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 본체가 있습니다, 근본 본체.
즉 말하자면 본체라는 것은
근본과 이 체와 둘이 아닌 그 자체를 본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를 들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본성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대로 있기에 그 불성 자체가
하늘과 땅을 기준으로 해서 불기둥이라 한다면
‘불’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을 말합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기둥이라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그렇게 돼 있으니까요.
직결이 돼 있고
우주와도 직결이 돼 있고
이 모든 일체 만물이 자라는 땅과도 합류화가 돼 있습니다.
천지가 합류화 돼 있듯이.
그래서 그 기둥이 있으면
그 기둥을 끼고 수레가 돌듯이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우리 생사윤회 모든 일체가 돌아가는 것이
그 기둥을 끼고 돌아가는데
그 기둥은 움죽거리질 않습니다.
움죽거리질 않으면서 그 능력을 배출해 주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하다못해 자동차가 가도 바퀴를 굴리려면
그 심봉이 들어가야만 됩니다.
그래야 바퀴가 구르듯이.
바퀴를 뀐 그 심봉은 움죽거리질 않습니다.
움죽거리질 않으면서
바퀴만 굴러가게끔 그 힘을 배려해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움죽거리질 않는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 돌아가는 바퀴는
우리들이 지금 돌아가고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돌아가고 이렇게 돌아가는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바퀴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잘못 쓰면
그 바퀴에 모든 게 감기고, 나쁜 게 감기고,
또 좋은 마음을 써서 선으로서 악이 거기에 붙어 있지 않는다면
선에, 즉 말하자면 입력이 되는 거죠.
그 입력이 되고
그것을 바로 영이라고 그럽니다. 영!
그리고 혼백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근본 불성하고는 아주 다른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내되
악하게 쓰면 안 되니까 선하게 써라 이러는데
부처님의 마음공부에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다 놔라 이랬습니다.
왜냐하면 악하게 쓰다 보면 선하게 쓸 수도 있고
선하게 쓰다 보면 악하게 쓸 수도 있으니까
그것을 양면을 다 놔라 이겁니다.
그 양면을 놓는 법이
내가 지금 여기서 일러 드리는 그 자체입니다.
왜냐?
선은 감사하게 놓고
악은, ‘악이 나오는 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악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도 그 자리다’ 하는 것을
모두 거기다가 입력을 해라 이겁니다.
(그런데 큰스님 법문 중에서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정자와 난자가 결합할 때
영혼이 들어가지 않으면 생산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영혼 속에 불성과 마음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닌지요?)
같이 있으나, 이것이 영혼이라는 것은요
자기가 어떻게 살아나갔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에 인과가 붙어 있습니다, 영혼에.
자기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인연이 되죠?
악한 인연도 선한 인연도
그게 모두 합세하기 때문에
컴퓨터에 입력이 되듯이 입력이 되기 때문에,
이 인간에게는 자동적인 컴퓨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거를 누진이라고 이름하겠습니다.
그 모든 거를 입력이 되는데
즉 말하자면 과거의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또는 인과성, 윤회성, 업보성, 세균성, 영가성
이 모두가 다섯 가지 합친 그것을
바로 여러분들이 인연을 삼아서 영혼이,
즉 말하자면 자기가 그릇대로 차원대로 택합니다.
정자 난자를 택합니다.
택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깡통에게 가는 거는 깡통에게 가고
금 한테 가는 거는 금 한테 갑니다.
그래서 이것이 가족단이 되는데
이 몸속에도 가족이 돼 있고
바깥에도 가족이 돼 있습니다, 가족이.
그런데 깡통은 깡통대로 만나고
금은 금대로 만납니다.
이게 구성됨이 철두철명합니다. 우연히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깡통은 깡통대로 만나니까
예를 들어서
‘누구의 탓도 하지 마라.
너도 깡통의 한 차원이고, 너도 깡통의 한 차원이니까
깡통이 서로 부딪치면 소리만 요란하지
그러니까 이것도 깡통이 된 내 탓이다 하는 것을 생각해라’
이런 겁니다, 한 식구가.
그래서 누구에게 원망하지 말고
자비한 마음으로서의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을 해준다면 서로가
‘아, 내가 이렇게 악한 말을 하는데도 저렇게 선하게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녹아지고,
녹아지면서 또 이쪽도 그렇게 서로 대비가 됩니다.
사랑할 수 있는 대비가 되죠.
그럼으로써 화목을 가져옵니다.
그러면서 화목을 가져오면
돈도 그 화목한 집에 들어가지 악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영혼,
이 자체라고 하고 이게 우리가….
지금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ㅎㅎ
말을 한참 하다보니까 뭐를 뭐를 말을 하셨는데
내가 뭘 지금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초발심자를 위해서 요것을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불성과 주인공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인공이나 불성이나,
불성이라는 것은 한 근본을 말하는 거고요
주인공이라는 것은 내 몸체와 마음 내는 거와 불성과
통합한 겁니다.
지금 주인(主人)이면서도 공(空)해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돌아가는 자체를 바로 딱 집어서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전체를.
여러 가지로 이렇게 가장구 가장구, 한 가장구, 한 이파리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요
생이 다하도록 배워도 못 배웁니다.
(그래서 이 빛과 같은 그 생각이 맞는 생각인지 이것을 한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아, 지금 말하는 것도 빛 같죠.
고정됨이 없으니까요.
이 말 하고 저 말 하고 그러는 거지, 고정되게 한 말만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주인공이라고 했으니
무슨…,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주인공에서 일어난 거니까
주인공에서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놓으라는 얘깁니다.
이 주인공이란
티끌 하나 빼놓지 않고 주인공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이 내부의 자생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말입니다.
이게 한 생각을 하면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해도
안에서 의식들이 그냥 나쁜 생각으로 하나로 돌아가고
좋은 생각을 해도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건 왜냐?
의식들이 자기가 자유자재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식들이 자재할 수가 없으니까
여기서 생각하는 대로 따라서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의식이.
그러니까 좋은 생각을 내라, 좋은 생각을 내라 이러는 겁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내 몸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어떠한 사람이 잘못되더라도
'아, 내가 수억겁을 거쳐올 때
무엇은, 어떠한 모습은 안 됐을 거냐.
어떠한 모습은 안 돼 봤을 리가 없으니까
그때의 바로 내 모습이로구나.’하고
그것을 둘이 아니게 생각하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서
뿌리를 얘기하면 가지를 쥐고 애를 쓴다거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뿌리를 말을 하면,
뿌리에서 한 뿌리에 한 가지 잎새 헤아릴 수가 없는 게 다 붙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뿌리의 그 원인만 알면
그 가지는 저절로 알아지고 잎새도 저절로 알아집니다.
그러니까 가지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잎새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오직 자기의 뿌리말입니다.
저 나무들이,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렇습니다마는
저기 우리가 나무들을 볼 때
뿌리에서 전체가 이렇게 싹이 붙어 있는데
그 싹이 잘못 생각한다면 뿌리가 썩습니다.
뿌리가 썩으면 벌써 가지가 썩습니다.
그거와 같이 그 나무들은 자기 흙이 가렸기 때문에
그 흙이 덮여서 자기 뿌리를 못 봅니다.
그런 거를 무명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자기 뿌리를 자기가 못 보기 때문에
무명이 덮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찰나에 가려져 있고
한 찰나에 밝아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내가 육신이 태어났으면 마음이 태어나라.
마음이 태어났으면 마음을 길러라.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
또 내가 견성했다고 하지 마라.
마음이 태어났다면 견성을 했다고 모두들 하는데
견성했단 말하지 마라,
내가 그 어린애가 어른이 돼야 어른값을 하지,
어른이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어른값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頓悟)는 탄생하는 거요,
또 길러내는 거는 점수(漸修)입니다.
그게 이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점수와 돈오가 둘이 아닌 까닭을 알고
진실하게 이거 이름 찾고 저거 이름 찾고
내가 도를 이루기 위해서 이런다 이런 생각도 말고,
오직 사람부터 돼야
도가 거기 저절로 붙어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굳건히 생각하시고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한철 나다가 가는 거, 한철 나다가 우리가 가는데…,
우리가 이렇죠.
걸망을 걸머지고 어디 놀러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두 딴 데서도 놀러 오고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놉니다.
같이 놀다가 해가 지면 다시 헤어져서 돌아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그러니까 그렇게 잠깐 놀다가는 사이에
우리는 어떻게 노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주어지는 모습이 참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시구요.
이거 제가 한마디 하겠는데요
살다가 보면 스스로서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나는 거에서 질문을 해서
그것이 타당하게 딱 받아들여질 때
그게 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책을 보고 적어 가지고 온다면,
적어 가지고 와서 그걸 해가지고 저거 하면
반쪽밖에는 못 들어갑니다, 반밖에는.
그러니까 잘 생각하셔서,
또 우리가 안다 하더라도
질문을 할 때는 남들을 위해서 보살행을 하는 듯이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떡그릇에 엎드러져라 하는 격으로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질문을 던질 때
모든 사람이 그 한마디를 듣고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해드리는 것도 바로 보살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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