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기타법문
그래서 진각선종께서는 중생세계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이니까 우리 인간으로 몸을 받아서 고통은 뭔가? 물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생노병사를 이야기했고 또 4가지를 이야기해서 근본팔고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거 다 접어 놔두고. 우리 생과 사를 접어 놔두자 이거죠. 그거까지 이야기 할 수 없으니까. 우리 당장 몸을 받았으니까 현재 이 몸이 누리고 있는 고통이 뭔가? 구체적으로 그것부터 먼저 이야기한 겁니다. 그것이 뭐겠습니까?
병고. 첫째 우리 몸이 있으니까 우리 몸은 영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어느 구석이 탈나도 탈 날거니까. 그리고 이미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세포가 생사가 왔다갔다 할 거니까.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끝없이 그러는 거예요. 지금도 여러분이 비록 어린아이부터 태어났지만 계속 세포가 자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죽어가요. 다만 어린아이는 죽어가는 세포가 적을 뿐이에요. 살아나는 세포가 더 많고. 이제 나이가 50 620이 들어가면은 살아나는 세포보다는 죽는 세포가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늙는 거고. 어릴 때는 죽는 세포보다는 살아나는 세포가 많기 때문에 이제 점점 더 팽창해 지고 커지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세포는 죽어서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대소변, 땀, 혹은 몸의 때, 이런 모든 것으로 다 분산되 나오는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이 멀쩡한데 왜 자꾸 문지르면 때가 나올까요? 몸에서 수없이 많은 세포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게 밀려서 밀려서 나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요. 소나무껍질하고 똑같습니다. 모든 나무하곤 좀 다르잖아요. 이 소나무는 소나무 껍질이 늘어나질 않습니다. 보통 나무는 껍질도 늘어나는데 소나무는 껍질이 늘어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소나무하고 껍질하고 붙어 있다가 나무가 굵어지면은 껍질이 어떻게 되요? 결국은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늘어나지 않으니까.
이게 다른 나무하고 다른 점이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몸의 세포가 죽고 나고 죽고 나고 하는 게 소나무껍질과 똑같은 거예요. 계속 크면 클수록 계속 벗겨지는 거예요. 계속. 도로가에 있는 마로니에나무가 계속 껍질 벗겨지죠. 계속 벗겨지잖아요. 백일홍 나무가 계속 껍질이 벗겨지고. 왜 그러냐 하면 굵으면 굵을수록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뱀은 어떻습니까? 몸이 크면은 허물을 벗어야 되. 왜? 더 이상은 그 허물 갖고는 그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요.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그만큼 커졌다는 거예요. 또 팽창했다가 도저히 그게 안 되니까 또 허물이 벗겨지면서 그 만큼 커진 거예요. 그러니까 뱀은 크면 클수록 계속 허물을 벗는 거예요. 그거는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업신도 그와 똑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게 자연의 원리고 진리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계속 그리하다가 나중에는 늘어날 것이 없는 겁니다. 없으면 어떻게 되요? 마모되기 시작해요. 마모되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뭐가 생겨요? 늘어날 것이 없으니까 주름살이 생기는 거예요. 늘어났던 것이 이제는 벗을 수가 없으니까. 더 이상 오무라들수고 없으니까. 늘려놨으니까. 그러면서 서서히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은 첫 번째 고통이 바로 몸에 대한 병고라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병고를 해탈해야 되. 그 다음에 두 번째 고통이 뭐겠습니까? 우리가 생활하는데 살아가는데 뭔가 물자를 공급받아야 되니까. 이것이 바로 물자가 없으면 가난하니까. 가난의 고통이라 그래. 그것은 모든 게 가난한 겁니다. 혹은 재물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학문도 가난할 수도 있고, 인물도 가난할 수도 있고 모든 게 가난할 수도 있어요. 이쁘면 인물이 넉넉하잖아요. 미우면은 가난한 겁니다. 이쁜 쪽에서. 왜? 우리 두 눈은 비교를 하니까.
항상 서두에 말씀드린 비교의 논리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비교를 하니까. 비교만 안 해도 괜찮아요. 내가 어떻게 생겼든 간에 나는 내 멋에 산다 그러면 될 텐데. 이게 눈이 문제가 돼서 귀가 문제가 돼서. 손발이 문제가 되가지고. 이 전부다 이중으로 돼 있어서. 다 상대성으로 되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상대성 진리 속에 사는 거예요. 상대성 원리 속에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건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상대성을 타파하기위해서 제가 제3의 눈, 제 3의 손, 제 3의 발, 제 3의 기를 얻으라고 제가 그랬잖아요. 그것이 바로 해탈의 길인데. 그 해탈의 길은 첫 번째가 바로 우리는 병에 대해서 해탈해야 되겠고. 일단은 건강해야 되는 거요.
그래서 육자진언을 부르면 가장먼저 해탈하는 게 뭐냐하냐하면 물질도 아니고 건강부터 먼저 갖고 와요. 건강이 제일 먼저 얻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서원이 아무리 물질이고 명예를 갖고 오더라도 절대로 물질과 명예가 얻어지지 않습니다. 왜? 건강하지 않으면은 물질 명예를 얻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우선이 먼저 되야. 그것이 바로 그 그릇이 차야 다음 그릇에 명예와 물질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가 가난의 고통이에요. 두 번째니까. 그래서 건강한 연후에 두 번째 해탈할 수 있는 게 가난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앞에 말씀 드린 대로 그 가난은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 고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모든 요소가 넉넉하지 못 한 거는 다 가난한 겁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지금 안경을 쓰고 있으면은 눈이 가난한 겁니다. 다른 분 안경안썼는데 나만 굳이 안경을 서야 되. 다른 사람 안경을 안 써도 천리만리 볼 수 있는데. 나만 쓰니까 눈이 가난한 거예요.
여러분이 만약에 말을 못한다면 잚 못한다면 저는 이렇게 와서 말하다 보면 이말 저말 할 수 있는데. 여러분 앞세워 놓고 말하게 두면 얼굴만 벌개지면은 입이 가난한 거예요.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난이야기 하니까 또 물질만 갖고 이야기해요. 물질만 갖고. 왜? 물질은 그 중에 일부분일 뿐이에요. 사실은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기준을 그렇게 맞춰놓은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인간이 욕심도 마찬가지인데 욕심도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모든 기준을 물질에다 다 맞춰 놓은 거예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래서 탐심을 버리라, 버리라 하는 이유는 어떤 탐심을 버리라는 얘기냐 하면은 실제로는 아름다워 지고자 하는 마음, 명예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 이런 어떤 건데. 탐심 버리라 그러면 꼭 돈버리라는 소리 같애요. 마음에. 그 물질을 버리라는 소리로 들린다 이거죠. 사실은 그런 게 아니고 오욕칠정을 다 버리는 게 그게 탐심을 비우는 건데. 아마 스승님이 심빈당에서 탐심비우라 그러면 또 나한테 돈 몇 푼 준다고 ???라고 그런다. 꼭 요렇게만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어리석냐 이거죠. 그게 바로 자기 눈의 잣대로 만든 거거든. 왜 진리를 눈으로 못 보냐 이거죠.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두 번째 고통은 가난에서 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고통이 뭐겠습니까? 불화. 화합하지 못한 거. 우리 항상 육대를 이야기하잖아요. 지수화풍공시 그 다음에 사대이야기하면서. 사대가 서로 섞여서 서로 장애롭지 아니하면서도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닙니까. 이 허공이 비어있지 않습니까? 비어있는 이 허공이 만약에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자라지도 못해요. 다행히도 비어있으니까 내가 다녀도 괜찮잖아. 클 수도 있고. 그래서 비우라는 겁니다. 왜? 비우면 어떻게 되요? 자유스러워지잖아요. 이 안에 홀이 꽉 찼으면 내가 자유스럽습니까? 부자유스럽습니까? 부자유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비우면은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비우세요. 이쁜 거, 명예. 이런 것도 다 비워야 되는데. 우리 어디 그렇게 됩니까? 지은 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꾸. 자기 실지로 능력은 적은데도 자꾸 큰 걸 찾고, 큰 걸 찾으니까 피곤한 거는 그 분만 피곤해요. 큰 거 찾는 분만 피곤해요. 옆에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는데. 자기 혼자만 답답히 여겨. 옆에 보면 아무렇지도 않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는 서로가 합쳐서 어울리는, 화합하는 그런 겁니다.
인간은 이제 두 눈을 가졌으니까 두 눈이 따로따로 놀면 안 돼요. 비록 비교하는 눈이지만 하나로 봐야 되. 그래야 사팔뜨기가 안 될 거 아니에요. 따로 따로 놓으면 어떻게 되요. 아니잖아요. 귀가 두 개있는데 따로따로 놓으면 안 돼요. 소리를 같이 들어야 되. 그래야 뇌에다가 같은 소리를 전해 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에 오른쪽 귀와 왼쪽귀가 딴소리를 전해 주면 뇌가 어떻게 되요? 혼돈을 일으킬 거 아니에요. 우선 우리 몸에 두 개씩 나눠져 있지만 그 두 개 나눠져 있는 그것이 우선 그것부터 화합이 돼야 되.
그리고 손과 발이 화합이 되야 되. 그렇죠. 손은 손대로 화합이 되야 되. 따로 따로 놀면 안 되잖아. 이것이 바로 앞에 거꾸로 올라가면 병고해탈도 될 것이고, 가난해탈도 될 것이고, 화합이라는 것은 어쩌면은 앞에 두 가지 해탈을 다 지녔기 때문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게 화합인겁니다. 가난하면요 화합이 안 됩니다. 아프면요 화합이 안 됩니다. 여러분 아픈데 지금 이쁜 사람 있습디까? 내 몸이 아픈데 누가 이쁩니까 지금? 음식인들 맛있겠습니까? 옷인들 좋겠습니까? 천하에 내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화합이 안 됩니다. 그렇죠?
또 가난한데 무슨 화합이 됩디까? 우선 내가 아무것도 없으면요. 남 앞에 설 창피해서 서지도 못해요. 자격지심 때문에. 결국은 화합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화합이라는 것은 병고와 가난이 소멸이 되었을 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지는 거지. 어떤 사람은 그래. 우리 돈 없어도 사랑만 있어도 산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거요 며칠 갈지 봐야 알아. 한 달 갈지, 일 년 갈지, 두 달이 갈지. 물론 시발점은 우리 없어도 산다. 그때부터 빨리 모아야 되. 깨지기 이전에. 그렇지 않아요. 왜? 시간이 가면은 얼마 갈지 모르니까. 한도가 있으니까.
차에 기름을 딱 넣는데. 이 기름은 몇 키로 까지 갈 수 있냐 하면은 40키로 까지 못 간다 이거죠. 그러면 40키로 가기 전까지 40키로 뛰는 중에 다시 기름을 넣을만한 거를 준비를 해야 되. 그 말입니다. 그래야 사랑만 갖고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이거야. 앞에 몸이 아프면 사랑도 글쎄. 장병에 효자 없더라. 그죠? 오죽하면 장병에 효자 없으니까 우야다가 효자 나오며 세상이 떠들썩해. 효자상 주고 난리요. 원래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그렇지 않아요. 당연히 해야 하는데 떠들고 난리요. 얼마나 불효자가 많으면 그러겠어요.
그래서 저는 효자상같은거는 책정 안했으면 좋겠어. 뭐가 있으면 좋겠습니까? 불효자 상을 줬으면 좋겠어. 그게 특이하잖아요. 효자는 자식은 부모를 당연히 봉양해야 되니까. 그거는 의무잖아요. 그런데 그 의무를 이행을 안 하고 불효를 했으니까. 와 대단한 사람이다. 박수를 치고 상을 줘야 줘. 그리고 동네에 비석을 세워 줘야지. 이 분은 천하에 불효를 저지른 위대한 분이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당연히 해야 할 거를 안했으니까. 참 간도 크지. 얼마나 간이 크면 그걸 안하고 살겠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봐요.
여러분이 불효를 저지르며 간 큰 사람이에요. 야~ 사람으로서 어떻게 불효를 하냐 이거죠. 부모는 자식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죽을 때까지 생각하잖아요. 당연한 거니까. 그런데 자식은 어째서 그렇게 안하고 당연한 걸 안하냐 이거죠. 그렇게 하는 게 뭐겠습니까? 화합이라는 겁니다. 화합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자 부부지간에 만났어요. 남남끼리 만났다 이거죠.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만났어. 만났는데 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만나면 역시 대한민국은 여자가 간이 크다. 이렇게 생각해.
왜 그러냐하면은 여자가 자기 집에서 25년 30년을 컸다 아닙니까. 그죠? 생판 모르는 집에 와서 사는 거 보면 대단해요. 야~ 거 참 대단해요. 아니 왜 그러냐 하면은 20년, 30년 동안 친정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생판 모르는 남자 집에 와가지고 그 부엌에 들어가서 일하고, 밥하고, 상 차려 오고, 인사하고, 예예하고. 야~ 역시 여성이 대단해. 그러니 한국 아줌마들 대단해. 그렇지 않아요. 그걸 그 대단한 것을 뭐라면 좋겠어요? 화합 쪽으로 끌고 가면 얼마나 좋겠냐 이거죠.
그래서 옛날에 그 화합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어떻게 살라 그랬습니까? 두 눈을 얼마동안 막으라 그랬어? 보지 말고, 두 귀 듣지 말고, 입 그렇죠. 그렇게 해야 비로소 뭐가 생겨요? 호합이라는 덕이 생기는 겁니다. 그걸 한다 해가지고 딴 거 생기는 게 아니라. 화합을 시켜서 그런 거예요. 왜? 생판 모르는 곳에서 왔으니까 그걸 반죽을 하라 그러면은 그렇지 않아요. 시집이라고 와서 보니까 뭐하고 똑같으냐 하면 집을 짓는 걸 이야기하면. 나무가 있고. 시멘트가 있고 모래가 있고 물이 있고 이런 거예요. 그걸 그냥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겁니다.
이제 오셔가지고 그걸 잘 반죽하면은 삼층 누각도 짓고, 반죽 잘못하면은 들어가 살지도 못하고 짜브라 지고. 그 할 일이 누가 하겠습니까? 화합을 근본으로 하는. 그래서 특히 불교는 세 번째 화합을 주장하기 때문에 어쩌면은 남성 쪽에서 부처님을 믿으시오 하는 것보다는 어쩌면은 여성 쪽에서 불교를 믿으시오 하기 때문에. 사찰마다 남성이 출석하는 율보다는 여성출석이 높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그걸 고쳐야 되기 때문에. 근본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걸 모체라 그러잖아요. 부체라 안 그러고. 모체라 그러잖아요.
그 근본을 쥐고 있기 때문에 고쳐야 되. 그것이 될 경우 비로서 부부지간에 화합을 이룰 것이고, 부부지간에 화합하는 곳에서 뭐가 생겨요? 제2세가 생겨나는 겁니다. 2세는 어떻게 닮았어요? 화합의 농도에 따라서. 화합의 온도에 따라서. 2세가 생겨나는 거예요. 화합이 약하면은 2세는 성공 못합니다. 비실비실비실해. 몸이 비실비실한 게 아니라. 학문도 비실비실. 두뇌도 비실비실. 모든 게 비실비실해. 그러니까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틀렸어. 성공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거는, 화합으로 만들어 놓은 그거는 생각도 않고 비실비실한 사람을 자식을 만들어 놓고는 훌륭하게 되라, 훌륭하게 되라 그러니. 참 100미터를 22초에 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10초에 달리라 그러며 뭐가 하나 부러져도 부러지지. 그렇죠? 뭐가 하나 잘못 되도 잘못되지. 22초에 100미터를 달리는 사람에게 10초에 달리라고 그러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뭐가 하나 잘못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몰라. 그거기 때문에 이제까지 말씀드린 병고, 가난, 화합에서 얻어야 될 거 아닙니까? 불화에서 해탈해야 될거 아닙니까. 이 해탈하기 위해서 뭘해요?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밀교의 수행입니다. 성불이 밀교의 수행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받아 놓은 이 몸에서 첫째 한 생을 건강하게 사셔야 되. 그래야 뭐가 있습니까. 복이 있을 거 아니에요. 건강한 다음에 복이 있는 거예요. 복이 있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해요? 세상만물과 화합하는 거예요. 지금 화합은 부부지간의 화합만 이야기 하셨고 부모와 자식지간의 화합만 이야기 하셨지만 더 크게는 뭐와 화합돼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요.
자연은 천만년 가잖아요. 나는 지금 천만년 못가잖아요. 백년을 좌우하고 있잖아요. 이제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되면은 비록 내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가지만 내가 원래 갖고 있는 빛은 자연과 어떻게 되요? 천만년 동안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 천만년 동안 하나가 되는 그때를 뭐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육체 몸을 벗어났으니까. 영원히 윤회를 안 하니까 그걸 열반이라 그래요. 뭐 이 몸이 쿡! 죽는 게 열반이 아니라. 실지로 열반은 바로 그런 겁니다. 이제 영원히 윤회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업을 지은 지 모르지만 다음 생에 또 제가 이렇게 살펴보니까 또 중생으로 태어나야 되.
이유 없습니다. 왜? 가만 보니까 업투성이야. 윤회를 할 업을 딱!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어. 그러면은 어떻게 하면 벗어나겠습니까? 빨리 제3의 눈, 제 3의 귀, 제3의 코, 현실 거 맡지 말고. 제3의 입, 제3의 손, 제 3의 발을 빨리 터득하셔야 되. 그것은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안보이지만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모습을 나타내기위해서 간혹 가다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손이 천개고 눈이 천개라고 그랬어요.
나도 이 손가락마다 눈이 있어요. 지금도 이 손가락은 눈이 있어가지고 캄캄한 주머니 속에 딱! 들어가면 뭘 찾아내라면 요 눈이 보고 찾아내. 눈이 있다는 거거든요. 그게 제3의 눈인데 고걸 좀 더 잘 이용하면 얼마나 좋으냐 이거죠. 가능성은 있어요. 여러분도 이제 제3의 눈을 지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신 거거든요. 저와 인연이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곡히 바라고 싶은 것은 제발 상대성을 버리고, 이원적인 것을 버리고, 제3의 어떤 것을 터득하기 위해서 염송을 하시고,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밀교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거는 저의 가르침이 아니라.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또 60년 전에 진각종을 창종한 진각성종의 가르침이고. 그로부터 제가 여러분 앞에 서서 말하고 있는 저의 가르침이에요. 이거는 삼세를 들어도 똑같을 겁니다. 어느 곳에 가서 말하더라도 똑같을 겁니다. 이 점을 아시고 여러분 열심히 수행하시되 아~ 너무 현실적인 어떤 것만 바라지 말고 제3의 힘을 얻어야 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요 다음 시간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활 중에 있다라는 것을 중심해서 다음시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