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무상정등각을 이룬 싯다르타는
한참 동안 법열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한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비로소 무상정등각을 이루었도다!
깨닫고 나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존이로구나!
그냥 깨달으면 되는 것을 모르고
지금껏 왜곡하고 변형하여 깨달으려 했으니….”
싯다르타의 첫 번째 상념은
지금껏 걸어온 수행의 발자취였습니다.
그것은 사방이 꽉 막힌 번뇌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창살이 없는 섬에 갇히는 꼴이었습니다.
번뇌는 잦아들지만
또 다른 늪에 빠지는 것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깨달음,
그건 그냥 삼라만상 그 자체였습니다.
실존이 아닌 것이 없기에
깨닫고 깨닫지 않고 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실존인데 어디 가서 실존을 찾는단 말인가요.
찾으면 찾을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법이죠.
싯다르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수행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은
그냥 깨닫는 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냥 있지를 못해서입니다.
그들은 무언가에 착이 되어 그냥 있지를 못합니다.
착을 떼어 무애한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무애로 간다지만 실상은 거기서도 또 착에 붙어 버립니다.
싯다르타 자신도 그러지 않았던가요.
가아에서 떨어져 진아에 붙었고,
다시 불이를 가지고 절대에 가서 붙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떼어내고는 끝내 해탈에 가서 또 붙었습니다.
당시 그는 모든 착이 없어졌다고 믿었지만
심연에는 자신도 인지하기 어려운 착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착은 너무나 교묘하여 앞선 세 스승마저 속였습니다.
어느 무엇을 이루려는 마음이 일모라도 있으면
착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아로 가서도 안 됩니다.
무아엔 착도 없지만 깨달음을 인지할 알아차림도 없으니까요.
깨달음의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어느 무엇에도 붙지 않은 상태
일모의 왜곡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외의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재차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다음 화두는
자신이 이룬 경지를 어떻게 수행자들에게 전해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모든 것을 바쳐가며 수행에 매진하는 도반들의 얼굴이 스쳤습니다.
저들에게 자신이 이룬 법을 기꺼이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이룬 것은 법이 없는 법입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건 법이 아니게 됩니다.
왜냐, 언어에는 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방관할 수도 없고
싯다르타의 고심이 깊어가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화두에 잠긴 후 싯다르타는
마침내 가르침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습니다.
자신이 입을 열면
그건 또다시 앞선 세 명의 스승이 했던 가르침을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침묵하며 지내리라 다짐했습니다.
불경에 보면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이 팔정도, 연기, 무아이고
이것이 너무 심오해서 전할 방법이 없다고 나옵니다.
이에 범천왕이 전법할 것을 촉구하고
싯다르타가 이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불교가 나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싯다르타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시다.
얼마 뒤, 싯다르타는 따사로운 햇볕을 쬐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체는 나무토막처럼 굳어 감각이 없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주물러 겨우 피가 통하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감각이 둔한 발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한 발을 떼어 땅에 붙였습니다.
발꿈치에 찌릿한 느낌이 오면서
자신의 발이라는 사실이 인식되었습니다.
다시 한 발을 떼어 조심스럽게 옮겼습니다.
조금 전보다 발의 감각이 더 생생했습니다.
이 순간 싯다르타의 뇌리를 스치는 한 줄기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발은 디딜 때 비로소 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나의 깨달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이 구절은 사실상 팔만대장경 전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의 득도와 중도, 그리고 전법의 원리가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법이 아닌 법을 전하는 법에 대한 그의 화두는 깊어만 갔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먹을 쥔 상태로 태어나서 평생 그대로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에게 주먹을 느껴 보라고 하면 그는 결코 주먹에 대한 감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주먹을 느끼면 되지만
원래부터 쭉 같은 상태로 지내왔기에 그것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원래부터 실존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있지만
그것이 너무 당연하다 보니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자신이 실존이고 깨달음 자체라는 사실을 모르니
생각을 일으켜 왜곡된 허상에 푹 빠져 지낸다.
생각 속에서 중생을 자처하고
생각 속에서 생각을 없애 탈출하려 한다.
생각 속에서 진아를 만들고 절대와 해탈을 그려낸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자신이 이룬 경지를 만끽한다.
이렇게 왜곡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참된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그냥 깨닫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왜곡 없이 바라보면 깨달음이 열린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에 구조적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손가락을 폈다 다시 쥐면 주먹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의 실존에 왜곡을 주어야 한다.
다만 왜곡을 잘못 주면
그것이 정도인 줄 알고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 있으니
꼭 필요한 것들만 추려서 해야 한다.
손가락을 모두 펴는 대신 엄지손가락만 올렸다 내리면
주먹의 감각을 찾는 데 충분하다.
엄지손가락 정도의 변화
이것이 내가 언어로써 전해줄 불법이 될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펴지면서 불법은 생하고
엄지손가락이 접히면서 불법은 멸한다.
엄지손가락이 제자리로 돌아옴으로써 주먹을 느끼는 것처럼
불법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목도하게 되리라.
이제부터 나의 모든 법은 생과 멸을 반복하며
수행자들의 무명을 흔들어 깨우리라.
싯다르타는 드디어 법이 없는 법을 전하는 법을 찾아냈고
이것이 이름하여 불법입니다.
불법에 의해 불교는 태동했지만
아쉽게도 그 불법은
세존의 입멸과 더불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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