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세계사, 4대 문명] 다윗과 요압

Buddhastudy 2023. 6. 21. 19:53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져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것만 같은 경쟁상대를 만났을 때

다윗과 골리앗의 만남이라고들 표현하는데요

다윗과 골리앗은 다윗이 젊은 시절

이스라엘군이 블레셋 민족과의 대결에서 한창 밀리고 도중

사기를 복돋아주는 1:1 대결에서의 승리했던 일화입니다.

 

다윗은 후일 유다 지파의 지지를 얻어 이스라엘 2대 왕이 되었으나

유능했던 부하장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여 뺏은 뒤

그 장수는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 밧세바와 결혼까지 했었죠.

 

 

다윗의 자식들은 자라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갖가지 암투를 벌이다

세력을 키워가던 압살롬 왕자는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압살롬 왕자에게 붙었던 세력은 대다수가 유다 지파였는데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 모두 다윗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결국 압살롬 왕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죠.

 

이로써, 이스라엘 내에 유다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들이 영향력을 펼치는 듯했으나

아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윗에게 돌아온 것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슬픈 소식 뿐이었습니다.

 

슬픔에 빠진 다윗은 되려 아들을 도와주었던 유다 지파를 포용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임명하는데요

누가 봐도 아들의 반란을 진압했던

이스라엘의 실력자인 요압이 총사령관이 될 줄 알았는데

예상밖에 임명이었던 겁니다.

 

요압은 이스라엘 최고의 실력자였으나

압살론과의 전투에서 다윗이 아들만은 생포하라고 했음에도

요압의 판단은 후한을 남길까 봐 전쟁터에서 직접 압살론을 죽였던 거죠.

다윗은 이에 마음도 크게 상했고

이스라엘 2인자인 요압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압살론과의 전투 이후 다윗의 정책방향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유다 지파를 포용하며

더 이상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요

하지만, 되려 이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마하나임에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할 때

다윗을 맞이하던 자들은 유다 지파들만 있었던 겁니다.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 입장에서는 실컷 다윗을 도와줬더니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수혜는 없었던 거죠.

압살롬을 따르며,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이 유다지파인데

압살롬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아마사가

이스라엘 전체의 총사령관이 되는 등

반란군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형국이었던 겁니다.

 

이에, 압살론에 반란이 사건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베냐민 지파의 세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압살론 때와의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왕권을 탈취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이번 반란은 다윗왕의 관심을 한층 받으며 생색내고 있던

유다 지파들을 축출하는 것이 목표였죠.

 

이에 다윗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않는 세바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새로운 총사령관인 아마사에게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군대를 통솔하라고 했지만

군사들은 아마사를 그리 신뢰하지 않아 병사들이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얼마 전 전투에서 압살롬 반란군의 통솔자였던 아마사는

당시, 다윗 군대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던 터라

병사들이 따르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아마사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긴 다윗은

자신과 오래 손발을 맞추었던 아비새를 불러

세바 토벌에 대한 지휘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아비새는 자신들의 부하들을 중심으로 병사들을 잘 모으게 되었고

세바 토벌군에 대한 진압 계획 구상도 일사불란하게 했는데

강력한 군대의 화룡정점인 리더쉽이 필요했었죠.

 

이에 아비새는 강한 군사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요압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다윗의 눈 밖에 벗어난 요압이 다시 복귀를 하게 되면서

아비새는 자신의 지휘권마자 고스란히 요압에게 바치죠.

 

요압은 이스라엘에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명장이었으며

불안해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금새 북돋아지면서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 큰 바위까지 진군을 했는데

얼마 전, 요압의 총사령관 자리를 빼앗던 아마사가 요압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죠.

아마사는 요압의 사촌형이었기 때문에 반갑게 요압과 인사를 나누었고

요압은 일부로 칼집에서 칼이 스르륵 빠지게 만들어서

실수인척 칼이 아마사의 배를 찌르게 놔두었습니다.

요압의 커다란 칼에 찔린 아마사는 창자가 튀어나와 그 자리에서 죽게 되죠.

 

요압은 아마사의 시체를 눈 앞에 두고서는 뒤에 있던 아마사 군대를 보며

이제 우리를 따를 것인지 아닌지 택하라 했고

아마사의 부대는 꼼짝없이 요압에게 흡수가 됩니다.

 

 

 

다윗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던 세바는

요압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병력을 총동원하여 아벨 성의 방벽을 이용한 공성전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베테랑 요압의 전투경력에서 공성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아예, 군대를 총동원해 공격축대를 쌓아 성벽만큼 올려서는

정문이 아닌 성 전체를 아예 다 부숴버릴 심산이었죠.

 

이를 보던 아벨 성에 있던 한 주민이 나와서는

왜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하냐고 호소를 하니

요압은 세바만 죽으면 더 이상의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주민은 성안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긴급회의를 하고서

세바를 붙잡아 목을 베어 성 밖으로 던져버리는데요

그렇게 세바의 반란은 요압 명성의 공포심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요압의 인지도는 이 사건으로 확고하게 되었고

그러한 요압의 기세를 다윗이 몇 차례 꺾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게 되는데요

요압은 다윗의 정치적 기반인 유다 지파의 영향력까지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평생 동안 요압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데 최고의 공신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데 변함이 없었으나,

이스라엘 전 민족을 통합하고자 했던 다윗과는 달리

요압은 유다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어

내부적인 문제에서는 잦은 충돌을 보였었죠.

 

다윗의 자식 문제로 요란했던 이스라엘의 분위기도

세바의 반란 이후로는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윗도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다윗의 사망은 기원전 961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의 나이는 70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시절의 고대 이스라엘에는 왕이 늙어서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못하게 되면

왕의 침대를 데우기 위해 젊은 처녀가 함께 했는데요

죽을 때가 가까이 된 왕의 기운이 없어 성관계가 목적이었다기보다

순결한 처녀의 몸의 체온은 왕을 회복시킨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렇게 다윗의 말년을 지키고 있던 처녀는 아비삭이라는 인물이었죠.

 

이제 곧 왕이 죽게 된다면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연히 다음 왕은 누구냐였습니다.

사실 다윗은 자신이 총애하는 밧세바에게

귀띔으로 후계자는 솔로몬이라 이미 점지해둔 상태였지만

신하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순서대로라면 죽은 압살롬의 다음 왕자인 아도니야가

계승권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요압은 아도니야를 후원하였는데

다윗이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점찍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평생 다윗의 명과는 상관없이 본인의 뜻대로 행동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기 마음대로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켜세우며

대관식을 거행해 버립니다.

 

요압이 이렇게까지 아도니야를 후원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우선적으로는 그간 잘 지내온 왕자와 함께 손을 잡는 편이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게 내막을 들여다본다면

지난 세계사 다윗과 밧세바 편에서 다루었던 내용으로

오래전 다윗이 부하 장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해

그녀를 확실히 취하기 위해 우리야를 위험한 작전에 투여한 적이 있었죠.

 

그때 당시의 우리야의 상관이 요압이었기 때문에

요압은 우리야가 죽을 줄 알면서도 다윗의 명을 받들었고

이는 다시 말해 우리야를 죽게한 장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후계자가 된다면 아직 어린 솔로몬만이 아닌

우리야의 아내에서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가 섭정에 가까운 입지를 지니게 될 것이고

요압과 밧세바의 전남편에 대한 악연은

앞으로 다가오는 요압의 장래가 어두워질 전망이었죠.

 

그래서, 현재 상태로는 후계자의 정식 발표가 없었던 터이고

정통성으로도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다윗이 골골거리고 있는 동안

아도니야 왕 대관식을 밀어부쳤던 겁니다.

 

하지만,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다윗은

아직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고

다윗도 젊은 시절에는 한창 잘나가던 장군 출신으로

마지막 할 일을 위한 정신력은 보여주게 되었죠.

 

밧세바와 선지자 나탄은 당장 다윗에게 가서

솔로몬에게 왕좌를 물려주라고 부탁했고

다윗은 지금 바로 솔로몬을 왕으로 선언하겠다고 합니다.

 

대제사장 사독과 근위대장 브나야를 소집하여

솔로몬에게 대관식을 치르게 하여

그가 이스라엘의 3대왕이 될 것이라고 공표하였죠.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요압과 아도니야를 충격에 빠뜨렸으며

아도니야를 따르던 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몰래 몸을 숨겨 집으로 도망칩니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아도니야는 성막으로 도망치는데

제단에 뿔을 잡고 버티며, 솔로몬이 자신을 죽일 수 없도록 하였죠.

이스라엘 율법에는

번제단의 네 모퉁이 위에 있는 4개의 뿔이 있는데

이 뿔은 생명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는 구원과 생명의 상징인 제단 뿔을 잡게 되면

살인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헤프닝은 이렇게 끝을 맺었으나

죽음에 임박한 다윗은 솔로몬을 불러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세바의 반란 때 요압이 사촌인 아마사에게 한 짓을 알고 있으니

그의 욕망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요압이 늙은 몸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잘 처신해서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라는 내용이었죠.

 

다윗이 죽고 나서, 솔로몬의 가장 큰 적은 원래 순서대로라면

정통성을 이어받았어야 할 아도니야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상징인 제단 뿔을 잡았던 아도니야에게

바로 적대감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하지만, 이전부터 정치감각이 없었던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찾아가서는

원래 왕 자리는 내 자리였는데 솔로몬이 대신 가져갔으니

그렇다면 나는 다윗왕의 마지막 시중을 들던 아비삭은

내가 가져가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도니야의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이러한 행동은

당시로서는 왕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이었는데

이스라엘 관습으로는 선왕의 후궁을 데려간다는 것은

그가 바로 선왕의 계승자라는 것을 의미했던 거죠.

 

이 말을 전해들은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반역을 꾀한다고 하여

근위대장 브나야를 시켜 아도니야를 처리하게 됩니다.

 

제사단의 뿔로 목숨을 유지했지만

아버지의 후궁을 달라는 말을 한 마디 했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 셈이죠.

 

이로써, 솔로몬의 경쟁자는 없어진 셈이었고

아도니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요압은

이제는 내 차례가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또 다시 브나야의 근위대를 불렀고

일부러 요압의 영향력이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병사들로 요압을 찾아가게 하여

브나야는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명장 요압의 목을 치게 됩니다.

평생을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요압은

내부 권력다툼에서 밀려 참수당하게 된 것이죠.

 

요압이 죽은 뒤의 최고사량관 자리는 브나야가 가져가게 되었고

이는 그동안 이스라엘 내에서 특권을 누리던

유다 지파의 힘이 상실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요압의 최후는 다윗의 유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왕이 된 솔로몬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말을 유일하게 거역할 수 있는 신하였기 때문에

그리 탐탁치 만은 않은 존재였는데요.

 

이러한 솔로몬의 판단이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적을 제거하는 행위였으나

이스라엘 전체적인 군사력에서는 힘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12지파라는 갈라진 목소리와

여러 민족들 간의 대립이 존재했는데

이를 통합할 수 있었던 구심점은

요압이 지니고 있던 카리스마였기 때문에

요압이 죽기 전에 강한 군사력을 통솔할 수 있는 후임자가 필요했던 것이죠.

 

솔로몬의 총애를 받으며, 새로운 왕의 명령을 수행하며

군대 총사령관직을 맡게 된 브나야는

외부적으로는 큰 규모의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요.

이는 이스라엘 군사 전투력 면에서는

약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어

주변의 나라들이 성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또한,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절대 군주가 되었고

솔로몬이 살아있는 동안의 이스라엘은 왕성한 국가가 될 수 있었으나

솔로몬의 사후에는 나라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죠.

 

요압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다윗 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였으며

수많은 다윗의 장군들을 대표하였습니다.

부하들로부터의 지지도 높아 전장에서 함께 먹고 자는 걸 원할 정도였죠.

 

평소, 다윗과 사사건건 많이 부딪히기도 했지만

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면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요압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다윗이 난공불락이었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데 있어

취약한 곳을 찾아낸 군사적 전략 능력도 뛰어났으며

압살론의 반란, 세바의 반란 등 다윗의 장애물 제거를 위해

손에 피 묻히는 일은 모두 도맡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통합을 위한 국가 정책과는 달리

유다 민족주의 성향을 지녀

다른 지파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권력과 유다 지파의 세력을 키우는데 열을 올리기도 했었죠.

 

요압이 추구한 유다 민족 중심의 행보는

밖으로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명장이 될 수 있었으나

안으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지키는 데 앞장섰으니

결국 말년에 가서는 다윗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유대인 역사 10번째 시간으로

압살롬의 반란 이후

세바의 반란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았습니다.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은 모두 요압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전후 처리 문제에 있어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심화하였죠.

 

다윗이 70살이 될 무렵, 죽어가던 다윗을 본 요압은

다음 권력 유지를 위해,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를 왕으로 내세웠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다윗은 죽기 전

솔로몬에게 요압을 제거하라는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이로써, 솔로몬이 새로운 왕을 즉위하는 데 있어

정적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지혜로운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 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