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당신이 몰랐던 '불교 보살도'의 거짓과 진실!

Buddhastudy 2022. 7. 7. 19:39

 

 

 

보살도의 실체, 최초공개!

당신이 몰랐던 보살도의 거짓과 진실

 

대승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입니다.

위로는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려 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해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저만 홀로 깨달으려는 것보다

중생의 고통을 안고 수행해 나가는 편이 정도라는 얘기이지요.

 

이처럼 초기불교의 상구보리(上求菩提)에다가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첨가됨으로써

대승불교가 출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정신은 보살도(菩薩道)라는 단어에 함축됩니다.

 

이제 대승불교는 중생구제를 위한 각종 보살들이 앞 다투어 출현하게 되고

이들이 붓다와 어우러지면서 활짝 만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보살도란 것이 무엇일까요?

보살의 정신을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합니다.

이를 더 쉽게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그럼 사랑은 또 무얼까요?

사랑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정 호르몬의 화학적 성분이 종족 보존을 위해 일으키는 이성 간의 애틋한 감정입니다.

두 번째는 '''나처럼 생각하는 동질의 전체의식입니다.

 

그렇다면 보살도는 두 번째 '사랑'의 정의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나처럼 생각하면 기꺼이 도와주고 어떤 희생도 감수하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남을 돕는 것이 곧 ''의 일이니까요.

 

이는 나와 남이 같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것이 어떻게 수행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수행이 되지 않는다면 보살도는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의 '사랑'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보살도의 사랑은 어찌되었든 수행과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살도를 어떻게 닦아야 깨달음으로 연결될까요?

진심을 다해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헌신하면 될까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량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과연 마음 저변에서 우러나올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이 둘이 아닐 수 있을까요?

족보를 따져 들어가면 혈통이 비슷해서 하나인가요?

아니면 생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생명에서 분화되었기에 하나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같은 별 부스러기 입자들로 구성되어서 하나인가요?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남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원료가 같다고 해서 하나가 되는 건 아닙니다.

같은 밀가루로 빚은 빵과 국수가 엄연히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재료는 같지만 현재의 모습은 무수한 변화를 거쳐 제각기 다른 모습, 다른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보살도의 사랑은 무얼까요?

보살도의 사랑을 나와 남의 연결에서 풀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건 어떡하든 제1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보살도가 구태여 필요 없게 됩니다.

1원인 자체를 화두로 잡아 궁구하면 되니까요.

따라서 보살도는 제1원인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닌, 1원인이 지닌 창조의 속성으로 풀어야 합니다.

 

1원인은 자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을 굽어보면서 보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1원인에 따라 가 움직여 '을 빚어 만물을 펼쳐놓은 것이니까요.

 

그럼 여기서 '보기에 좋다'는 의미가 무얼까요?

도대체 뭐가 보기 좋은 것일까요?

그건 무한대로 쪼개진 개체들이 저마다의 가치를 내며 존재 의미를 갖게 되는 걸 말합니다.

이것을 한자로 축약하면 용화(用化)입니다.

이렇게 用化가 되면 보람과 가치, 행복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제1원인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그럼 이제 보살도의 답이 나왔습니다.

보살도는 '1원인의 창조성을 세상과 공유하는 것이 됩니다.

1원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 허다하겠지요.

이때 그것을 불쌍하고 가엽고 측은한 감정으로 풀어내면 안 됩니다.

보살도는 철저히 관으로 가야 합니다.

 

'보기에 썩 좋지 않구나!'가 뇌리에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보기에 좋게 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고차원적 대자대비 (大慈大悲)입니다.

창조의 목적인 用化를 잣대로 중생들을 굽어보는 관찰자의 마음인 것이지요.

 

이렇게 보살도 자체가 창조주의 마음이니

이 마음으로만 정진하면 수행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중생구제가 곧 수행이 되는 겁니다.

 

하화중생(下化衆生)과 상구보리(上求菩提)가 둘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불쌍하다는 감정 위주로 일관한다면

그건 그냥 세속의 일반적인 '사랑'에 불과하게 됩니다.

 

대저 수행의 출발은 我相을 약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我相은 너무나 교묘해서 웬만해선 줄어들지 않습니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我相과 직접 샅바를 잡는 것보다는

我相'1원인의 창조성과 결부시키는 편이 좋습니다.

 

'1 원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보살도이고 세존이 세상에 남긴 위빠사나의 원형입니다.

 

요컨대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1 원인을 증명하는 영역이고

두 번째는 제1원인을 닮아가는 실천의 영역입니다.

 

후자가 바로 보살도이며

보살도의 한 방편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불교가 위대한 까닭은 바로 의 영역이라는 제1원인을

인간의 이성으로 끌어내리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실제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불교의 보살도가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사랑으로만 알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