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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9) 절두산 순교성지... 아름다운 잠두봉이 비극의 절두산으로

Buddhastudy 2022. 7. 6. 19:27

 

 

한강 둔치에서 바라본 절두산, 잠두봉의 풍경입니다.

 

현재 연세대의 뒷산인 안산(무악산 295m)

남쪽으로는 와우산(102m)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진다.

안산에서 와우산으로 이어진 산자락은

한강변에서 둥근 모양의 봉우리로 솟은 후 한강으로 이어진다.

30m 높이의 둥근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으로 불렸다.

 

잠두봉이 위치한 한강변은 양화진이다.

양화나루터는 삼남지방의 곡식과 산물이 집결되는 한강의 중요 나루터 가운데 하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양성의 방어를 위해

군사가 주둔하는 양화진이 설치됐다.

서해로부터 한강에 집입하는 적들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잠두봉 일대는 조선시대 사형장의 한 곳이었다.

태종16(1416)

예조에서 아뢰기를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미편합니다.

서소문 밖 성밑 10리 양천 지방, 예전 공암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 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기록이다.

그 후 여러 사형장이 설치됐는데 모두 도성 밖 서쪽이었다.

 

도성 남쪽인 현재 이촌동 지역인 용산 백사장에 위치한 조선군 연무장인 새남터도

사형장으로 쓰기도 했는데

이곳에서는 국가반역죄 죄수를 군무효수한 곳이다.

사육신과 홍경래 등이 새남터에서 처형됐으며

주문모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서 처형된 후, 새 남터는 가톨릭신자들의 주된 처형장이 됐다.

 

1866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라는 비극적 사건 이후

가톨릭신자 대부분은 잠두봉에서 처형당한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초 천주교 금압령을 발포

국내에서 몰래 선교하던 프랑스 신부 12명 가운데 9명을 처형하고

수천 명의 가톨릭신자를 처형했다.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살아남은 프랑스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

중국에 주둔 중인 프랑스함대에 구원을 요청하여

로즈사령관이 지휘하는 프랑스함대가 조선을 침공했다.

프랑스함대 3척이 9.18~ 10.1 양화진까지 올라와서 정찰활동을 벌인 후

10월 초순 한강하구를 봉쇄한 채, 1016일 강화도를 통째 점령했다.

 

프랑스 함대는 1110

철군할 때까지 쇄국정책을 펴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시대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프랑스함대의 한강봉쇄로 가을걷이 후 한양성으로 향하던 삼남의 곡식들의 배를 통한 운송

, 조운이 막혀 한양의 경제상황이 매우 피폐해졌다.

 

프랑스함대 철군 이후 흥선대원군은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을 이어나갔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을 프랑스군까지 끌어들인 매국노들로 규정하려고

프랑스함대가 침입해 온 양화진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잠두봉에서의 가톨릭신자 처형은

흥선대원군이 취약한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였던 셈이다.

 

18661023일부터 1867730일까지 양화진 잠두봉은

1만 명에 가까운 가톨릭신자들이 참수를 당하며

절두산이라는 비극적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던 1967년 이곳에 성당과 박물관이 세워졌으며

19845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절두산을 방문한 바 있다.

 

절두산 절벽 끝에 자리 잡은 성당은

사다리꼴 평면에 원형의 지붕을 얹은 100여 석의 규모다.

원형 지붕은 선비의 갓을 표현했다.

종탑은 천주교인들을 참수할 때 쓰던 칼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한강의 아름다움을 내려다보며 삶의 고단함을 달래던 잠두봉이

19세기 말까지 성리학을 고집한 조선의 쇄국정책에 따른 비국의 현장이 된 곳

절두산이다.

 

잠두봉 절두산을 한강 둔치에서 바라본 모습을 담은 스케치

윤희철 대진대 건축과 교수작품

 

 

#한강걷기 코스: 합정역 절두산성지- 한강둔치- 새남터성지

합정역(2, 6호선)에서 10분만 걸어가면

절두산 성지에 도착한다.

성당과 기념관 등을 둘러본 후 한강둔치 길로 진입하여

한강철교 북단의 새남터 성지까지 6km 걷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