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오늘을 잡아놓고
오늘 질문을 할 것을 공부하는 데 질문
또 자기가 공부하면서 체험
이런 거를 서로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오늘부터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자에는 그냥 설법을 그냥 했는데
너무 여러분들하고 나하고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것 같애서요
오늘서부터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뭐이 그렇게 힘듭니까?
보세요.
싹은 무조건 자기 뿌리에 의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싹이 말입니다. 한 줄기가,
'아이고 힘들어, 아이고 힘들어!' 이런다면
그 뿌리는 뭐라고 할까요?
뿌리로만이 성립이 되고 싹은,
뿌리가 썩질 않아야 만이 싹도 싱싱하게 푸르르게 살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괜히 뿌리를 놔두고도, 그 능력 가진 뿌리를 놔두고도
그 싹은 이파리 하나하나가 바람에 날리면
'아이고, 이거 바람에 또 날리는구나!' 이렇게 걱정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뭐이 힘이 듭니까?
모든 것은, 이 몸 안에 말입니다.
그 이파리가 많듯이 몸 안에 생명체들이 많습니다.
많은데, 그 몸 안의 생명체들이
제가끔 댁의 마음을 통해서 나오는 거지
그 마음의 선장 뿌리한테다 모든 거를 맡겨놓으면
자동적으로 거기서만이 다스릴 수가 있는 거지
댁의 이론으로, 말로, 아무리 공론을 해도
그것은 다스릴 수가 없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의식들은
바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 다스려야 다스려지는 거지
내가 지금 현재 보이는 이 육안
또는 그냥 이론적인 말로 아무리 발버둥이쳐도
그거는 통신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고 다스릴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이 모든 생명들의 의식이
전자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아주 정확하게 입력이 됐기 때문에 정확하게 나옵니다.
그런 거를 마음의 선장한테다가 일임하면
마음의 선장만이 그걸 다스릴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의 선장은 누구고 나는 누구냐?' 이런다면
나는 그 마음의 선장을 위로는 모시고
아래로는 모든 생명들의 의식을, 지금 생명들을 아래로는 다 거느리고 이러고 사는
집합소며 심부름꾼이며 관리인이다.
생각해보세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모두가 공생(共生)이면서
댁의 몸뚱이에서 하나라도 생명이 튀어져 나와서 따로 삽니까?
따로 살지 않죠?
댁의 몸속에서 다 같이 살죠?
그렇다면 공생이죠?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거 먹을 때, 어떤 거 볼 때, 어떤 거 할 때, 어떤 거 들을 때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산다고 하며, 나 혼자만이 대변을 누었다고 하며
나 혼자만이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생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주인공이다 이겁니다.
모든 거를 합해서 다스리면서 돌아가는 이 주인공 자체가
바로 여러분들의 뿌리라고 일컬어 이름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만 믿고 거기다가 맡기면
다 거기서 다스려서 해줄 텐데
왜 그렇게 관리인 심부름꾼이 그렇게 참섭을 합니까?
일종의 종과 같은 건데
서로가, 서로가 공생이고 공용이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 즉 말하자면 소임을 맡아서 제가끔 하는 겁니다, 지금.
같이 말입니다.
하나가 빠져도, 나사가 하나가 빠져도 기계가 돌아가지 않듯이,
지금 공용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이 내가 산다고 할 수도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당신 혼자 발버둥이를 치고 애쓸 필요 없다 이 소리예요.
'거기서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해결해라.' 하고
일임해버려라 이거예요.
또 한 가지는
'한마음 속에서 안 되게 한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되게 해서 네 몸을 건장하게 끌고 가야지 않아?' 하고 전부….
나는 없어요, 나 혼자가 없어요. 공(空)했단 말입니다, 모두가.
'공(空)이 색(色)이요, 색(色)이 공(空)이니라.
모두가 공해서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느니라.' 이랬어요.
그러니 답답하다,
답답한 거는 그 자리에서 안 나온 겁니까?
시원한 거는 그 자리에서 안 나옵니까?
그러니 시원한 거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답답한 거는 답답한 것도 그 자리에서 나온 거니까
'답답하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내던지면 될 거를
왜 그렇게 붙들고 늘어지는 확률이 높습니까?
그래서 여기에서는
'경을 보지 마라.' 이러는 것은
다 이 자리를 잡고 내가 나를 발견한 뒤에 경을 봐라
이 소립니다.
그래야 이게 흔들리질 않지,
요게 틀리고. 요게 옳고. 요게 그르고 이걸 따지다보면
이 공부는 천년 백년이 가도 못합니다.
이건 글을 읽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이론으로 말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서 의논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그냥 때에 따라서 오는 것대로 막지 말고
가는 거 잡지도 말고
그대로 그대로 바깥에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안에서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대치하고 나가는 겁니다.
이 마음의 자리를 완전히 잡고
내가 심안의 소리를 듣고
심안의 소리가 뜻으로 나오고
이렇게 모든 게 활용이 됐을 때
그때에 완전히 인제 경을 보면
“아, 이게 이거구나! 아, 이것은 이거구나!” 이렇게 나오는 거지,
만약에 그렇지 않고 유발이 되면
“아이고, 이것도 옳은 것 같고, 이것도 옳은 것 같고, 이것도 옳은 것 같고”
이거는 뭐 천부당만부당해요, 이게.
그래서 시장에 가더라도 내가 없는 것만 사오랬지
누가 이것 보고 이것 보고 이것 보고 탐내랬습니까?
그거와 똑같습니다.
...
왜 걱정을 합니까?
용광로에서 쇠가 나가든가 용광로에서 금이 나가든가
그러면 그대로 넣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나가지 않습니까?
지금 현실의 물질적인 모두가.
그거와 똑같습니다.
자동적으로 거기다 맡겨놓으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바꾸어져서 나가고
자동적으로 이렇게 모두가 들고 나면서 조절을 하고 있는데
그거를 못 믿어서 그걸 맡기지 못합니까?
세상의 모든 이 의식들을 다스리는 내 마음의 선장이
예를 들어서 옛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몸뚱이가 배라면 배를 끌고 가는 선장이 있느니라.
그런데 그 배 안에 중생들이 잔뜩 들어있느니라.
그런데 중생들이 이리 왈 저리 왈, 나도 옳다 너도 옳다 하고 나서게 되면
배가 뒤집히느니라.
그래서 그 가서 닿을 데를 닿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은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모두 배라면
배 속에 지금 중생들이 잔뜩 타고 있습니다.
세포 하나하나에도 중생들이 들어있으니까요.
그런데 마음의 선장이 잘 이끌어가지 않는다면은 아니 되죠.
그 중생들이 이리 왈 저리 왈
이것도 나서고 저것도 나서고
팥죽 솥의 팥죽 방울이 그냥 이것도 일어나고 이것도 일어나듯이 그렇게 일어나면
그것을 ‘일어나게 되는 것도 바로 거기다’ 하고
거기다 맡겨놔야 이게 잔잔하게 다스리죠.
그래서 배는 그곳에, 닿는 곳에 닿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이렇게 하고, 먼저 할 게 있고 나중 할 게 있습니다.
먼저 기소부터 다지고 또 주춧돌을 놓고 아래층부터 잘 다스려서 잘 지어놔야
위층이 그건 저절로 올라가죠.
그러니까 나중 생각 마시고
우선에 내 선장한테 모든 거를 일임하고
내가 체험해 보시도록 지켜볼 수 있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진짜로 믿고 그렇게 해보세요.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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