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대행스님 법문

대행 스님 법문_ 잘났든 못났든 나를 먼저 믿어야

Buddhastudy 2022. 10. 17. 19:50

 

 

 

우리가 공부하는 도리는

시공도 없고 공간도 없고 모든 게 다 없지만

우리 사람들이 살려니까

시간도 만들어 놓고, 또 일 년, 해우년도 만들어 놓고

몇 해니 몇 해니 하고 나가는데

그거를 질서를 지키기 이전에 그냥 순서대로 살아나가기 위해서 방편으로

여러분들이 해놓고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편 더 생각해 볼 때는

이 마음이 아니라면 몸이 움죽거리지 않는다는 거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고

자기의 그 마음의 영혼이 빠지면 송장이 된다는 것도 잘 아실 거고.

 

그러니까 옛날에 부처님께서도 그랬고, 역대 조사들도 그랬습니다.

공부할 때, 이 들이고 내는 구멍은 한 구멍이다.

자기가 여기 있으면 부처도 여기 있는 것이고

바깥에 나가면 바깥에 나가는 대로 자기가 있는 자리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변소엘 가면 변소에 있는 것이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데 들이고 내는 자리도 한 구멍인데

그 들이고 내는 자리, 통하는 자리가

바로 거기를 지금 닫힌 문을 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거기다 집중하고 생활을 하는데

어디에다 눈 코 뜰 새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조사들도 그랬고, 역대 부처님들도 그랬습니다.

내 들이고 내는 구멍이 아니라면

천지를 다 준다 해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저기 계신데 안 가려느냐 해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몸이 움죽거리지 않고 마음도 움죽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대 조사들이 됐고 역대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이차적으로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라.” 이랬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을 움죽거리지 않게 하는

그런 도리의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한데 합쳐라.

너로 하여금, 너로 만들어라 이런 소리죠.

 

마음은 체가 없어서

수억만이라도, 억만 개라도

한데 갖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좋다는 데 있으면 이리로 뛰어가고

저기 좋다는 데 있으면 저리로 뛰어가고

그러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벌써 마음이 한 고장에 집중된 게 아니라

들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한 구절, 얘기해 볼까요?

부처님이 굴에 들어가실 때

거기 독사가 나와서 사람을 다 잡아먹으니깐 거기 들어가지 마십시오.”

했단 말입니다.

생략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는

고행하실 때에 사과 하나를 들고 들어가셨습니다.

그 사과는 무엇을 뜻을 둔 거냐?

이거는 공한 것을 말합니다.

둘이 아님을 말한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나는 들어가도 괜찮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한테 보여줬건만

모든 사람들은 그거를 사과로 본 것뿐입니다.

뜻을 보지 않고 사과로 봤던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해명을 하는데

나는 내 몸이 살아야 모든 중생들을 건질테니까

너를 내 몸을 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거나 먹어라.’ 하고 줬다고 거기다가 기록을 해놨습니다.

 

그런데 그 사과는

그리로 준 것도 아니고, 내가 먹은 것도 아닙니다.

 

그 뱀도 부처도, 들어가신 그분이나 모든 게

동일하게 하나가 돼버렸으니까

사과는 방편으로 들고 들어갔던 것이지

사과를 대신 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무사히 그냥 들어가셔서 편안히, 나타났던 그 뱀이 일심으로 화한 거죠.

기다랗게 놓으면 한 일()이요

동그랗게 뭉치면 원심이요

이게 머리를 하나 들었으면 한마음의 한 상투라고 해도 되죠.

심봉이라고 해도 되고.

 

그러니 어찌 둘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냥 계시다 그냥 나왔지마는

벌써 한마음으로 동일하게 됐던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모습을

잡아먹을 수가 없는 거죠. 물 수가 없죠.

그러니 뜻이

얼마나 광대하고 무변하고 묘한 도리입니까.

 

이 기묘한 도리를 여러분들이 아시려면

그저 길에 오다가다도 알고 듣고 배우고 하시려면

육조 스님처럼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면서도

10여 년을 넘게 면벽을 하고 다니셨다는 거.

면벽이라는 건

앉아서만이 있는 게 면벽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하게 움죽거리지 않을 때에 면벽입니다.

 

그랬으니 다니시면서도

행선이 되고, 와선이 되고, 입선이 되고, 좌선이 된 것이죠.

 

모두가 우리가 공부할 때에

한눈 팔지 말라.’ 이랬던 뜻이 뭐냐?

 

이 마음을 움죽거리게 하지 말라

이 마음을 움죽거리게 하면

네 몸이 좋다는 데 있으면 다 따라다닐 것이다.ㅎㅎ

못났든 잘났든 약하든 건강하든

내 몸밖에 좋은 게 어딨습니까?

내 집밖에 좋은 게 어딨습니까?

 

어디 나가셨다가도 내 집에 들어오시면 편안하시죠?

그런 거와 같이 내 몸이라는 이 집

내 집밖에는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산더미처럼 좋은 게 있다고 하면

불끈 그냥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거기만 보고선 그냥 간단 말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좌를 할 때에

여기 움죽거리지 않는 믿음이 있다면

천리만리 좋은 게 있다고 하더라도 들리면

그냥 한꺼번에 여기에다가 동일하게 일임하면 됩니다.

 

그런 건데 몸뚱이까지도 딸려가는 것은

벌써 그건 몸, 마음이 움죽거린다는 뜻입니다.

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러니 놀랍게도 뚫을 것도 없는 것을 뚫는 게

문 없는 문을 찾으려고 애쓸 때

만법이 들고 나는 그 자리

그 자리를 이 마음 하나 돌리면

그게 쉬 뚫릴 텐데

자꾸 유혹을 해서

그 모든 자신들 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유혹을 해서

자꾸 이렇게 마음을 들뜨게 만든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거를 제하고, 막론하고 모든 거

바깥에서 천지를 다 준다, 여기 역대 부처님이 다 몰려 계시다

이러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다 되신 겁니다.

 

이렇게 좋다고 그래서 들떠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머리로 배우고, 말로 배우고

이래서 그냥 머리로다가 말을 하고서 다니니

무슨 뜻이, 오고 가는 사이 없이 뜻이 가고 옵니까?

 

우리가 그냥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역대 조사들과 더불어

하다못해 유마힐까지도 거기에 제불이니까.

 

이 모든 일체제불이

다 마음이 오고 가는 사이 없이

여러분들에 화해서 나투시면서 응해 주시는

그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찰나찰나 응하고 돌아듭니다.

 

그런 거를 영 여러분들이 모르시고

그냥 들떠서 저거하면

그런 것도 없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내 모습을 보고 믿고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이 부처님의 뜻, 가르친 뜻과 진리의 뜻과 우리의 사는 방법의 뜻과

삼합이 똑같으니까

우리가 따르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고깃덩어리야

잠시 있다가 한철 살다가

한철 없어지고서

다시 모습을 해서 다시 나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서 다시 나오느냐의 미래는

지금 현재의 하는 데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이런 소리가 있죠.

눈먼 거북이가

천년을 물속에서 있다가

한번 세상을 보려고 나오니까

나오는 그 사이에 뗏목이, 구멍 뚫린 뗏목이 하나 턱

그 시간에

눈도 뜨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시간에 딱 맞춰서 그 뗏목이 떠내려오겠습니까?

눈먼 거북이가 물속에서 뚝 올라오는 그 시간에 말입니다.

 

그것이 천년을, 눈먼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그렇게 다스리고

앙금을 먹고 그렇게 지냈기 때문에

그게 온 겁니다.

 

그래서 그 거북이의 모습을 벗고

아라한이 되고 부처가 됐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혼자만이 공부할 수는 없는 거지만

혼자만의, 자기의 그 구멍을 뚫지 않으면

자기 역대의,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되고 형성된 그 자기가 바로,

그것을 자기가 자기를 뚫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밝게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장님이고, 한 발 못 딛는 병신이고

그렇다는 얘기죠.

왜냐?

하나는 보이지 않는 데를 못 보니까 장님이요, 눈 애꾸요,

하나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데 있어야 할 텐데 있지 못하니까 한 발 병신이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눈 애꾸나 한 다리 병신이 안 되려면

그만큼 자기가 못났든 잘났든.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예전에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본 예가 있거든요.

 

못났든지 잘났든지, 아무리 잘난 관세음보살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잘난 부처님이 나를 그렇게 이끌어 준다고 바깥에서 하더라도

나는, 못난 내 어머니만 못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못났더라도 나를 먼저 알아야

그 잘난 분들을 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알아야 되겠기에

모두 여러분들한테

나부터 알고 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나를 버리고

저쪽에 마음을 두고, 믿고,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덩달아 따라서 남 하는 대로 이렇게 하지 마시고

자기가 그 요량, 지혜, 뚫어져서

자기가 요랑껏 발전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요렇게 하셨으니까

나도 요렇게 해야겠다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세상에 따라서, 세상들 살아나가는 차원에 따라서

우리는 자꾸자꾸 바뀌어서

이게 행동과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여기 좋다고 해서 저기로 마음이 뜨지 말고

저기 좋다고 그래서 저기 마음이 뜨지 말고

내가 섰는 자리에 바로 내 자리라고 생각하고

내 몸을 내 집이라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그 들이고 내는 그 한 구멍이

바로 문이 열린다 이 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