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즉문즉설] 제27회 28살 딸과 자꾸 다툽니다.

Buddhastudy 2012. 10. 12. 04:36
출처 YouTube

 

늦게 들어오고 다음에 이것저것 옷 있는데 또 사고 이러죠. 그러니까 정토회에서 가르침은 우선 집에서 누구만 해라? 나만 해라. 내가 안 사고, 내가 우선 밥 안 버리고, 내가 물 아껴 쓰고, 우선 나부터 하세요. 이거 배웠다고 가가지고 우리 스님이 말하는데 너 이렇게 버리면 이렇게 해가지고 밥도 버리지 마라. 남기지 마라, 옷도 사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이러면 그 사람은 이게 뭐 정토가 뭔지 정토 소리만 들어도 싫어합니다. 법륜스님 자만 나와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선 자기가 열심히 해야 돼. 자기가. 그러고 그 내가 하는 것이 좋아 보여서 엄마, 나도 한번 가볼까? 나도 한번 해볼까?” 이렇게 상대가 묻고 따라올 때만 하세요. 강요하지 말고. 내가 좋지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남편이든 아내든 자식이든 부모든. 그래서 지금 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부딪히는 거는 이게 어릴 때 다 영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시어머니한테 꼭 말대꾸를 했다. 남편한테 내가 꼭 말대꾸를 했다. 그럼 어린아이들이 어릴 때 보고 배우잖아. 그죠?

 

그러니까 자기도 고대로 엄마한테 말대꾸하는 거요. 그래서 내가 너 이놈의 자식 왜 말대꾸하느냐?” “너가 왜 엄마한테 덤비느냐?” “엄마 말 안 듣느냐?” 이러면 겉으로는 말하는데, 속으로는 뭐라고 그런다? ‘엄마도 아빠한테 그러데.’ ‘엄마도 할머니한테 그러데.’ 이게 다 속에 있습니다. 우선 말하면 아이고 니나 잘해라.” 이런 마음이 늘 가슴속에 있는 거요. 그래서 그게 효과가 안 납니다. 말을 해봐야. 그러니까 벌써 애가 말을 안 들으면 ~ 이게 나한테 문제가 있구나.’ 이렇게 봐야 돼. ‘얘가 문제가 있구나’. 이래 보지 말고.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는 객관적으로 내가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니오. 누가 보기에? 얘가 보기에. 얘가 보기에 내가 문제가 있다고 자기한테 보이는 거요. 그러니까 말을 안 듣는 거요. 그러면 얘가 보기에 라는 것은 그 아이의 업식 체계, 그 아이의 인식체계 하에서는 변명거리가 있다. 이런 얘기요. 변명거리가 있다. 전에 제가 절에 학생들을 데리고 몇 기 같이 살았단 말이오. 키웠단 말이오. 쉽게 얘기하면. 그런데 얘들이 어느 날, 초파일 날 참여도 안 하고 도서관에 가버린 거요.

 

그래서 내가 불러다 야단을 쳤어요. 신도들은 멀리 살다가도 초파일 절에 오는데. 너는 절에 사는 놈이 초파일 날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내일 시험 쳐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요. 내일 시험 친다고 하더라도. 그럼 초파일 날, 다음날 시험 치는지 이제 알았느냐? 그러니까 미리 공부를 하고 초파일 날은 절에서 보내야 되지 않느냐? 신도들이 부처님을 존경해서 보시를 하고 그걸 갖고 니가 절에서 먹고 사는데 너는 그걸 갖고 먹고 살면서 너는 초파일 날 니 볼일이나 보러 가면, 다른 사람은 멀리서 부처님을 흠모하고 부처님을 위해서 보시도 하는데, 니는 그 돈을 갖고 먹고 살면서 니 공부에 바쁘고 부처님 생각도 안 하고 하면 이거는 상식적으로 맞지가 않다.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 가지고 이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딱 세워가지고 벌을 줬단 말이오. 그런데 저항을 하는 거요. 처음에. “시험 치는데 어떻게 하라고요.” 이런 식으로. 그런데 부모가 이런 경우에 야단을 못 치는 게. 학교 성적을 더 중요시하니 그렇죠. 스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기본적으로 예의가 없는 거에 속한다. 이 예의가 없으면 니가 아무리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그건 공부가 아니라는 거요. 절에 살기 때문에 있으라는 게 아니다. 이건 인간으로서 예의가 없는 거에 속한다.

 

그런데 그 변명 중에 뭐라고 그러냐? “형님도 언제 보니 예불 안 하던데요.” “누구도 뭐 어떻든 데요.” 저항할만한 이유가 있는 거요. 으음. 절에 들어와 있는 선배들이 절에 들어와 있는 실무자들이 자기가 이래 보니까 살살살 빼먹고 뭐 하는 거 봤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마음속이 어떠냐? 자기도 핑겟거리가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항변하거든요. 그럼 그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돼요. 안 고쳐져요. 그래서 절에 살기 때문에 절에 습관이 들어서 절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절에 살기 때문에 요런 걸로 갖고 핑계를 대고 절을 거부하는 게 있단 말이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절에 살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거로 인해서 오히려 불교에 대한 굉장한 저항감을 갖는 경우가 있고, 오히려 절에 살았기 때문에 절에 추억을 가지고 절에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경우. 사람은 늘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부모가 싸웠기 때문에 거기 물들어서 나중에 자기도 결혼하면 부부가 싸우는 사람이 있고, 그것에 대한 저항감으로 자기는 안 싸우는 사람이 있고, 반응은 늘 이렇게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같은 집에서 자라도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나는 거요. 그래서 제가 절에서 아이들을 키워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을 수가 있는 거요. 절에 사는 사람들이 다 모든 것들이 계율이나 모든 행위에 완벽하면 어때요? 아이들은 긍정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변명거리가 없어지게 돼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변명거리가 생기면 그걸 핑계 삼고 자기 욕구를 불러일으킨단 말이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애들이 절에 살겠다. 추천이 많이 들어와도 안 받죠. 으음.

 

기본적으로 고등학교까지는 성장해서 그다음에 불법에 대해서 너 자신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이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절밥을 먹고 자라가지고 절에 저항하는 사람을 까딱 잘못하면 만들 수가 있다. 그런 데서 아이가 저항을 할 때는 그만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이해를 충분히 하든지 이해가 못하면 시비를 하지 말든지. 내버려 두세요. 내기도 하고, 스님 말 듣고 한번 나둬 보세요.

 

그러고 또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20세 이상은 일찍 들어오든, 늦게 들어오든, 연애를 하든, 자기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런데 이건 지나친 간섭이오. 인생의 간섭이오. 그러니까 좀 엄격해야 되거든요. 간섭도 하지 말고 뭐다? 도와도 주지 마라.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도와주고 간섭하고 이러지 말고, 도와주면 의지심이 생기고, 간섭하고 불만이 생겨요. 도와도 주지 말고 자립하도록 하되 간섭도 하지 마라.

 

그래서 원칙을 정하는 게 필요하죠. 그러면 너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해서 집을 하숙집처럼 생각하면 숫제 하숙비를 얼마를 내라. 한 달에 50만 원씩 내라. 그러면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하숙집에도 또 규칙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 지켜라. 그런데 엄마아빠 집에 네가 스무 살 넘었으니까 독립을 해야 되는데, 여기 적어도 공짜로 밥 먹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엄마도 아빠도 간섭할 권리가 있다. 그걸 서로 타협을 해야 돼.

 

그래서 내 말을 안 들으면 지원을 딱 끊어버리고. 또 내가 지원을 해준 거에 대해 정당한 타협을 해서 어느 정도의 그런 권한을 갖든지. 그런데 우리는 이거 막무가내잖아요. 그러니까 인격으로 존중하고 대화를 해라. 이 말이오. 그저 내 자식이다. 이래만 생각하지 말고. 아무리 내가 낳아서 키워도 20살이 넘으면 뭐다? 독립된 인격체요. 그가 싫으면 안 할 자유가 있어요. 그걸 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고 있는 아직도 내 업식으로 어릴 때 품에 안고 키웠던 그 습관 그 까르마대로 간섭하고 하는 이거에 대한 오히려 참회를 하고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하고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