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난주에 우리 육도윤회를 공부했죠? 잠깐 복습을 한번 해볼까요? 육도윤회에서 개인적으로 더 심하게 더 많이 고통하기도 하고 또 어느 특정한 어떤 심리상태에 더 오래 머물기도 하기는 하는데 그러나 “아~ 나는 뭐 저기 아무리 봐도 난 축생계는 난 안 도는 거 같아. 아니면 난 아수라는 아니야.” 스스로 아마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내가 자각을 못해서 그렇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구나 알게 모르게 이 육도를 돌게 되어있습니다. 윤회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심리상태를.
그래서 물론 지난번에 표현을 할 때 “아이, 너무 심하게 내가 저 정도 심리상태는 아니지?” 이런데 물론 그거는 두드러지게 그런 거고, 우리가 보통의 경우에는 거의 무의식단계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거의 자각하는 정도가 되면은 사실은 그건 상당히 이미 수행이 많이 된 경지에요. 그래서 잘 모르는 거지. 그래서 아마 여러분이 “아~ 나는 그렇지 않아.” 하는 경우는 누구한테 물어보면 될까요? 가족 분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또 이렇게 물어보면 본인이 생각했던 거 하고 내 가족이 느끼는 상태하고는 아주 많이 다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 나는 이렇게 절에 다니고 수행을 이렇게 해서 이정도 되겠지 하고 그리고 이렇게 배우면 제일먼저 내가 자각하거나 “아~ 그렇구나.” 해서 나를 보기도 하지만 조금은 보다가 뭐에요? 돌려가지고 가족을 보는 거야 이제. 자기 상대 파트너나 친구나 자신을 보면서 “왜 저럴까?” 이래서 사실은 조금도 수행에 진전이 안 돼요. 그런데 아무튼 한번 봅시다. 자~ 육도를 도는데 지난번에 여기 천국의 상태가 있고, 천국에서는 우리가 거의 에고기능이 멈추어져서 자아의식은 작동이 안 되지만 굉장히 뭐에요?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알아야 되죠. 괴로운 사실은 괴로워해야 되는데, 온 세상이 진짜 괴로움도 여기서는 거의 즐거움으로 보인다. 이거죠. 다 쾌락으로. 그래서 이 상태가 그러하고.
그다음에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여기서도 이리가기도 하죠. 지옥상태에서는 제일 핵심적인 감정이 뭐라고 그랬어요? 공격성, 그러니까 남을 미워하고 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랬어요. 그럼 남을 미워하고 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저절로 이 안에서 불안이 생겨나고, 역으로 내가 그 상대에게 그런 미움이나 이런 것이 있으면 뭐에요? 공격하고 싶은 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는 상대가 또한 내가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에도 어때요? 나에게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이나 공포가 일어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는 핵심적인 감정이 공격성 그리고 불안, 공포. 이런 것이 있다고 했어요. 그다음에 지옥에서 다시 여기 뭐가 있을까? 아귀. 어디에 위치하든 그건 크게 상관없는데 여기서는 인생에 대해서 주어진 조건이나 무엇이 있을 때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계속 갈망을 한다. 그랬어요. 만족이 안 되는 거다. 이런 상태. 우리 옛날에 처음에 굉장히 어렵게 살 때 같으면 아이고 내가 집만 하나 있으면, 또 집이 있으면 또 빌딩이 하나 있으면. 이런 식이 되지 결코 만족이 안 되고 계속 해서 내가 현재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뭐가 더 있으면, 더 있으면” 이런 식으로 갈망하게 된다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아귀 다음에 축생. 축생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축생의 특징은 무지하다. 무지한 데 순전히 자기중심적이어서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거기에 대해서 둔감하다. 그리고 또 그러니까 주로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자기 욕심, 자기 갈망, 자기 욕망에 기초해서 하기 때문에 자기가 남한테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한 그런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게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기본적인 욕구, 성욕, 수면욕, 식욕, 이런 기본적인 욕구에 굉장히 매달려있다는 거죠. 그 다음에 아수라입니다. 아수라 같은 경우는 굉장히 질투한다 그랬어요. 질투의 화신이다. 그래서 질투도 보통 질투가 아니고 완전히 질투 그 자체에 몰입된 상태다.
인간인 경우도 질투심이 있지만 이(인간) 경우는 나도 부러워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해서 이(인간)거는 비교적 뭐에요? 좀 건강한 상태라면, 이(아수라) 경우는 완전히 상당히 편집증 망상증 그랬어요. 굉장히 심한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다. 질투가 심해지면 그렇게 되죠? 나중에 질투가 너무너무 심해지면 뭐에요? 마치 그 상대 때문에 내가 얻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드니까 상대가 죽었으면 하는 무의식적 욕망도 가능한거죠. 그래서 이 편집증 망상증이다. 그래서 이렇게 돼서 관세음보살님이 여기에 각각에 처방을 내릴 때 어떻다 그랬어요? 아수라 같은 경우는 불을 내품는 칼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완전히 아상을 그야말로 단번에 아상을 죽여야 된다 그랬고.
축생 같은 경우는 책을 갖고 계신다. 그랬죠. 그러니까 사유하고 또 공부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타자의 입장에서도 공부해보고 사색하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고 아귀 같은 심리상태일 때는 어때요? 이때는 약사발을 갖고 계신다. 그랬어요. 감로수. 그러니까 이때도 이런 갈망만족이 안될 때는 정말로 치유가 필요한데 그럴 때는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불보살님의 가피를 구하는. 그런 기도와 간절한 기도하고 그런 덕을 쌓는 게 필요할거다. 또 지옥 같은 경우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거울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잘 기억하시네. 거울을 가지고 어떻게 해요? 비추어보는 거죠. 상대를 향한 그런 공격성이나 아니면 공포불안모습을 봐라. 네 모습을. 그래서 자기 모습을 보고 반조하면서 자기의 이런 마음들을 가라앉혀야 된다.
그다음 천국은 뭐라고 그랬어요? 관세음보살님이 비파를 들고 계신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깨어나라. 도취. 그런 환상. 그런데서 깨어나라. 현실을 바로 봐라. 이랬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육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의 가르침이 뭐냐? 결국은 우리가 전생에 수많은 생을 돌면서 이런 곳, 이런 곳, 이런 곳을 많이 돌았지마는, 그런데 결국은 정말 우리가 성장할 수 있고, 변할 수 있고, 우리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를 좀 더 높은 차원의 어떤 정신성, 그런 어떤 능력을 가지려면 바로 인간의 단계에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어느 도를 심리상태에 우리가 헤매든지 간에 진정한 돌파구는 뭐라고요? 인간도로 일단 와야 된다. 인간도로.
그러니까 내가 지옥 같은 “아우 난 끔찍한 지옥이었어. 지난주에 뭣 때문에 주식을 잃어버려서 아니면 자식이 어때서 남편이 어때서. 어떤 경우든 그 대상을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아니면 누구를 원망하든 그렇게 해가지고는 거기에는 돌파구가 없다. 가면 갈수록 더 이생은 꼬이는 거죠.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그럴 때 얼른 뭐에요? 인간도로 돌아와야 된다. 그런데 인간도로 돌아올 수 있는 기법이 뭐라고 그랬어요? 이 뭐고? 내가 누군가. 인생이 뭔가? 왜 사는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공수거공수래. 그러니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고 이런 어떤 보다 좀 더 근원적인 실존적인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그런 물음을 시작함으로써 바로 우리는 출발을 할 수가 있다. 수행에 출발할 수 있다 그랬어요.
아귀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이렇게 갈망하고 끊임없이 욕망하고 지칠 줄 모르게 내가 원하고 갈망만 하는 내가 대체 누군가? 그죠? 또 여기서도 뭐에요? 마찬가지에요. 또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그냥 질투하고 내 중심적이고 이렇게 하는 도대체 내가 뭔가? 이렇게 해가지고 내가 괴롭거든요. 그럼 인간도에 있다고 안 괴롭냐? 괴로워요. 괴롭기는 하지만 여기는 뭐에요? 변화한다. 성장할 수 있는 희망, 기대. 왜? 우리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물어 가면 내가 왜 사는가? 인생이 뭔가? 처음에 잘못허무하게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잘못하면 인생이 너무 허망하고 공허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이놈의 인생 진짜 별 볼일 없네. 진짜 앞이 안보이네. 그냥 콱 죽어버릴까? 그래서 죽고 싶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겨우 그런 고민을 했어요. 바르게 왔습니다. 인간적인 고민으로 왔어요. 오늘은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오늘은 삼학도를 공부하자. 삼학을 공부하자. 삼학도가 아니라 삼학. 그래서 인간도에 왔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느냐? 바로 가장 불교에서 기본적인 세 가지 방법의 기초적인 공부를 해야 된다. 그래야지 그냥 인간도에서 내가 뭔가? 인생이 뭔가? 그러고 있으면 계속 허망해서 우울증에 걸리거나 죽고 싶어진다. 이 말이에요. 허무하고. 그럴 때에 거기에 빠지면 안 되는 거죠. 거기에 빠지면 안 되고 “아~ 인생이 뭔가? 허무하다. 왜 사는가?”
정말 이런 기분, 내가 그냥 너무 무가치하고 느껴지고, 세상에 해놓은 게 없는 거 같이 느껴지고, 인생 잘못산거같이 느껴지고, 뭔가 너무 누구는 저렇게 성공해 보이는데 누구는 저렇게 유명한데 누구는 저렇게 많이 가졌는데 나는 이게 뭔가? 뭐 등등. 그런 것이 들 때에 계속 그 상태에서 우울증으로 가거나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패배감을 느끼거나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에요. 인간도로 왔을 때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게 뭐냐? 드디어 세 가지 기본적인 공부를 해야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삼학을 얘기합니다. 삼학 세 가지 기본단계에요. 그래서 삼학은 계정혜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게 뭘까요? 삼학하면은 계정혜다. 그럼 난 공부 다 한거죠. 삼학 다 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오해에요. 그거는.
삼학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 일단은 볼까요? 계정혜, 삼학이에요. 계는 뭐죠? 지계, 계율. 네. 계율이고 정은 선정, 이거는 지혜. 너무너무 흔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삼학이 삼학은 기본적으로 뭐냐? 아까 인간마인드에 왔을 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해가지고 우리가 세 가지 공부하는 방식입니다. 계는 첫째 절도가 있어야 된다. 공부할 때. 절도를 가져야지 그냥 막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하면 안 돼요.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든지 뭘 할 때든지, 해야 될 때와 하지 말아야 될 때를 구분해야지, 사랑도 자식을 위한 사랑도 그렇고 모든 우리행동에서. 그래서 이 계는 우리는 보통 수행을 한다 했을 때 신구의 삼업을 닦는다. 그러죠?
그랬을 때 여기에 신_(몸 신)자. 구_(입 구)자에요. 그러니까 몸으로 하는 행위. 행위에 대한 절도입니다. 계는. 우리 보통 행위에 대한 절도를 제대로 익혀야지 기본적인 기초가 없이 하면 안 돼요. 이거는 행위에 대한 절도,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내가 행동하거나 말할 때 가장 하지 말아야 될 기초, 천수경하시면 뭐하죠? 십악참회 맨날 하시죠? 천수경에. 기본적으로는 5계를 지켜라. 그래서 쉽게 나오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목적을 알아야 돼. 이 계를 지키는 목적이 뭐냐 이거죠. 계를 지키는 목적은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뭐죠? 조금 더 내면에 선한 심리상태.
그리고 건강한 마음의 상태를 계속 증장시키고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없애도록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나로 인하여 상대가 불건강해지도록 하지 않도록 하는 행위를 제재하는 거에요. 대인관계에서 나로 인하여 상대방이 세상이 건강하고 행복해지도록 하기위한 행위를 여기에서 규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수행을 할 때는 내가 이 말을 하거나 이 행동을 했을 때에 내가 굉장히 불건강해지나 건강해지나 이런 알아차림을 훈련을 해는 되는 거고. 또 상대한테도 마찬가지로 상대 건강이나 행복을 내가 자극하는 건지. 아니면 상대의 기분 나쁘고 상대의 불건강이나 불행을 내가 화남을 초래하는 건지. 그런 거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계라고 하는 건. 그래서 이거에 대한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면 정은 뭐냐? 정은 굉장히 인지적이에요. 정서적인 거, 인지적인 거. 그러니까 정서적이라는 건 감정 상태죠. 인지적이라는 건 뭐에요? 사고적이고 의식적인 부분입니다. 그 부분에서 이건 초점을 맞춘 거에요. 그러니까 계_이거는 행동의 규범이죠. 정_이것은 뭐죠? 내면의 심리상태. 정서적 심리상태. 인지적인 심리상태를 어떻게 이것을 건강한 심리상태. 기분 좋은, 우리가 유식에서는 그거를 선심소 불선심소. 그래요. 그러니까 선심소는 뭐죠? 기쁨이나 행복이나 경쾌함이나 즐거움이나 차분함이나 뭐 이런 걸 일으키는 것은 선심소고. 불선심소는 뭐에요? 화나거나 탐욕하거나 뭐 이렇게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뭐~ 그런 것들은 다 불건강한 심리상태죠.
그러니까 정은 그런 상태에 대해서 계속 해서 끊임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거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건강한 불행을 유발하는 그런 심리상태가 일어나는지 아니면 내 안에서 계속적으로 사랑하고 행복하고 자비를 베풀고 그런 심리상태가 일어나는지. 그런 거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아마 지금 여기까지 들으면 여러분이 아마 아이고 지금까지 계정혜 삼학 듣는다고 좀 다르네. 조금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마 그런 분들이 여기 책을 보시면 계는 몇 개가 있고, 율은 뭐고, 또 선정은 뭐다. 뭐~ 용어 이런 거 설명 다 해놨습니다. 이 책에.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 시간에 다 하기에는 어렵고 핵심 포인트를 일단 먼저 말씀 들여야 되겠어요. 그래서 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구의 삼업에 초점을 맞추고 선악에 어떤 행위를 자각하는 거에요. 그 선악의 기준도 목적이 제가 맨 첫 시간에 말씀 드렸을 거에요.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할 때는 세 가지를 비춰봐야 된다고 그랬죠? 하나는? 내 내면, 하나는 내 대인인간관계. 그다음에는 뭐에요? 우리 전체 사회나 자연생태. 이런 것들을 다 맞추어서 비춰 봐진다 그랬죠. 그래서 거기에 준해가지고 계정혜의 삼학도 닦는 거에요. 궁극적으로. 그래서 목적이 뭐냐니까 지금 말씀드렸듯이 선심소를 유발하고 또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행복이나 웰빙이나 성장을 촉진시키는 행위나 내가 말을 하느냐?
아니면은 나의 행복, 또 상대방의 행복, 성장을 뭐에요? 방해하는 그런 말을 하나? 그런 행위를 하는가? 이런 거에 대해서 자각훈련을 한다. 그러니까 그런 거에 대한 것을 계속 해야지 육도를 도는데서 벗어나고 우리가 증장해가지. 그냥 아~ 내 이게 너무 괴로우니까 도가 다 괴롭잖아요. 괴로운 상태에 빠져 이렇게 사는 게 뭔가? 인간이 뭔가? 나란 뭔가? 이렇게 잘못 빠져나가서 내가 수행하지 않으면 정말 우린 더욱 꼬이고 더 힘들어진다. 그럴 바에 차라리 동네 나가지고 좀 남의 흉도 보고, 또 기분전환도 하는 게 낫죠. 그죠? 그렇지 않으면 깊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결국은 아주 자살충동까지 일어날 수도 있고. 힘겨워진다. 이거죠.
그리고 그다음에 계행수행에 대한 부작용, 그랬는데요. 그럼 이렇게 하다가 보면 수행을 할 때에 어떤 부작용을 우리가 일으키냐 하면 계라고 하는 것은 한번 정해놓고 고정된 것으로 우리가 오해할 수가 있다. 시간과 공간에 영향을 받는 이것도 다 무상의 이치를 따르는 거에요. 연기의 이치를 따르는 거고. 그런데 뭐 한번 정해 놓으면 그게 이거는 계니까. 이러고서는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환경시절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 계율에 집착하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오히려 계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이게 계행수행의 부작용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뭐를 하냐?
우리가 근본적으로 계를 지키려고 하는 목적을 망각하는 거죠. 그 목적이 뭐라고요? 내가 행복해지고 인간관계에서 서로 뭐죠? 건강하고 행복한 대인관계. 서로 웰빙을 서로의 행복을 성장을 서로 이렇게 부추겨 주고 도와주는 관계. 또 세상을 더 아름답고 좋게 하는 관계. 이런 걸 방해한다면 그건 계가 더 이상 계가 아니라 좋은 계가 아닌 거죠. 그런데 계에 대한 부작용은 그래요. 우리가 너무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다보면은 계를 지키기 위한 계가 되가지고 원래 주객이 전도되는 거지. 계를 왜 지키려고 한지를 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러기 때문에 이 계라고 하는 것은요. 그런 말 우리 다 할 거에요. 흔한 말이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그 환경 그 시대 그 시절에 따라서 다 바뀌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계를 오해해가지고 아~ 이건 부처님 당시부터 원래 지키던 거니까. 이러고서는 끝까지 고집을 한다. 그러면 그거는 육도 중에서 오히려 어디로 돌아갔다? 인간마인드에 있는 게 아니고 어딘 거 같아요? 축생마인드. 맞습니다. 축생 마인드에 가는 거에요. 고집. 무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조건을 모르고 이거니까. 그래서 오히려 요즘은 그렇게 해서 이 계의 부작용이 심하면 어디까지 가냐? 오히려 요즘은 무슨 시대라고 그래? 지금? 글로벌시대에요. 글로벌 시대에는 뭐죠? 글로벌 시대에 맞는 교양과 상식이 필요한데. 오히려 글로벌 시대에 합당한 교양과 상식수준에 못 미치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게 아주 심각한 부작용입니다. 우리가 계에 집착하게 되면. 계집. 너무나 과도하고 중도. 이게 다 중도수행을 해야 되는데 넘어 서면은 오히려 이 세상에서 봤을 때 상식과 매너에도 안 들어가는 그런 거를 위험부담이 있다. 그런 것이 있어요. 대표적인 예를 들면은 제가 미국에 보스턴에 있을 때요, 임신중절을 반대는 하는 운동을 뭐 지금도 그렇지만 논란이 항상 있는 건데. 임신중절이 태아도 생명이다. 그러니까 임신중절은 살인이다. 이런데 과도하게 이런 하나의 규칙 룰을 정해가지고 거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인터넷에 블랙리스트를 작성했어요. 임신중절을 해주는 병원, 간호원 이런 거를.
그렇게 해놓고 젊은이가 그게 보스턴에 있는 병원이었어요. 습격을 해서 간호사를 그때당시 2명이나 죽였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에 시작은 어땠어요?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이잖아요. 그런데 뭐든지 그 어떤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집착하게 되면 무엇을 초래하는가, 그 결과는 뻔합니다. 반대로 가는 거죠. 생명존중사상에서 출발한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답고 좋은 거였는데, 집착하고 과도하게 한 나머지 오히려 생명을 죽였다. 파괴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계를 지킬 때도 혹시 내가 계를 과도하고 무리하게 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저거 저거 안 지키고 안 좋다고 이렇게 가는 수준이 되면 벌써 어떻게 해요? 그 계가 계가 아니다. 이 말이오. 하나의 굴레가 이미 됐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왜? 인간관계를 더 좋게 하고, 나에게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한건데 이미 굉장히 불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판단하고 비난하니까요. 자~ 그 다음에 정입니다. 정 같은 경우는 이런 어떤 그~ 심리상태에 대한 자각이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좋은 선한,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고 성장하고 그런 선한 상태의 심리상태에 대한 훈련이 유지하기 위한 훈련이고. 또 어떨 때 이 불선한 심리상태가 나나. 이런 거에 대한 자각을 하는 거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선정수행을 한다. 그랬는데. 또 선정수행의 핵심은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하면 된다.
그런데 이 선정수행을 하는데 또 여기에 대한 어떤 부작용이 또 뭐냐? 내 내면을 잘 살피는데 보면 잘못하다보면 너무 내가 내면세계만을 살피는데 빠져가지고 외부세계와 단절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현실세계에 대해서 무지해지는 거지 뭐. 계속 내 앞만 앞만 앞만 들여다 보다 보면은. 그렇게 되면은 이것은 제가 이름을 부주의맹점이라고 그랬는데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거에 대한 하나의 맹점이 생겨서 점점 뭐요? 사회에 대해서 거리감이 생기는 거에요. 현실감이. 그럼 애시당치 이 수행을 왜한다고요? 내 내면도 잘 보고 대인관계에서 원만하고 행복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수용하고.
뭐 이런 대인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한 수행이었는데 어디로 빠져버려요? 오히려 대인관계로 부터 완전히 단절되고 소통이 안 되는 그런 부작용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수행을 할 때도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중도수행을 잊으시면 안 되겠다. 극단적으로 어쨌든 가면 안 된다. 우리 사회도 지금 번역되어 나온 책이 있는데 Daniel Goleman이 EQ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이거를 정서적, Emotional Intelligence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서적인 지능이다. 정서적 지능. 정서적 지능이 뭐겠어요? 관계 속에서 또 내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어떻게 내가 감정을 조절하고 조율하고 그리고 잘하면서 대인관계를 잘하느냐?
남을 너무 기분 나쁘게 하지 않고. 과도하게 눈치 보는 거 하곤 다르죠. 내 감정을 조절함으로써 상대에게 불선심소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거. 내가 공격성이나 이렇게 그 올바르지 않는 그런 행위나 말을 함으로 서요. 요런, 능력이 이 정에서는 정을 훈련할 때 선정수행을 할 때는 이런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Emotional Intelligence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서 지금 부작용이 초래되는 게 뭐라고 그랬죠? 잊어버리셨어? 벌써? 내 앞만 들여다보면 안 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상대의 심리상태에 대해서도 내가 어떻게? 섬세하고 민감하고 배려하는 그런 민감성이 있어야 된다 이거에요.
상대가 어떻게 느끼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내가 느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 것도 같이 훈련해야지 내 속만 자꾸 들여다봐서 내가 무슨. 물론 자기를 알게 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렇긴 하지만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도 내가 좀 민감하게 알아차릴 때에 상대의 감정을 과도하게 건드리거나 과도하게 상처를 주거나 그러지 않게 되거든요. 그래서 정수행 할 때는 그런 걸 같이 보는 훈련이 필요하고 만약에 그렇지 않게 되면은 별로 수행에 큰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없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시면 되겠고. 그러니까 이 부분에 가면은 사실은 뭐에요?
굉장한 관계 속에서 어떤 공감하는 능력이나 또 나와 다른 상대입장이나 이런 거를 굉장히 수용하는 그런 능력이고. 우리 전통적인 말로는 덕을 자꾸자꾸 쌓아가겠죠. 세 번째입니다. 혜에 관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요. 우리가 지혜하면은 무조건적으로 깨달음을 닦기 위해서 하는 거다. 프라지냐 반야바라밀. 많이 하셨죠. 이 지혜에서 여기서는 이 지혜의 핵심이 뭐냐 하면요. 지혜 같은 경우는 우리가 요기에서 혜를 수행을 할 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앎의 방식이에요. 우리가 알아 가는데 있어서 앎의 방식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냥 뭐 평소에는 그냥 뭐 우리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은 깨닫는 거 그랬는데.
보통은 뭐죠? 우리가 앎의 방식에서 어떤 지적능력. 인지적인 능력. 지적능력. 인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뭐냐니까 통찰이에요. 직관, 통찰. 이런 쪽에 능력을 향상시키는 거에요. 그리고 이게 유식적으로 이야기 하면은 말씀드린 맨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팔식. 식이 있죠. 내 중심적으로 너, 나, 구분해서 이원적으로 아는 이 방식의 앎에서. 이방식의 앎은 사실은 굉장히 오염되어있어요. 왜? 내 중심에 아는 거고, 내 방식으로 아는 거고, 상대에 대해서 항상 착각하는 이런 방식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니까.
이원적으로 나누기 이전에 굉장히 공감적으로 아는 거. 자비로워하는 거. 직관으로 아는 거. 우리가 공명을 일으키면서 아는 거. 좀 다르죠? 사랑으로 아는 거. 앎이 우리가 생각할 때 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인지적으로 아는 거, 지적으로만 아는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아는 것은 경험하는 것은 그런 방식 말고도 있다. 우리가 자비심으로 아는 방식도 있어요. 공감하면서 아는 방식도 있고 사랑으로 아는 방식도 경험한 방식이 있는데 여기서 강조하는 거는 바로 이 방식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아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상대를 계속 그렇게 아는 방식을 이것을 증장시키고 향상시키는 훈련이다.
그러니까 요렇게 나누어서 분별하고 따지고 내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요 지혜를 훈련할 때는 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데 자아초월심리치료자에 에서 Frances Vaugan이라고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의 한 논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Emotional Intelligence가 하나의 예가 되겠는데. 여기서는 Spiritual intelligence라고 해요. 영적지능이라고 그래요. 영적지능이라고 아마 여러분이 별로 안 들어보셨을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에 인지적 지능, 사고지능, 그런 능력이 아니라 여리서는 영적, 정신적, 영혼의 어떤 본질적 그런 지능을 이야기 한다. 이 지능을 성숙시키고 향상시킨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이 지능에 대해서 Frances Vaugan이 뭔 얘기를 했냐하면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영적지능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 내에서 민감성과 대인 관계의 민감성을 계발하는 영정수행과 관련되어 있다. 사물을 경계를 볼 때 어느 한 가지 측면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거에요. 굉장히 전체적이고 다방면적인 아주 중다방면적인,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관점에서 본다. 이거죠. 치우치지 않았단 얘기죠. 한마디로. 그래서 자아 초월적 세계관, 지구와 모든 존재들과의 어떤 관계성에 대한 지각이다. 그러니까 굉장히 연기적 관점인거죠. 굉장히 연기적 관점으로 본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보게 되고 그러면 이런 능력을 향상하고 그렇게 해서 영적 성숙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니까, 바로 그렇게 해서 나온 이 지혜에 이런 능력을 계속 훈련함으로써 나오는 것은 뭐냐?
하니까 결국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싶어 하는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의 모든 신구의 삼업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말씀이 되겠어요. 지혜를 닦는데 부작용은 뭐냐? 우리 보통 알음알이란 말 많이 하죠? 알음알이. 이제 혼동하는 게 뭐냐? 하면은 이 지혜를 닦을 때에. 그러니까 지혜하고 상반되는 게 알음알이라고 그래서 오해해 가지고 아예 뭐죠? 책을 뭐 한때는 책을 보면 안 된다. 또 뭐도 하면 안 되고 이런 게 조금 있었는데. 지식과 알음알이를 혼동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인지적 능력도 굉장히 지식도 필요하죠. 지식이나 정보도 세상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지.
그런 능력도 굉장히 필요해요.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인데 그런 거를 알음알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알음알이라는 건 뭐냐 하면은 그러니까 지식은 사전 보면 경험, 교육, 이치를 통해서 얻어지는 정보다. 정보는 현실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하죠. 그런데 알음알이는 뭐냐 하면 내가 얻은 정보 그 지식에 집착하고 맹신하는 거, 그게 알음알이에요. 내가 얻은 정보나 지식은 단순한 정말 그냥 정보일 뿐이에요. 그냥 참고체제죠. 그런데 그게 절대적 인양 믿고 그게 전부 인양 맹신 하면서 그걸 가지고 뭐에요? 모든 관계 인간관계며 사물이며 그걸 다 그걸로 다가 분석하고 따지고 판단하고 그것이 알음알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아는 정보나 지식이 있으면 절대 뭐에요? 상대가 아는 정보나 지식하고 같이 물과 기름처럼 갈등하거나 주장하거나 상대방이 틀렸거나 이런 것이 알음알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상대를 판단 평가하는 것이 차라리 뭐에요? 알지 아니한만 못하는 거죠. 왜? 이 세계를 우리는 왜 닦는다고요? 내가 더 행복해지고 내가 더 성장하고 내가 더 고귀한 인간이 되어가고 동시에 뭐죠? 내가 이런 걸 닦음으로서 내 주변과 내 이웃과 더 좋은 인간관계를 하고 내가 더 유익한, 그리고 더 도움이 되는 상대의 어떤 성장과 발전에 내가 보탬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을 닦는 건데, 내가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오히려 더 뭐에요?
상대를 더 무시하거나, 아니면 상대를 더 평가하거나, 더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이 알음알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계정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 유익한 일을 하는 데는 단지 유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에는 언제나 뭐죠?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일은 없죠. 그런데 다만 우리는 참구해야 된다. 너무 집착해서 하게 되면은 부작용이 초래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는 그런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이 계정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 유익한 일을 하는 데는 단지 유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에는 언제나 뭐죠?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일은 없죠. 그런데 다만 우리는 참구해야 된다. 너무 집착해서하게 되면은 부작용이 초래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는 그런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랬어요. 자~ 그러면 마치기전에 우리 잠깐 명상 좀 해볼까요? 예.
자~ 허리세우시고 자~ 편안하게. 눈을 뜨고 있을 땐 가끔 시각이 들어오는 것이 방해할 수가 있으니까 눈을 이렇게 주욱~ 감으시면 좋습니다. 자~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요.
(청아한 음) 띵...
우리가 삶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추론, 비교, 판단, 분석, 인지, 지각 과정을 통한 이해와 앎이고. 두 번째는 직관과 통찰 등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다. 전자는 타인에게 전달이 가능한 반면 후자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전달이 불가능하다. 자아초월심리학자인 윌리엄브러드는 이 두 가지 방식 외에도 우리 앎에는 사랑, 자비, 공감에서 오는 공명, 감정 이입 등을 통한 앎과 알지 못함을 통한 앎이 있다. 특히 대승불교는 자비, 실천을 통한 앎을 강조하고 선은 알지 못함을 통한 앎을 강조한다.
(청아한 음) 띵.........
네. 조용히 눈 뜨세요. 마무리하면요. 이번 시간에는 우리가 괴로움의 순간에 내가 누군가? 어디서 왔나? 정말로 왜 사는가? 그리고 이 현실 사는 동안에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떻게 살 건가를 고민할 때에 그냥 그 고민자체만 하면은 까닭, 어떻게 된다고요? 허무에 빠지거나 우울에 빠질 수가 있다. 그래서 바로 이때 우리는 이 세 가지. 삼학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때에 이 세 가지 방식을 우리가 염두에 두면서 부처님의 경율론 3장 있죠? 부처님 말씀 경전, 율장, 논장, 해석해 놓은 거, 이런 걸 여러 가지 법문을 통해서든지 경전이든 기도를 통해서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시는데,
이 세 가지 방법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내 말하는 거, 또 내가 행동하는 거,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심리상태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하고 그리고 또 마지막 세 번째는 그래서 내가 더 사물을 보거나 내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을 볼 때 더 명료하게 알아가는 이해해가는 그런 수행을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마지막에 제가 책에 읽어줬듯이 우리 한국의 선불교 같은 경우는 뭐에요? 모름을 통해서 경험하고 아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뭐든지 학교에서 배우고 세상에서 배운 것처럼 그냥 그런 정보를 가지고 따지거나 분석하거나 그것이 앎의 전부가 아니고. 때로는 그냥 고요하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걸 관찰하거나 바라보거나 자각하고. 또 몰라도 그렇게 불안할 필요가 없어요. 모르면 그냥 모르는 대로 그냥 [모른다] 라고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뭐요? 그 [모른다]하고 있는 자체에서 알아지는 세계가 또 열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공부하는 데는 굉장히 다양한 방식이 있으니 이 방식으로 세 가지를 생각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계속적으로 수행을 해서 육도의 그런 고통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수행을 계속 해야 된다. 왜요?
두 번째 시간인가 첫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죠? 행복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에요? 행복하기위해서도 기술이 필요하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행복의 기술도 뭐죠? 행복 하는 데도 우리는 공부하고 다른 능력을 쌓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습득하고 기술을 연마해야 된다. 이거죠. 그 연마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방식입니다. 예. 또 다음에도 이어서 계속 우리는 이제 연마하는 방식들을 다양하게 공부하게 될 거에요. 수고하셨습니다.
'스님법문 > 서광스님_치유하는불교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9회 오정심관 (0) | 2013.05.19 |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8회 탐진치학 (0) | 2013.05.12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6회 육도윤회2 (0) | 2013.04.28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5회 육도윤회1 (0) | 2013.04.28 |
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4회 사성제2 (0) | 2013.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