떻게 해버려요?
극도로 배척하게 됩니다.
어떤 종교들이 대표적으로 그럴까요?
대부분 유일신교의 패러다임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저 스스로도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수도자였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런 삶을 또 살았죠.
하지만 눈을 떠야 된다라는 얘기입니다.
눈을 떠야 된다라는 얘기예요.
무언가를 배척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결국엔 뭐냐 하면은
‘내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어떤 하나의 행위이고요, 어떤 하나의 마음이고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그 무엇도 지킬 것이 없는데
내가 지킬 것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왜?
그래야만 행복하기 때문에.
조건에 의존한 행복이죠.
그러면 어디에 들어가요?
어리석음에 들어가요.
조건에 의존해 있는
진리를 모르고 비이원을 모르는 상태가 돼버리는 겁니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이유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들이 보면
보통 가장 깊은 곳에
어떻게 보면 본성과도 비슷해서
뭐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냐면은
진선미에 해당하는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어요.
아름다운 것.
몸에 대해 적용을 해보면
건강한 거, 이쁜 몸.
인간관계에 적용을 해보면
두루두루 이렇게 좋은 인간관계
경제적인 부분 적용을 해보면
풍요롭고, 이렇게 모든 걸 물 흐르듯이 잘 흘러 가는 그런 삶.
결핍이나 그런 삶이 아니죠.
그런 것을 이제 선택을 합니다.
보통 볼 때
진선미에 해당하는 가치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단 말이에요.
인간 본성 깊은 곳에.
그 이유는
절대로 진선미가 탐지체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다른 데 있습니다, 이유가.
여러분 인간 의식이 이원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원성으로부터.
보통 태어난 지 100일 정도가 되면
이원성이 자리를 잡기 시작을 해요.
하면서 뭡니까?
나와 너가 구분이 돼버리기 시작하죠.
내가 한 번 ‘나다’라고 규정되어지니까 어떻게 돼버립니까?
‘너’가 생겨버리는 것이고
세상과 나를 이분하는 마음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의식 자체는
‘나’라는 자아의식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뭐로 시작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지점에서?
이원성에서 시작하고 있어요.
그 이원성이 가지는 속성이
어떤 가치를 통해서 표현이 됩니까?
탐진치예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탐진치는 진선미로부터 펼쳐졌다
그렇다면은 시공간이 펼쳐지는 메커니즘을 알면
이 탐진치로부터 우리가 삶을 시작을 했잖아요.
그러면 이 탐진치는 어디로 부터 펼쳐졌더라는 얘기예요?
진선미로부터 펼쳐졌다라는 얘기예요.
딴 게 아니라
펼쳐졌던 시공간의 두루마리가
접혀 들어가는 게 우리의 삶이에요.
본래 동시에 존재하는 상대성 안에서
탐진치와 진선미 중에
진선미로부터 한쪽 끝이 펼쳐집니다.
딱 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 탐진치가 나타나게 되죠.
여기로부터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삶이 시작돼요.
그러면서 어디로 말려들어 가는 거예요?
진선미로 말려들어 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향을 가져요.
‘진선미를 추구해야 되나요?’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이 순천 방향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탐진치로부터 진선미가 펼쳐져 나왔다’ 라고 치면
어떻게 되겠어요?
말려들어가는 거예요, 탐진치 쪽으로 말려 들어가겠죠.
단순히 이거예요.
--진선미는 일원성을 대변한다
탐진치와 진선미 간의 우열을 논하지 마세요.
그러면 왜 진선미로부터 탐진치가 펼쳐져 나온 형태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진선미라고 부르는 가치, 이 개념이
일원성의 상태를 대변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일원성이 뭡니까?
일원성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있어요.
통합이에요. 대통합 대통합이에요.
통합과 허용이에요.
탐진치에 해당하는 가치는 뭐예요?
분리와 분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탐진치와 진선미를 두루두루 통합하는 마음은
결국에 어떤 마음이 되는 거예요?
진선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드러난 세상에서.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진선미로부터 탐진치가 펼쳐져 나온 겁니다.
펼쳐져 나와서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진선미를 향해서 돌아가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의 마지막 이 부분에 나오는
“탐진치도 결국 진선미로 가는 과정인가요?”
예, 과정에요.
“결국 진선미로 가는 과정인가요?”
개체 존재의 삶 안에서 탐진치로 시작한 삶이
진선미를 추구하는 그 형태로 끝나게 된다. 안된다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뭐예요?
진선미라는 이 개념 자체도
기준 자체가 되게 애매해요.
왜?
애시당초 상대적으로 나타난 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죽을 때까지 진선미를
실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탐진치를 나타나게 한 것은 진선미다
그렇다면은 그 사람들은 왜 나타난 것일까요?
죽을 때까지 진선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
진선미를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나타났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여러분들이 진선미를 죽을 때까지 추구한다고 쳐요.
여러분들 때문에 나타나는 거예요.
왜? 전체성의 차원에서 바라보세요.
‘내가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죽는다’라는 현상이 있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해요?
‘탐진치에 빠져서 허덕거리다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현상이 필요해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결국에 뭡니까?
전체성의 차원에서 볼 때는
탐진치를 추구하면서 허덕이다가 가는 사람들도
진리의 완벽한 표현이고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아름답게 살다 죽는 사람들도 뭡니까?
진리의 완벽한 표현이에요.
그렇다고 막 살라는 얘기 아닙니다.
막 살아도 돼요. 사실
막 살아도 돼요.
대신에 몸으로 다 받게 돼 있습니다. ㅎㅎ.
내가 막 사는 그 대가를.
저는 절대로 여러분들한테 ‘진선미만을 추구하세요. 추구하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탐진치 추구하고 싶으면 그렇게 사셔도 돼요.
잘못 없어요.
근데 알게 되죠.
살아보면 알게 되죠.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하고 탐진치를 추구하는 삶하고.
절대적으로 ‘이것이 옳다’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왜냐면은 뭐죠?
둘 다 옳고, 결과적으로 뭐예요?
둘 중에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는 뭐예요?
[일원의 상태]예요.
[탐진치와 진선미를 모두 포용하는 마음]
그런데 그 마음을 드러난 현상 안에서 뭐라고 부르는 겁니까?
[진선미]라고 부르기 때문에
‘진선미를 추구하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진선미가 더 우월한 게 아니다
절대로 ‘탐진치보다 진선미가 우월하기 때문에 이걸 추구하세요’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잘 알아들으셔야 돼요.
상대적인 개념 안에서 한쪽을 골라서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게 더 좋으니까 이걸 추구하세요’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마음 안에서
이 부분을 잘 고찰하시고 분별하셔야 됩니다, 아셨죠?
진정으로 진선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는 어떻습니까?
탐진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봐요.
그럼 어떤 마음이 들어요?
네. 그게 연민이고 측은지심이 들죠.
그리고 뭡니까?
절대로 탐진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지 않습니다.
‘이놈은 이런 놈’
‘탐진치를 추구하는 무지한 중생’이라고 단정 짓지 않아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그러신 분이에요.
그 당시에 성경에서, 당시에 유대인들 사회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유태교내의 종파들이 있습니다.
가장 힘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종파들이 있어요.
바리사이파라는 종파가 있었고, 사도가이파 이런 종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바리사이파라는 사람들이 하던 기도가 있어요.
유명한 기도가 있어요.
뭐라고 기도하냐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저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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