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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신바빌로니아 완벽정리, 네부카드네자르 2세

Buddhastudy 2023. 7. 20. 18:47

 

 

 

기원전 800년경의 오리엔트에서는

이전에 오랫동안 패권을 차지했던 이집트와 고대 바빌로니아의 세력이 약해지자

페니키아가 지중해로 진출하여

연안 각지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며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그러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아시리아가

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을 정복하며 오리엔트를 통일하게 되었죠.

 

아시리아는 제국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로마 제국보다

수백 년은 앞서 존재했던 제국으로

당시 왕이었던 사르곤 2, 센나케리브, 아슈르바니팔은

서아시아 일대를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며 펼쳤던 정책이

지나치게 강압적인 공포정책을 펼쳤기 때문인데요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왕은

사르곤 왕조의 제 4대왕 아슈르바니팔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에사르하돈이 이집트 원정 도중에 병사하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며 이집트를 평정했던 왕이었죠.

 

아슈르바니팔은 기원전 664년에

이집트의 제25왕조를 멸망시켰으며

이복형제인 샤마슈 슘우킨과의 전쟁까지 이기며 강력한 힘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넓어진 아시리아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북쪽으로는 유목민들인 스키타이인과 킴메리인이

동쪽으로는 메디아, 동남쪽으로는 페르시아인이

호시탐탐 아시리아를 노렸죠.

그러던 중 여러 지역의 반발과 혼란을 틈타

기원전 625. 바빌로니아 남쪽의 칼데아에서

식민지배지의 총독이었던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키며 새로운 왕국을 건설합니다.

 

그가 새롭게 만든 왕국은 칼데아 왕국

다른 이름으로는 신바빌로니아였죠.

아시리아는 대내외적으로 시끄러웠는데

아슈르바니팔도 나이가 들어 전성기때 만큼의 전투력은 없었고

죽기 전에는 아들인 아슈르 에텔 일라니신 샤르 이슈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면서

아시리아의 공통 통치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아슈르바니팔의 사후

사르곤 왕조는 내분이 벌어졌고

그러던 중 밖에서는 메디아의 왕 키악사레스가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하고 있었죠.

 

메디아 왕국에서 아시리아를 노린다는 소식은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폴라사르의 야망에 동기부여를 더욱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는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왕국 연합군의 공격으로

2달만에 함락되었죠.

 

피지배민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잔혹했던 아시리아는

연합군에게 점령된 후, 왕과 신하들은 모두 살해되고, 시민은 모두 노예가 되었으며

수도 니네베는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습니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소수 살아남은 아시리아인들은 민족 공동체로써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었죠.

 

현대 시대에 들어서는 이라크 북부, 시리아, 이란 등지에 분포하여

총인구는 약 4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칼데아 왕국과 메디아 왕국은

국경을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로 정하여 동맹을 유지했는데요.

한편, 하란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던 소수의 아시리아 생존부대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며 시리아 일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칼데아왕국은 대군을 보내

아시리아의 잔존부대와 이집트군을 물리치고

카르케미시를 차지하게 되면서

페니키아와 시리아의 상업 통로를 차지하게 되었죠.

 

상업 통로를 차지했다는 말은 다시 말해

앞으로 서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 자본을 끌어모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던 겁니다.

 

아시리아가 차지했던 옛 영토는

신바빌로니아, 이집트, 메디아 왕국, 이 세나라가 3분하였고

여기다 흑해 아래쪽에 있던 리디아가 합세하여

오리엔트는 4강국이 분립된 시대가 되었죠.

 

 

 

전쟁의 승리와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된 나보폴라사르는

옛 바빌론의 부흥에 주력하여

신전과 왕궁을 짓고 도심을 관통하고 있는 유프라테스강에

123미터 길이의 벽돌 다리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의 영향을 주게되는

에테멘난키의 지구라트건설에 착수하였죠.

에테멘난키의 지구라트는 나보폴라사르와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쌓아올린 탑으로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신바빌로니아에는 주신인 마르두크 신전 수가 50여 개가 될 정도였는데

1대왕과 2대왕은 마르두크를 위해

하늘 끝까지 이 탑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했죠.

 

역사학자들은 성서에서 묘사된 바벨탑은

지구라트들 중에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수천년동안 수백개 이상의 지구라트가 건설되었죠.

, 도시마다 수호신을 위해

지구라트를 최소 하나씩은 세웠던 겁니다.

 

신바빌로니아에서 세워진 지구라트는

높이가 90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요즘 시대 기준으로는 아파트 한 층이 약 2.6 미터라고 하니

이 지구라트는 약 35층짜리 아파트 정도의 높이로 추측되네요.

 

나보폴로사르 왕의 뒤를 이어 2대왕이 된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가장 전성기 때 왕으로

정복 활동을 펼친 정복왕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586년에는 유대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이주시켜 노예로 만들게 되면서

성경에서는 악명을 떨치게 되죠.

 

유다 왕국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멸망 당하고

바빌론에 억류되어 약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바빌론 유수라고 하며

이때부터 현재까지 2,500년 이상 지속된 디아스포라를 촉발시킨 사건이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는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을 의미하며

바빌론 유수로 인해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시작을 알렸죠.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나

다른 민족들로 인해 이주를 반복하게 되었는데요

가장 유명한 디아스포라는 서기 132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금지 및 국외로 이주하게 됩니다.

 

신바빌로니아 2대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집권할 당시에는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의 팽팽한 세력다툼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요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 균형을 깨고자

메디아 키악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와 결혼하여, 혼인동맹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메디아군과 함께 이집트를 압박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집트에 의존을 하고 있었던 남유다 왕국을 멸망시켰죠.

 

성경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유다 왕국을 점령했을 때

유다의 마지막 왕인 치드키야 왕을 결박하고서는

그 앞에서 두 아들을 죽였다고 하는데요

그 후, 치드키야 왕의 두 눈을 뽑고 철쇄에 묶어서 끌고 갔다고 합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신바빌로나아의 군사력은 극에 달했으며

이때의 신바빌로니아는 과거 아시리아에 필적하는

오리엔트 대제국으로서의 힘을 발휘했었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제국의 확장과 함께

수도 바빌론에 다수의 건축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바벨탑, 이슈타르의 문, 바빌론의 공중정원 등을 건설했죠.

참고로 바빌론에 대한 영상은

채널 내 재생목록 5분상식 코너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계단식 발코니 위에 식물이 있는 모습이

마치 공중에 식물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여

공중정원으로 이름이 붙은 이 건축물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데요.

공중정원의 테라스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흙을 사용한 정원이 있었고

이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존재했습니다.

 

이 공중정원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는 이유는

자연과는 다소 거리가 먼 바빌론의 환경 때문이었는데요.

정략결혼으로 인해 메디스에서 시집온 아미티스는

바빌론이 메디아와는 크게 다른 자연환경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고 합니다.

 

바빌론은 거대한 강은 있었지만

산과 나무가 많은 메디아와는 달리

비도 잘 내리지 않는 땅이었던 거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푸른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미티스를 위해

공중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공중정원을 만든 목적이

꼭 아미티스를 위해서라는 것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통상적으로는 공중정원 건축은 아내를 위한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죠.

 

 

 

공중정원을 포함해 수많은 건축물을 올릴 수 있었던 신바빌로니아의 자본의 힘은

주로 무역에 있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외국과의 교역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수출품에 있어서는 대추야자와 밀과 양모를 수출하며

국가에 부를 축적해갔죠.

뿐만아니라, 은행제도와 금융업을 발전시켰는데

고대 사회에서는 중동에서조차 대부업에 대해서는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자로 부를 쌓아간다는 건 정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죠.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는

돈장사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으며

되려 돈에 대한 연구를 적극 장려되는 분위기로 바빌론에서는 금융업이 발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변 국가에서도 돈을 빌리러 바빌론에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던가

은행가들 중에서는 이자로 갑부가 되어 왕족 못지 않은 생활들을 했었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6세기경에

신바빌로니아를 풍요롭게 만든 정치인이자 군사력을 키운 용장으로도 일컬어집니다.

동시에 외국의 돈을 끌어들이는 무역업과 돈에 대한 연구로 금융업을 장려하여

안으로는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밖으로는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의 행보는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경에서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으로 다니엘서에서 등장하는데

악당 중에서도 흉악한 악당왕으로 등장하게 되죠.

 

신바빌로니아가 이집트군을 공격할 때

국력이 약했던 유다 왕국은 완전히 박살나며

수많은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과거 지혜의 왕 솔로몬이 건설했다는 유대교의 제1성전까지 파괴했으니

그 한을 성경을 통해 풀게 되는데요.

성경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야훼의 벌을 받아 정신이 나가서는

왕위에서 쫓겨나서 7년 동안 야생에서 미친 사람처럼 보내다가

죄를 뉘우치고 다시 왕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를 얼마나 싫어했는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죠.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서양에서는 2천 년이 더 흘러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하게 됩니다.

 

19세기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음악가

베르디의 첫 성공작 나부코의 모델이 되었죠.

나부코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탈리아식 이름입니다.

이 오페라에서는 폭군 나부코의 지배하에서도

민족의식과 신앙심을 잃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는데요.

 

나부코가 대히트를 쳤던 이유는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어

이탈리아인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폈던 겁니다.

 

이처럼, 한 국가의 힘이 강대한 경우에

강대국인 해당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지만

반대로 억압받는 민족들은

강대국에 대해서 폭군으로 묘사하기도 하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바빌로니아는

그가 죽은 후, 불과 수십년 만인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이끌었던

키루스 2세에게 정복당하는데요.

키루스 2세는 거대 제국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다음 세계사 영상 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칼데이인들이 세운 신바빌로니아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 해보았는데요.

오리엔트의 패권은 수백 년간 아시리아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방대해진 영토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바빌로니아의 후손인 칼데아 왕국과

이란의 조상인 메디아 왕국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칼데아인들의 새로운 국가인 신바빌로니아는

서아시아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당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던 금융업을 발달시키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되었고

이때 바빌론 유수를 거치게 되면서

현대 사회까지도 유대인들의 원한을 받게 되었죠.

 

그럼, 지금까지 끝까지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며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