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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히타이트 10분 완벽 정리

Buddhastudy 2023. 7. 12. 19:28

 

 

도시국가 아테네로 발전하기도 전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은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였습니다.

 

과거 당시의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아나톨리아 전체를 의미하기도 했죠.

고대 그리스어로 동쪽을 의미하는 Ανατολή(아나톨리)에서 유래된 이곳은

로마 제국 시기에 접어들어야 아나톨리아와 아시아가 구분되어 집니다.

 

아나톨리아 지역은 지중해 인근에서도 풍요로운 땅을 자랑하여

많은 국가들이 선호했던 지역으로 동로마 제국은 이곳을 기반으로

천 년의 세월을 버텨내기도 했죠.

현대 사회의 터키 또한 이곳에서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농산물을 수출하기도 합니다.

고대 문명에서 비옥한 땅으로 유명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에 비해서

지금까지도 생산력의 저력을 발휘하는 곳이기도 하죠.

 

고대 아나톨리아의 주인은

지금은 세계사 책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는 히타이트였습니다.

히타이트은 기원전 약 1600년경부터 약 기원전 1200년경까지 존재했는데요.

이들이 멸망할 무렵, 아나톨리아 반도는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히타이트는

4대 문명이 한창 꽃피우던 시절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와 쟁쟁한 경쟁을 하고도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어

불과 200여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국가였죠.

 

1870년 시리아의 하마라는 지역에서

히타이트족들의 글자가 새겨진 돌들이 발견되어 연구가 시작되었고

1907년 터키의 보아즈칼레 마을 근처에서 고대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하투샤가 발견됩니다.

 

이 일대에서 유물이 방대하게 발굴되면서 히타이트의 문명들이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요리책까지 발굴되어

당시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먹고 살았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고 하네요.

요리책에서는 우유나 꿀을 활용한 유제품 식사를 즐겼다고 합니다.

 

히타이트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해당하는 히타이트어를 사용하였는데요.

잠시 전 세계의 원시 어족에 대한 분류를 해보자면

아프리카 북부에 분포하는 이집트어, 아랍어 등은 아프로-아시어 어족에 속하며

중국어와 베트남어는 중국-티베트 어족’,

그리고 중부 유럽과 중동지역, 동아시아, 한국어와 일본어의 원시 어족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합니다.

그 외에도 5가지 정도의 어족이 더 존재 하나

지금 말하는 인도유럽어족은 인도에서 유럽에 걸쳐 쓰이는 언어라 할 수 있죠.

 

인도유럽어족에는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이 있으며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히타이트어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아주 오래된 세월의 언어이기 때문에

현재의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체코의 학자 베드리흐 흐로즈니(Bedřich Hrozný)

이들의 언어를 해독하면서

히타인들의 삶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게 되었죠.

 

 

히타이트의 정치 체계는 왕과 왕비, 그리고 판쿠라는 귀족회의가 있었는데

이 또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왕과 왕비 사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왕은 타바르나라고 불렸으며

왕비는 제사장의 역할도 동시에 맡아 타와난나라고 불렸죠.

 

왕비가 단지 왕의 아내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타브르나, 타와난나, 판쿠

이 세 주체의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 서로를 견제하는 형태였습니다.

 

왕비인 타와난나는 평소 제사장의 지위도 갖고 있었으며

왕의 아내로서의 권력도 지니고 있다가

남편이 죽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니로서 권력을 계속 유지했죠.

 

귀족회의인 판쿠는 타브르나와 타와난나의 계승을 비준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왕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바로 왕권을 물려줄 수 있는 건 아니고

판쿠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히타이트에서는 판쿠가 개입됨으로써 히타이트 삼권분립이 되었던 거죠.

 

 

 

히타이트가 존재하던 시절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법은

고대 바빌로나아 시절의 함무라비왕이 편찬한 함무라비법을 기준으로 삼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는데요.

가장 원칙적인 법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자비는 없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히타이트에서는 주변에 이러한 원칙적인 법을 적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형태를 보였는데

법률에서도 민법적인 문제와 형법적인 문제로 구별하였습니다.

민법에 해당하는 벌은 처벌보다는 배상으로 해결했으며

형법적인 문제에서는 고의냐 과실이냐를 따지게 되었죠.

 

이는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한 로마 제국을 제외하고서는

중세시대인 2천년 후의 법들보다 더 디테일한 기준을 둔 법률의 형태였습니다.

 

심지어는 그 시대 메소포타미아의 법률에서는

심심찮게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라든가 거세를 시킨다는 법이 존재했는데 반해

히타이트에서는 이러한 혹형이 존재하지도 않았죠.

또한, 당연하게 여겼던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히타이트의 관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노예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그 괘씸함에 자유민보다 더 처벌을 가혹하게 했는데요.

히타이트에서는 반대로 자유민은 노예들에 비해 자유라는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감이 더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노예가 범죄를 저지르면 오히려 배상액이 절반이 되었죠.

, 자유 권리가 없으니 의무도 절반이라 판단했던 겁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2천 년도 더 이전인 시대상에서는

여성의 권리 또한 노예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참여의 제약이라든가 남성의 종속적인 존재였던 것에 비해

히타이트에서는 여성의 자유로움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여성에게도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죠.

하지만, 남성과 완전히 동등하지는 않아

자식들은 남편에게 귀속되었고, 아내는 자식 중 한 명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히타이트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철기 사용을 한 사람들로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티미아 지역의 청동기 무기를 웃도는 힘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학자들에 따라 히트이트인들의 철기 문화도

당대에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 주장들도 있으나

어쨌든 강대국 중에 하나였다고 일컬어집니다.

 

역사 속에 강대국들은 다른 민족을 정복하게 되면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는데도 힘을 쏟았는데

히타이트는 반대로 정복한 나라의 신을 그대로 받아들였죠.

정복지의 종교 기도문을 그대로 수도 하투샤에 도입을 시켜서

다양한 언어와 종교들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히타이트에서 철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용광로가 필요했었는데요.

용광로에서 철을 녹일 정도로 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산소를 공급할 풀무가 필요했습니다.

풀무는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혹은 녹이기 위해 화로에 바람을 불어놓는 도구였죠.

하지만, 철기 문화가 많이 발전하지 않은 탓에 아직 풀무의 존재는 없었고

이에, 풀무를 대신하여 자연의 바람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수도 하투샤 부근의 황야에는 풍량이 쐰 바람이 불어왔는데

이곳에 용광로를 설치하여 강력한 황야의 바람을 풀무 대용으로 사용하였죠.

이러한 이유로 히타이트에서의 수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히타이트의 신은 바람과 동일시 되기도 했습니다.

 

히타이트인들은 원래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민족은 아니었고

정확한 발상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에서부터 이동해 오면서

소아시아 동부부터 정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국가의 이름도 선주민인 Hatti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초기에는 여러 히타이트계 소왕국들이 있었으나

기원전 1650년 하투실리 1세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30년간 지배하였는데요.

오래된 통치가 이어지자 나라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이 이어졌고

하투실리 1세는 죽으면서 유언장으로 후계자를 지목하게 됩니다.

 

 

 

후계자는 하투실리 1세의 손자였던 무르실리 1세로

그는 당시 주변 강대국들과의 힘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장거리 원정인 바빌론 함락을 성공하기에 이르죠.

1000km에 이르는 원정에서의 결과는

지구라트를 불태우며, 바빌로니아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히타이트라는 이름을 새기고 돌아온 무르실리 1세는

매제 한틸리와 한틸리의 사위 지단타에게 암살당하며 국가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요.

그 후, 한동안 침체기를 맞이한 히타이트는

텔레피누 왕에 이르러서야 왕위계승 법칙을 만들게 되면서 안정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왕위계승권을 두고 무한한 경쟁을 하지말고

왕비가 낳은 적자가 제1계승권을 후궁이 나은 서자가 제2계승권을 가지는 내용이었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사위가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14세기에 접어들어 자칭 대왕이라고 부른

수필룰리우마 1세는 원래는 참모이자 장군출신이었습니다.

평생을 히타이트의 적들을 격파하는데 바친 그는

결국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자신의 군사력 경험을 바탕으로 강대한 이집트 제국과 주변국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죠.

 

예전 무르실리1세 시절 강력했던 히타이트는

오래된 침체기 이후 수필룰리우마 1세가 집권하면서

강건함과 안정감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를 안정시킨 후 아시리아와 바빌로나아와 동맹을 맺었는데요

이 동맹을 위해서 그는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고 볼 수 있는데

주변국과의 동맹은 결과적으로 당시 중동 지역의 최강자였던

미탄니 제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하게 되죠.

이로써, 히타이트는 일약 오리엔트 지역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크나톤으로 개명한 아멘호테프 4세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주요 신이었던 아몬 신을 몰아내고

아톤신을 추앙하는 일신교를 추진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실패하게 되는데요.

해당 내용은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 세계사 코너 중

고대 이집트 역사 : 투탕카멘의 전말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크나톤이 죽고 난 이후 투탕카멘이 왕위에 올랐지만

투탕카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되는데요.

이에 이집트의 왕비였던 안케세나멘은

다음 파라오 후보인 자신의 할아버지와 결혼하기 싫어서

히타이트에 구원을 보내게 됩니다.

 

고대 이집트 왕족은 순수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도 이복 남매였던 거죠.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를 삼킬 목적으로 아들 제난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 후보인 노련했던 대신관 아이

이를 간파하고 있었고 제난자는 국경에서 살해되죠.

그리고 자신의 손녀딸과 결혼하게 되며, 파라오 아이가 됩니다.

 

히타이트 입장에서는 파라오로 등극해달라는 구원을 받았다가

되려 왕자가 죽게 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분노와 동시에 힘으로 이집트를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를 뛰어넘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히타이트였던 거죠.

 

하지만, 히타이트에서는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고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 뒤를 이은 아르누완다 2세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전쟁은 흐지부지 끝나게 됩니다.

 

그 후, 전염병으로 고생하여 왕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진 히타이트는 여러 혼란이 있었지만

무르실리 2세가 통합하게 되면서 또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때의 히타이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진출하게 되었죠.

 

무르실리 2세의 후계자인 무와탈리스 2세는

기원전 13세기에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카데시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집트에서는 이 전쟁의 결과를 이집트의 승리라고 기록했지만

역사학자들은 히타이트 측의 승리라고 보는 견해들도 많았습니다.

 

이 내용 또한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 세계사 코너 중

고대 이집트 역사: 람세스2세 완벽정리편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 후에도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긴 전쟁이 계속 되었지만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며 국가 내 한 공주가 람세스2세와 결혼하게 되면서

두 나라는 평화로워지게 되었죠.

 

국가 경쟁간의 힘 싸움에서는 강력한 모습을 보인 히타이트였지만

오리엔트 지역의 기후 변동으로 건조화 되는 국토는

히타이트가 쇠퇴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국가의 환경이 취약해지자, 잦은 내전이 이어졌고

대규모 바다 민족의 침략의 영향으로 인해 거의 멸망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요.

결국 기원전 717년 아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오늘은 고대 아나톨리아에 존재했던 국가

히타이트에 대한 정리를 해 보았는데요.

끝까지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