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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 최후의 왕. 아슈르바니팔

Buddhastudy 2023. 7. 19. 18:22

 

 

 

기원전 2500년경부터 존속해온 아시리아인들은

상업적인 활동을 지속하며

메소포티미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존재해온 민족입니다.

 

아시리아인들은 초기에는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1에게 복속되어

아카드 제국의 속국이 되기도 했지만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신아시리아 제국으로서

강력한 전투민족이 되었죠.

 

아시리아의 군대는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국가들보다

이른 철기 무기를 도입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으나

아슈르나시르팔 2세부터 이어져온 공포정치는

많은 국가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저항한 지역의 주민들은 무차별적으로 처형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애국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강제 이주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죠.

 

피지배민들에 대해 공포와 억압으로 통치를 하게 되니

주변 국가들로부터 점점 원한이 쌓여갔지만

아시리아의 전차와 공성 병기를 앞세운 무기 기술 발달은

그 어떤 나라들도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시리아의 국력이 강력해진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약 200년이 지난

기원전 680. 아시리아의 황태자였던 에사르하돈은

부왕이 형들의 음모로 암살되는 일을 겪게 되는데요.

그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는 동시에

내란을 진압하여 왕자리에 올랐고

선대의 왕들과는 다른 행보로

철저하게 파괴한 피지배국가들을 다시 부흥시키는데 열중합니다.

 

지배지였던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두크 신전을 재건하며 민심을 안정시킨다던가

북방의 스키타이 인이나 킴메리아 인과는

정략결혼을 하며 우호 관계를 맺게 되죠.

하지만, 에사르하돈은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팔레스티나를 점령하며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 와중에서도

이제껏 서아시아인들이 도전하지 못했던 지역 정복을 나서게 됩니다.

 

바로, 페니키아를 건너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강대국 이집트를 노렸죠.

기원전 3000년경부터 오랫동안 찬란했던 문명을 이루었던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 람세스2세 시절의

한창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는 아니었습니다.

 

에사르하돈이 노리던 기원전 7세기의 이집트는

쿠시 왕국에서 유래한 누비아인들이 다스렸는데

이 때 왕은 제25왕조의 4번째 왕 타하르카였죠.

 

타하르카는 이집트 통치 초기에

에사르하돈의 부왕이었던 센나케리브 시절.

센나케리브에게 저항한 팔레스타인을 도운적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최강 제국 아시리아에게 미운털이 박혀있던 상태였죠.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은

하이집트의 사막을 건너 수도 멤피스를 공격합니다.

타하르카는 아시리아의 거센 공격을 버티지 못해

결국 수도를 내주게 되고, 이집트 왕 타하르카는 남쪽에 있는 테베로 도망가게 되죠.

 

에사르하돈은 멤피스를 점령하여

왕의 후궁들을 생포하고 많은 약탈을 일삼게 됩니다.

결국, 아시리아 제국은 서아시아 지역에 이어 이집트까지 점령하는 대제국을 형성하게 되었죠.

 

에사르하돈은 이집트를 점령하고서는

새로운 아시리아 지배조직을 정비하고

통치관리자를 두고서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틈을 타서 타하르카는 바로 이집트로 돌아와 아시리아 주둔군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열받은 에사르하돈은

다시 이집트로 원정에 나섰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죠.

 

 

 

에사르하돈이 죽고 난 이후 기원전 672

아시리아에서는 더 이상 황실의 내분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한 맹세를 하고서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왕으로 추대하는데요.

아슈르바니팔과 왕위 경쟁을 다투던 형인

샤마시 슘우킨은 아시라아 제국 전체보다 하위 단계였던 바빌로니아의 왕이 됩니다.

 

새로운 왕에게 반역을 해서는 안된다고 맹세는 했지만

샤마시 슘우킨은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죠.

아슈르바니팔은 머리가 비상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왕으로서

고대 문자인 수메르 아카드의 어려운 문자 해독에도 능통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체력 관리에도 신경을 써

궁술과 사냥에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죠.

 

집권 당시에는 젊은 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다소 어리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왕이 되자마자 정신없이 아시리아를 향한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기원전 664, 이집트에서 타하르카의 반란에 대해 군대를 보내

다시 멤피스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타하르카는 멤피스에서 테베로

그리고 더 남쪽인 누비아로 도망가게 되죠.

 

그리고 이때까지 이어져 온 이집트의 제25왕조는 끝이 나고

새로운 제26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아슈르바니팔은 정복지에는 그 지역 출신 왕을 세운다는 방침으로

네코1세를 제26왕조 1대 파라오로 세우고 충성을 다짐받았죠.

 

아슈르바니팔의 주요 업적은 세계최초의 도서관을 건립하게 됩니다.

이 당시보다 400년 후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국제적인 자료가 혼합된 범위에서는 세계 최초였는데요.

아슈르바니팔이 세운 니네베 도서관은

인류 역사상 만들어진 도서관 중에서

세계 최초로 세워졌다는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은 지식욕이 매우 왕성했던 왕으로

니네베에 도서관을 세우고서 많은 문서들을 수집하는 독서광이기도 했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인 길가메시 서사시라든가

천일야화의 원형으로 보이는 이야기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발굴한 니네베 도서관의 자료들로 인해

기원전 7세기에도 수학과 식물학, 화학같은 학문 분야가 존재했다는걸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자료들은 지금까지도 아시리아에 대한 연구 자료로 쓰이게 되었죠.

 

이집트에서는 타하르카가 죽고

아슈르바니팔이 선정했던 네코1세가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타하르카의 조카인 타누타카가 다시 이집트를 공격하여 테베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아슈르바니팔은 군사를 보내 타누타카를 쫓아보냈지만

이미 네코1세는 죽었던 상태였죠.

 

참고로 이집트의 제 26왕조 1대 파라오 네코1세는

재위 2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다음으로는 또 다시 아시리아에서 정해준

프삼메티코 1세가 2대 파라오로 재위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제 26왕조는 이때부터 약 150년간 6명의 파라오로 안정적인 통치를 하게 되나

기원전 520년경에 이르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점령당하게 되죠.

그리고 기원전 350년경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제 32왕조 파라오가 되어 300년간 통치하였고

마지막에 가서는 클레오파트라 7세때

로마에게 점령당하며 고대 이집트는 멸망당하게 됩니다.

 

다시, 기원전 7세기 아슈르바니팔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슈르바니팔은 또다시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를 도운 나라들를 공격하며 아시리아의 힘을 과시하는데요.

문제는 점점 힘을 과시하면 할수록

주변국들은 아시리아에 대한 불만도 커졌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북쪽에서는

유목민인 스키타이인과 킴메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요.

아슈르바니팔의 아버지 에사르하돈 때의 정략결혼을 맺었던 이들도

세월이 흘러서는 약속의 효력이 옅어지며, 아시리아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동남쪽 지방에서는 페르시아인이

동쪽에서는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죠.

 

아시리아에 대한 불만은 외부적인 요인만 존재했던게 아닙니다.

바로, 아슈르바니팔의 이복형인

샤마시 슘우킨은 평생 동안 자신이 형이었는데

동생에게 머리를 조아리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죠.

 

 

 

슘우킨은 아시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바빌로니아의 왕이었고

그는 피지배민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슘우킨의 음모를 발견한 아슈르바니팔은

우선은 경고차원에서 특별조공을 부과하는데요.

슘우킨은 이를 곧바로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아슈르바니팔은 군대를 출병하는데요.

아슈르바니팔의 대군은 바빌론 성을 포위했고,

슘우킨과 바빌론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성안에 갇혀서는

식량이 바닥이 나면서, 굶주림의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극도의 굶주림은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했으며

기원전 648. 버티다못한 슘우킨은

자신의 왕궁에 불을 지르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죠.

 

아슈르바니팔은 불타오른 도시를 다시 재건하고

새로운 왕으로 칸달나우를 임명하며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사의식에 관련된 제의적인 왕 역할만 허용했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은 오랫동안 재위한 왕이었으나

그의 말년에 아시리아 제국은

내란과 외부의 견제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죠.

 

아슈르바니팔이 죽으면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는 동안

바빌로니아 남쪽의 칼데아에서는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켰고,

메디아에서는 왕 키악사레스가 이에 질세라 칼데아와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 제국을 쳐들어갔습니다.

 

나보폴라사르가 세운 칼데아 왕국은

오래전 기원전 18세기에 함무라비가 세웠던 바빌로니아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신바빌로니아라고 하는데요.

그는 기원전 625년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바빌론의 왕위에 올랐고

기원전 612년 메디아군과 함께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를 공략하였죠.

 

메디아의 왕 키악사레스는 메디아의 세 번째 왕으로

아버지 프라오르테스가 아시리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메디아 왕국은 이란 고원에 세워진 이란인의 첫 번째 왕국이기도 했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는

칼데아 왕국과 메디아 왕국 연합군의 공격으로 2개월 만에 함락됩니다.

아시리아의 왕과 신하들은 모두 참수되었으며

시민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죠.

 

아시리아 대제국의 수도인 니네베는

기원전 612,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됩니다.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의 남아있던 생존부대는

하란에서 이집트와 연합군을 형성하는데요.

이를 두고 칼데아의 나보폴로사르는 대군을 이끌고

하란에 있는 아시리아-이집트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나포폴로사르는 하란 점령에 연이어

카르케미시를 차지하게 되면서

페니키아와 시리아, 팔레스티나의 상업 통로를 차지하게 되었죠.

이로써, 나보폴로사르는 신바빌로니아왕국의 기초를 닦게 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오리엔트는

리디아,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의 4강국이 분립된 시대가 되었죠.

 

신바빌로니아의 1대왕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 부흥에 주력하여 신전과 왕궁을 짓고

바벨탑으로 알려진 에테메난키의 지구라트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오늘은 지난 세계사 영상에서 다루었던 잔인한 아시리아 제국 역사에 이어

아시리아의 멸망까지 다루어보았는데요.

아시리아는 군사 강국이라는 이미지와 공포 정책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잔인한 국가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위 관리층이나 정복전쟁을 추구했던 군주들과는 달리

발굴되는 아시리아의 유적들에서는 평범한 일반인들의 일상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시민들의 생활에서는 결혼식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가정 내 잔소리 등이 적혀있는 편지 등이 발견되기도 해서

고위층과 일반 시민들과의 생활 차이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지배층이 지녔던 최강의 군사력으로

오로지 주변국들을 힘으로만 제압하려고 했던 행보들은

결국 원한들이 모여, 연합국에게 멸망당하게 되었죠.

 

아시리아의 멸망 이후, 오리엔트는

리디아,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의 4강국이 분립 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끝까지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며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