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우리가 몰랐던 '미래사회 불교'의 청사진!

Buddhastudy 2022. 7. 13. 18:49

 

 

 

인류의 정신문명은 두 차례에 걸쳐 혁신적인 발달을 이루게 됩니다.

샤머니즘으로 팽배했던 고대사회에 이 등장하면서 종교로 거듭날 때가 그 첫 번째입니다.

그런데 고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종교들은 대체로 원시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주의유일신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획일적 사상에 물들어 있던 인류는 또 한 번의 도약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선민주의를 부숴 인류 보편의 사상 체계로 바꾸면서 비롯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예수와 마호메트입니다.

 

이들에 의해 구약의 원시사상은 일정 부분 희석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일신 신앙의 유물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크고 작은 분란을 끊임없이 야기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따라서 현재의 인류가 또 한 차례 정신적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어떡하든 유일신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떨까요?

 

불교는 시작부터 선민사상이나 유일신 신앙같은 건 터럭만큼도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범신론 같은 것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의 포인트는 오로지 인간 하나 하나의 완성입니다.

 

그렇기에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업그레이드할 부분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세상은 바뀌어도 佛法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진리가 변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불교가 널리 퍼지면

현재 인류의 정신문명이 한 단계 더 높게 진보하게 될까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온전히 되살리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의 불교는

힌두교 사상으로 도배가 되어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대저 정신문명이란

인류의 보편적 이성 수준이 올라가야 진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성을 마비시키는 핵심적 두 가지 요소에 걸려 정체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체험믿음입니다.

형이상적 진리를 탐구할 때 체험믿음만큼 위험한 독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체험하면 안다믿으면 안다는 상통합니다.

 

이 말을 따르면 이성은 더 이상 활동할 공간이 없어집니다.

이때부터 주관의 늪에 빠져 영적 성장은 시계추처럼 멈추고 맙니다.

 

믿으면 안다는 명제는 잘 알다시피 일반적인 종교의 대강령입니다.

그리고 체험하면 안다는 불교를 비롯한 수행 종교의 변치 않는 원칙입니다.

결국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고 있는 모든 종교가

체험믿음을 기치로 올림으로써

이성의 발달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정신문명이 도약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 물질문명에 비해 정신문명이 크게 뒤떨어진다는 걱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수행자의 체험타령과 종교인의 믿음타령만 종식하면 됩니다.

이 두 가지 타령만 입에서 나오지 않으면

지구상의 인류는 한 차원 더 높은 정신문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불교의 체험타령부터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도대체 언제까지 체험에 숨어서 선지식인 척 연기하고

법통이나 인가로 유치한 장난을 하실 건가요?

 

물론 오랜 세월 동안 불교를 지탱하기 위해

선지식의 가면과 법맥의 권위가 필요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학문명이 훌쩍 성장한 오늘의 시점엔 그런 장난을 멈출 때도 되지 않았나요?

 

사실 체험1원인의 화두를 푸는 수단으로 쓰면 상관없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깨우치는 하나의 과정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행자치고 진리를 깨닫고 싶어 하는 분은

문헌상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들은

아느냐, 모르느냐의 진리적 영역을 철저히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로지 체험만이 진리라고 맹신하고 있고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입에 달고 살게 됩니다.

 

이는 결국 진리를 모른다는 자백이고

그렇다 보니 몰라’, ‘오직 모를 뿐등을 포장지로 가져다 쓰기에 급급한 현실입니다.

 

원석을 예로 들면, 이것을 갈고 닦을 때 그 가치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원석과 같습니다.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켜 빛을 내는 것이 깨달음이고요.

그런데 생각을 아예 없애려 한다면 이는 원석을 망치로 때려 부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을 옴짝달싹못하게 붙들어 매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원석이 있는데 이것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그냥 방치하는 꼴이지요.

그렇기에 신앙이나 체험은 모두 원석의 가치를 살려내지 못하게 됩니다.

 

생각은 원석처럼 갈고 닦아야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류 문명이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려면 형이상적 진리에 대한 의심과 의문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대간인 간화선이 여타 수행보다 뛰어난 이유입니다.

다만 불필요한 공안(公案)을 삼가고 1원인을 이성적으로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수행자들의 체험타령과 종교인들의 신앙타령만 버린다면

인류의 정신문명은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인류는

가히 영성인류(靈性人類)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단예소피아는 불교가 그런 인류를 이끄는 지남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