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이 생에 올 때 생생한 체험을 위해 모든 기억을 지운다면서 왜 계속 깨어있으라고 하나요?

Buddhastudy 2023. 5. 24. 18:52

 

 

 

, 작가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깨어있음과 자각이라는 것에 대한 질문인데요.

우리는 영적인 존재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이 삶은 여러 가지 체험들을 위해서

망각이라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삶으로 올 때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 삶으로 들어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체험을 하는데 항상 마음공부를 하다보면

깨어있어라’ ‘항상 현존을 자각하라뭐 이러한 것들을 하는데

 

제가 궁금한 게

생생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 망각이라는 걸 가지고 오는데

깨어 있으면 생생한 체험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분노를 한다, 어떤 일에

그러면 내가 진짜 깨어있지 않고 에고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정말로 진지한 분노, 완전한 분노를 하게 되겠죠.

슬픔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깨어 있고 내가 자각을 하면

그 분노가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러면 내가 결국은 그 분노라는 감정, 혹은 다른 어떤 감정이 되었던

생생한 체험을 못 하는 거 아닌지 오히려

실제로 제가 이제 그렇게 되고 있거든요.

 

그러면 이게 모순적인 것 같아 가지고//

 

 

, 그게 우리가 진리를 말로 표현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리고 그런 경험 아마 있으실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밤에 하늘을 바라보면 달이 항상 저만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이쪽으로도 제가 뛰어가 보고 저쪽으로도 뛰어가 보고

그랬던 경험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희 아이도 다섯 살이 되니까

왜 달이 저만 따라와요?”라고 묻잖아요.

그랬을 때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해주나하면

달이 네가 예뻐서 그래라고 대답을 해 주는 거죠.

 

그리고 이 아이가 중학교를 가고 그 질문을 하게 될 때는

우리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잖아요.

그래서 생생한 체험을 위해서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받아들이셔야 돼요.

 

질문자가 어떤 질문을 했을 때

그 질문자의 단계에 맞춰서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를 한 것처럼

, 달이 네가 예뻐서 따라오는 거야.”

그런 느낌의 대답인 거예요.

 

이것이 조금 더 공부를 하다 보면

생생한 체험이라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과 그리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뭔가를 체험하는데

무엇에 대한 체험인가를 생각해보면

결국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에 대한 체험이거든요.

 

그렇잖아요.

내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이 감정을 느끼는데

또 이러한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열등감도 느끼고, 우월감도 느끼고, 나는 사랑 받지 못한다는 느낌도 가지고

시기심, 질투심

이런 많은 감정들을 느끼는 거잖아요.

 

그것이 생생한 체험의 감정을 느끼는 건데

그럼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제 이 아이가 다섯 살이 아니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

어떤 대답을 해 드릴 수 있나 하면

그 감정 체험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봐야 하는 거죠.

 

그랬을 때 그 생생한 감정 체험이 필요한 이유는요

결국은 에고가 느끼는 그 감정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거예요.

. 넘어서야지 된다.

. 넘어서기 위해서넘어서기 위해서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있잖아요.

그 감정을 왜 내가 넘어서야 되는데?

그냥 내가 생생한 감정을 느끼면 되지, 그 감정을 왜 내가 넘어서야 되는데?”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러한 모든 감정을 넘어서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사랑이에요.

결국은 이 삶에 들어오면서 신성으로서의 나를 표현하고 싶은 거잖아요.

 

우리가 신성하면 생각하는 게 사랑이잖아요.

절대적인 평온, 절대적인 자비, 절대적인 사랑이런 거잖아요.

그 사랑의 감정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꽃피울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 에고의 감정을 넘어서야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신성으로서의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은 신성으로서의 존재가 갖고 있는 어떤 속성, 자질이 있잖아요.

그 자질 중에 가장 중요한 자질이 사랑이잖아요.

 

근데 우리가 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되는 감정들을 다 체험해 보고 넘어설 때

그래서 우리가

정말 미워하는내가 이번 생에서

정말 너무너무 꼴도 보기 싫어. 내가 다음 생에 너를 절대 안 만날 거야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다음 생에서 만날 수밖에 없거든요.

 

결국은 그 미워하는 마음을 해결하지 못 하면

신성으로서의 영혼이 표현해야 할 어떤 신성의 자질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꽃피우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미움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번 생에서 미워하고, 증오하고,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아니면 또 무시하고 환멸하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정말 환멸스러워.

 

그럼 이 환멸스러운 감정을 내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을 때까지

다음 생에서 그 인연을 그 대상을 또 만나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봐야 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업의 관점, 카르마의 관점에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네가 이번 생에 그 사람한테 못 했으면 다음 생에 받는다. 업이다. 카르마가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아까 다섯 살 아이에게 설명하듯이 얘기하는 거거든요.

네가 이번 생에 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 받는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것은

그것은 죄와 벌의 어떤 구조가 아니라는 거죠.

죄와 벌의 구조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발현해야 하는데 이번에 내가 너를 너무 미워했어.

아니면 내가 너를 너무 무시했어.

내가 너에게 환멸감을 줬어. 아니면 내가 환멸감을 느꼈어.

그러면 그것을 다음 생에 만나서

사랑이 발현되도록 또 연습을 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 우리가 체험을 하면서

넘어서야 할 여러 가지 감정들을 넘어서고

신성으로서의 사랑을 꽃피우고

 

꽃 피운다하는 거는

꽃은 의도하지 않아도 향기를 내잖아요.

그 상태까지 되어야 되는 거죠.

 

(좀 전에 말씀하신 다섯 살짜리 아이한테 답해주는 그 비유에서 알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그런 표현들이 굉장히 많아요. 영적인 공부, 마음공부에서

그래서 만일에 내가 다섯 살 아이에게 설명한 그 답을

고등학생 정도의 사람이 그 답을 봤을 때는

뭔가 모순된다. 앞뒤가 안 맞는데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굉장히 많죠.

 

(, 알 것 같아요. ,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