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기타법문
옛날에 그 큰스님의 이야기를 한 일 있잖아요. 큰 스님이 금생에 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잘못돼서 욕심만 가득가득 갖고 있다가 나중에 죽어서 뭐가 됐냐 하면은 큰 구렁이가 됐어요. 제가 스님이라 그러니까 바깥 스님을 그런 것이 아니라 수행을 잘못하면 그렇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제자는 훌륭한 분이잖아요. 돌아와서 보니까 우리 스승님이 악업을 많이 지어서 아~ 뱀이 됐구나. 그래서 49제를 내가 해서 우리 스님을 모시고 좋은 곳으로 환생을 시켜야 되겠다 하고 49일 마치고 마지막 날 회향일 날 밥을 하고 떡을 하고 과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 제자스님 큰 스님은 죽을 끓이라 그랬어요.
흰죽을 끓여서 부처님 위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탁자 아래 딱~ 놓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스님 나와서 공양하시라고. 그러니까 법당 안에서 큰 구렁이가 나와서 밑에서 공양을 하는 겁니다. 금방 태어나서 큰 구렁이가 되기도 하지만은 이 빛이 죽어가는 구렁이 몸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새끼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이제 구렁이라는게 죽어갈 거 아닙니까? 혼불이 나가잖아요. 나가는 그 순간에 이 혼불이 들어오면은 이 구렁이는 또 사는 거예요. 또 살지만 주인은 바뀐 겁니다. 그럴 수가 있어요.
그게 하나의 화생과 같은건 데. 사생중에 태란습화중 화생인데. 그러니까 얼른 생각하면 49일 밖에 안 됐는데 왜 저렇게 큰 구렁이냐 하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그 산에 죽어가는 구렁이 혼불이 빠지고 그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법당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제자가 알고는 죽을 탁 먹은 연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장자로 뱀의 머리를 탁 때렸다잖아요. 탁 때리는 어찌 되요? 뱀은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죽으면서 어떻게 혼불이 나오는 거예요. 죽는다는 거는 혼불이 나오는 거니까. 순간적으로. 혼불이 나오면서 그 혼불은 파랑새가 되요. 파랑새. 파랑새가 되어 법당을 날아다니는 거예요. 남들은 모르죠.
그래서 이 제자스님은 이제 지팡이를 들고 파랑새를 몰아서 자~ 수행하러 스님 수행하러 갑시다. 저 따라 갑시다. 파랑새를 계속 몰아가는 거예요. 몰아서 저 남쪽에서 강원도 쪽으로 올라오는데 올라오는 중에 이 파랑새는 어디로 갈라 그럽니까? 막 날라가다 어디 급히 가는 거요. 쉭~ 날아가는 거요. 가만 보니까 축생이 교미를 해. 글로 들어갈라고. 스님! 스님 들어갈 자리가 아닙니다. 하고 쫓아내. 왜? 그 스님은 과거 업 때문에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제자 큰스님이 그게 안보이게 할라고? 스님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하고. 그리고 계속 가다 보면은 어떨 때는 잠자리. 어떨 때는 날 파리. 그러니까 기껏했자 축생보. 날짐승, 기는 짐승에만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안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몇날며칠을 큰 스님 모시고 오는 중에 어느 강원도 가까이 갔을 때 외딴집인데 어~ 갑자기 쏜살같이 날아간다 이거죠. 제자 스님이 보니까 사람이에요. 이제까지 축생만 보이다가. 그 혼불이. 파랑새가 보이다가 사람이 보이니까 들어가는 거요.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어 대문 밖에서 들어가서 한 참 기다리고 있다고 이리오너라 하고 들어가는데. 안에서 두 내외가 옷을 입고 주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님이 그러잖아요. 지금 당신에게 아들이 하나 들어갔으니까 그 아들은 당신 아들이 아니다 이거죠. 내가 열 달 뒤에 몇 년 뒤에, 열달 뒤에 자식을 놓고 내가 5년 뒤에 아들을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 나 달라고.
그러니까 이 부부는 놀래가지고 왜그러냐 하면은 벌건 대낮에 이상한 짓을 했으니까. 엄청 부끄럽고 미안해서 ‘예’ 해버렸어. 대답을. 그래가지고 나중에 5년 뒤에 가서 데리고 와서 큰 스님으로 만든다는 그런 게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처럼 우리는 그 빛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빛이 지금은 여러분의 사대육신에 머물러 있습니다. 머물러서 이렇게 보는 거예요. 뭐로? 눈의 창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안이비설신이와 오장육부가 가지각종의 업을 지어요. 좀 좋게 생각하고 지으면 좋을 텐데. 자꾸 나쁜 없을 지으면은 나중에 여러분의 빛에 자꾸 그것이 플러스가 되요. 플라스가 되니까 나중에 지나치게 플러스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살아생전에 혼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혼은 있는데 정신이. 요즘 과학적인 용어로 빌리면 에러가 나버린 거예요. 워낙 지나치게 호환이 잘못돼 에러가 나면 뭡니까? 치매 걸리는 거지. 뒤 섞여서 모르는 거예요. 앞인지 뒤인지 잘 모르는 거예요. 이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빛은 끝까지 부처가 될 때까지 잘 보관하셔야 되. 그리고 그 빛에는 많은 좋은 것만 자꾸 보태셔야 되. 그래야 여러분이 나이가 먹든 적든 전혀 관계없이 항상 남에게 존경받고 아름답게 빛나는 그런 모습으로 남지. 안 그러면은 추한모습으로, 좋지 못한 모습으로 만들어 진다 이거죠. 그러면은 밀교의 수행은 뭘 합니까? 그 빛을 살리는 겁니다.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빛을 살리는 게 밀교수행이요.
그 빛은 생명 있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만물. 비록 이 소나무에도 빛이 있습니다. 이것도 생명이 있다 이거죠. 심지어 돌에도 빛이 있습니다. 돌의 생명은 어떤 거겠습니까? 특히 우리나라같이 봄여름가을겨울이 분명한 나라에 있는 돌과, 저 남극이나 겨울밖에 없는 곳의 돌과 적도 지방에 있는 돌하고는 또 틀립니다. 그러니까 지역마다 흙과 돌이 다른 거예요. 흔히 신토불이 다 다른 겁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있는 돌은 기능이 얼마나 발달 돼 있냐 하면은 우리만큼 발달 돼 있어요. 저 적도에 있는 사람은 겨울옷이 필요 없으니까 게으르고. 남극이나 북극에 사는 사람도 여름옷이 필요 없으니까 게으르잖아요.
우리는 봄여름가을겨울이니까 봄옷도 있어야 되겠고, 여름옷도 있어야 되겠고, 겨울 웃도 있어야 되겠고. 그러니까 부지런해지는 겁니다. 왜? 그 네 벌의 옷을 장만하려면 일 년 내내. 적도나 남극 북극에는 한 벌 옷만 장만하면 되요. 우리는 4벌의 옷을 장만해야 되요. 종류가 다른 각각의 4벌의 웃을 장만해야 해요. 그러니까 그만큼 부지런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만큼 부지런한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국가가 어떤 위기에 처했더라도 빨리 회생하는 겁니다. 능력이 있다 이 거죠.
남극이나 북극, 저런데서 만약에 적도에 가까운 더운 나라. 이곳에서 만약에 우리 아이엠에프나 혹은 이런 게 터졌으면요 회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늘 준비성이 강한 민족이에요. 장롱 속에 들어가면 지금 여름인데 겨울 옷 다 넣어놨잖아요. 또 겨울 되면 여름 옷 어느 구석에나 다 넣어 놨잖아요. 절대 안 버리잖아요. 또 해가 바뀌어서 끄집어낼려면 유행 바뀌면 또 바꿔 사 입잖아요. 그러니까 늘 하다보니까 그 만큼 활동이 강해지는 거요. 그렇죠?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 있는 돌도 똑같습니다. 봄을 보내야 되고 여름을 보내야 되고 겨울을 보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 돌도 빛이 있다 이거죠. 자~ 이제 이 돌이 봄이 되면은 어쩔까요? 그 빛의 능력은 돌은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봄이 되면은. 그러니까 봄이 되면은 물을 빨아들이니까 물을 먹으면 돌이 어떻겠어요? 여름에 시원한 겁니다. 돌이 물을 잔뜩 먹고 있기 때문에 그 더운 날 돌에 탁 앉으면 시원해요. 왜? 물이 그 속에 들어 있거든. 그렇다 해서 파내면 물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돌은 돌이에요.
그러고 있다가 여름 가을이 되면 돌이 물을 내뿜습니다. 왜? 돌이 그때도 물을 머금고 있으면 겨울에 얼어 터져버려요. 돌이 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돌도 빛이 있기 때문에 그 빛의 작용이 물을 머금었다가 가지고 있다가 뱉었다가 머금었다가 가지고 있다가, 이걸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돌이 다른 어느 나라 돌보다도 단단해요. 왜? 계속 숙달시키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때요? 돌보다 못하잖아요. 돌은 가을되면 물을 다 뿜고 깨끗해야 되. 왜?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겨울에 물이 얼어가지고 물은 잘 어니까 돌은 깨져버려요.
나무도 그렇잖아요. 나무도 봄에는 물을 잔뜩 빨아들이는 거예요. 가을이 되면 어떻게 되요? 물을 몽땅 내 보내야 되. 만약에 혹 가지나 어디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물을 안 내보냈으면 겨울에 그 가지는 얼어서 봄에 2월 영동 바람에 가지가 부러지는 거요. 참 우리나라 기후가 얼마나 좋은지. 왜? 2월 달 되면 그런 심한 바람이 불까요? 그거 자연의 섭리라. 겨울에 미처 준비를 못한 썩은 나뭇가지들, 그 바람에 다 떨어뜨려버리는 거예요. 그거 쥐고 있으면 안 되니까. 그런다고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그 나뭇가지를 쳐줄 겁니까? 우짤 겁니까? 못해주잖아요. 그게 2월 달에 부는 바람이라. 참 우리나라는 요렇게 다 맞춰 놨어. 자연에.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살기 좋은 곳에 사는 거예요.
우리만 옷 4벌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그런 민족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이 땅에 있는 돌도 나뭇가지도 다 그 작용을 해. 우리만 단단하고 우리만 영악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나무도 대단해 단단하고 영악하고 돌도 단단하고 영악해. 일년내내 자란 나무는 힘이 없어요. 우리는 겨울잠을 잤다가 쉬었다가 나무가 단단해요. 그런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런 작용이 누가 합니까? 빛이 하는 거요.
사람만 빛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나 돌에도 빛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러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곧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게 빛이기 때문에 그래요. 빛의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걸 우리는 알려고 이제 비로자나 부처님을 부르며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빛은 어디 있습니까? 눈에 안보이는 거에요. 어딘가 중심에 있다 이거죠. 앞에 우리 말씀 드렸죠. 우리의 빛은 어디 있습니까?
최후 마지막으로 심장에 있기 때문에 심장이 멈추면 죽은 거다 하지만. 사실 빛이 최후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 심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나오면 혼불되서 나온다 그랬죠. 그게 머물러 있잖아요. 이런 것을 우리들은 알려고 찾으려고 하는데 이제 말씀 드린 데로 빛이 있는 곳이 심장이다. 그래서 그 심장을 우리가 뭐라 합니까? 마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돌도 마음이 있고. 이젠 빛이 자꾸 빛이라 그러니까 혼동하니까 빛을 마음이라고 바꾼 거예요. 빛이라 그러면 이상하니까 그게 이제 마음이라.
소나무도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솔심이 있을 거 아니에요. 돌에도 석심이 있을 거 아니에요. 우리도 마음이 있다 이거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이제 마음을 알려면은 마음은 마음만이 아는 거예요. 다른 건 모릅니다. 부처가 부처를 알아보고 중생이 중생을 알아보고 사기꾼이 사기꾼을 알아보고 도둑놈이 도둑놈을 알아보는 거예요. 착한 사람이 착한 사람을 알아 보는거에요. 그러면 마음은 마음만 알아보는 거에요. 마음만 알아보니까 그 마음으로 해 놓은 말씀이 있을 거 아니에요.
부처님의 말씀가운데에는 8만4천 말씀이 있는데 첫 번째는 이야기식의 말씀이에요. 이야기.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침에 밥 먹었냐? 잠 잘 잤냐? 이야기에요. 오다가 넘어졌다 자빠졌다. 이야기에요. 좀 조심하지. 안 넘어지게. 깨졌다 어쨌다 이야기 식이에요. 부처님말씀이. 그러면서 조심해라, 하지마라. 깨지니까 이렇게 알려주는 거죠. 가르침이죠. 부처님말씀은 간단해요. 얼마나 쉽습니까? 아침 밥먹었다. 예. 잘 먹었다. 못먹었다. 언쳤다. 그러면 좀 조심해라. 가르쳐 주는 거에요. 좀 반찬 좀 잘 만들어 먹지. 이렇게. 얼마나 쉬운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 생활이 좀 높아 지면은 그것을 게송처럼 만들어요. 게송처럼. 게송처럼 만들어 가지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고 근기가 지나니까 뭐합니까? 이제. 본 말을 하는 거예요. 본심의 말을 하는 거예요. 그 본심의 말이 진언이에요. 진언. 참다운 말이다. 이거죠. 그래서 밀교의 수행은 즉 결국은 비로자나 부처님이 말씀한데로 법신이 말씀한 데로 내 빛을 찾기 위해서, 내 마음을 찾기 위해서, 그 마음을 찾으려면 마음만이 마음을 찾을 수 있으니까.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마음을 설명하는게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도 아니고 게송도 아니고 진언이다. 이런 겁니다. 그래 밀교의 수행은 진언수행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진언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고 여러분의 마음이고 모든 보살의 마음이에요. 그게 진언인데 그런 많은 진언 팔만사천종류의 진언이 있습니다만은 그 많은게 다 불보살의 마음이 진언인데 그 중에 특히 딱 꼬집어서 본심진언 하는게 있습니다. 그 본심진언하는 게 뭐있겠습니까? 팔만사천 많은 진언 가운데에 딱 본심진언이라 해 놓은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진언 왕진언 옴마니반메훔입니다. 그게 본심진언이에요. 모든 진언 중에 본심이라는건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 진언인데 그거는 일반적으로 부르는 거고. 그걸 부처님의 진언으로 바꾼 게 뭐냐?
자 그럼 관세음보살은 누구인가? 세상에 소리를 관하는 보살. 그게 관세음 보살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보살. 소리를 관해가지고 소리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성문이라 그래. 성문. 육도를 벗어난 첫 번째 단계가 성문인데. 성문이 뭡니까? (소리 성, 들을 문)이니까 소리로 깨달은 사람. 결국은 소리를 내는 것은 말뿐이잖아요. 말 중에 어떤 말? 진언. 진실한 말. 그게 밀교수행에서는 진실한 말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옴마니반메훔이다. 여기서 깨달으면 성문이 된다. 우리도 진언을 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은 누구의 화신이냐 하면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그래요. 아미타불의 화신이오. 원래 관세음보살 없는 겁니다. 없는데. 앞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부처가 부처를 다스리고 보살이 보살을 다스리는데 부처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어요. 보살만이 중생을 교화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미타불이 법장비구로 있을 때는 교화가 가능하지만은 아미타불이 되고 나서는 교화를 못해요. 그래서 다시 몸을 나투는게 관세음보살이에요. 그것뿐만 아니죠. 많은 부처님들이 보살 몸을 나투는거에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이 보살들이 나와서 중생을 다스리기 지작하는 겁니다. 어쩌면은 2500년 전에 이땅에 온 석가모니불도 우리가 열반하고 나니까 석가모니불 그러지만 결국은 보살이에요. 인간 세상에 있을 동안에 보살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붓다가야에서 성불하고 난 다음에 곧바로 열반에 들려고 했다. 왜? 깨달은 법이 부처의 법이기 때문에 중생이 못 알아듣는다 이 거조.
그 열반에 들려고 했을 때 많은 천신들이 열반을 반대했다 이거죠. 과거의 모든 불도 다 그랬는데 그래도 낮춰서 교화를 했습니다. 그 소리 듣고 삼칠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면서 정에 앉았다가 삼단계 낯춰서 설법한게 지금 팔만사천 경전이에요. 삼단계 낮췄단 말은 즉 부처의 경지를 말한게 아니라 보살의 경지를 이야기 했다는 겁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많은분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했지만 아무도 부처된 사람은 없어요.
아라한이 됬거나 성문이 되었지 누가 부처라고 그럽디까? 가섭이 부처입니까? 아난이 부처입니까? 달마다 부처입니까? 육조가 부처입니까? 부처소리 안해요. 용수도 아니고. 그 이유가 그겁니다. 그 가르침 자체가 보살 경지만 가르쳤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제 밀교의 경지는 그 보살의 경지를 뛰어 넘은 진실한 본심의 가르침인 즉, 진언의 가르침. 즉 진언을 수행해서 이제 때달음을 얻도록 이렇게 하는 게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진언수행을 하는거에요. 그러면 진언은 뭐 하는 겁니까. 마음이 마음을 찾는다 그랬으니까 진언은 본심이라 그랬잖아. 그러면 여러분의 본심을 본심이 불러내는 거예요. 자석끼리 붙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석은 쇠만 붙지 나무토막은 절대 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마음이 진언을 부르므로 인해서 여러분 본심을 불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그 빛의 본심을 다시 비로자나부처님의 진실한 진언으로서 자꾸 부르는 거예요.
계속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부르므로 인해서 비록 나는 옴마니반메훔을 부르지만 그 옴마니반메훔은 법신비로자나부처님의 마음이고, 아축불의 마음이고 보생불 마음 아미타불의 마음, 불공성취불의 마음, 그 다음에 모든 보살의 마음, 다 그 마음과 내 속에 있는 빛의 마음, 내 자신의 마음. 지금은 중생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은 이 중생심으로 되어 있는 것을 불심으로 바꾸는 작업아 진언 수행작업이란 말이오. 여러분 가만 놔 두면은 견물생심하는 중생심으로 변할 거니까.
우리 인간세상은요 선을 짓는 것 보다는 악 짓는 게 더 쉽습니다. 선 짓기는 어려운거에요. 그래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분이 잠자리 일어나자마자 목욕재계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첫 번째 잠자다가 일어나거든 첫마디에 옴마니반메훔. 그러세요. 그거는 바로 나는 이제 비로자나 부처님의 빛의 삶으로 본심의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물론 그 삼일관행할 때 깊이 들어가면은 이제 금강직언하고 결인하고 있습니다 만은 그거는 다음 문제고.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밀교의 수행은 내 자성을 찾는 수행이다. 자성은 곧 내 마음의 빛이다. 빛을 내가 들어내는 건데. 이 빛이 중생의 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이제부터라도 그 빛을 불빛으로 바꾼다. 불빛으로 바꾸는 방법은 불빛을 응용해서 바꿀 수 밖에 없다. 불빛은 곧 비로자나 부처님의 빛이니까. 그 비로자나불의 빛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본심진언이다. 여러분이 부르는 옴마니반메훔은 부처님의 본심진언이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의 자신속에 있는 본심과 하나가 되도록. 일치가 되도록 자꾸 부르다보면은 어떤 일이 생겼어요? 부처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만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도 빛이 있지 않습니까? 삼라만상과 여러분도 일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게 일치가 되기 시작하면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 세상의 운행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운행을 알게 될 때 누가 고통 받는 쪽으로 가겠습니까? 저것이 내 손에 들어오면은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면은 누가 그걸 잡겠어요. 그걸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해서 견물생심하는 쪽으로면 내가 물건을 쥐다보니까 그 물건 속에는 우환과 질병이 들어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은 사실은 그 속에는 엄청난 우환과 질병이 들어있다 이거죠. 그걸 모르니까 정화도 못시키고 그냥 내 것인 양 쓰고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면 안되요.
그러니까 그 시발점이 이제 여러분 잠자리에 딱 일어나거들랑 다 놔두고 첫마디가 옴마니반메훔. 이러시면 됩니다. 이것이 밀교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연습을에 옴마니반메훔을 부른다는 것은 오랫동안 연습이 필요해요. 그 연습을 언제 하냐 하면은 낮에 해요. 낮에. 길을 걸어가면서, 차에 앉아 있으면서 어디가나 뭘 하더라도 늘 속으로 옴마니반메훔을 많이 불러놔야 되. 불러놔야 그 이튿날 아침 새벽에 딱 일어나자마자 옴마니반메훔 이렇게 부를 뿐만 아니라. 누가 건드려도 누가 때려도, 넘어져도 ‘아니고 엄마야’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옴마니반메훔 소리가 나와요. 그럴 때까지 하셔야 되.
다만 이제 그렇게 하는 중에 그것이 다 익어지면은 이제 짧은 시간 안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게 삼일관행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가에 얻기는 어려우니까 그거는 다음에 차차하고 오늘 이 시간에는 요까지. 즉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나서 곧바로 밀교의 수행의 첫 단계인 입으로 부처님의 본심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을 불러야겠다. 그 옴마니반메훔은 관세음보살의 본심진언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보살의 본신 진언이고 여러분의 본심진언이라는 것.
여러분의 본심진언이라는 말과 불보살의 본심진언이라는 말은 결국 부처님의 빛이고 여러분의 빛이라는 거. 여러분의 마음의 빛은 끝까지 부처가 될 때까지 가져간다는 거. 그리고 부처가 되면 더 큰 빛으로 무량광무량수로 나타난다는 것.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이왕이면은 좋은 빛을 만들 수 있도록 일상생활 가운데 항상 좋은 업을 지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밀교 수행 강좌는 이것으로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