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업과 윤회에 대한 바른 이해

Buddhastudy 2024. 4. 22. 20:22

 

 

윤회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희론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모든 불교적 가르침은

도 닦음과 해탈 자유로 이끌어 줄 때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한 법이자 선한 법 해석이다.

 

업과 윤회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이고득락의 목적하에 해석되어야 하고

연기법과 무아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자유와 해탈을 경험하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것은

자칫 또 다른 형태의 '자아론'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아니 2500년 동안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던

업과 윤회에 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브라만교 혹은 현두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가 있고

불교에서도 업과 윤회를 이야기하죠.

 

어떤 사람들은 불교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삼세인과와 육도윤회라고 하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어서

이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불교를 배운다, 불교도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단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좀 살펴보면

우리가 좀 느낄 수 있는 점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힌두교 브라만교회에서는

당연히 업과 윤회설을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결국 네가 전생에 나라를 말아먹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고

지금 더 네 인생에서 개기면

다음 생에는 더 험한 꼴을 보게 되니까

묵묵히 참고 견뎌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업장이 두텁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아트만이라고 하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영혼이

자기 정화과정이 곧 윤회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정화과정으로서의 아트만의 겉에 있는

오염원의 정화과정을 윤회라고 보고

그래서 윤회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며

진리를 찾아가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형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난 생, 이번 생, 다음 생에

연결되고, 연속되고, 이어지고, 손상되지 않는 불멸하는 영혼

혹은 자아를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근데 이것은 붓다의 견해와는 정반대거든요.

붓다는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도 재생,

다시 살아나거나 죽었던 것이 계속 이어지거나

이런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무아설이라고 하는 것을

산스크리트로 번역을 하면 안아트만이잖아요.

그러니까 붓다가 반대했던 것은

내가 없다이런 말보다도

결국은 같은 말일 수도 있는데

아트만이라고 하는 형이 상학적인 그 실체는 없다

그걸 부정한 거거든요.

 

그래서 아트만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하고 불멸하는 것이며

아주 깨끗하고, 지복에 가득 찬

그런 상상의 존재를,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원래 상락아정입니다.

 

근데 부타는 뭐라 그랬습니까?

무상고무아이며 부정하다그랬지 않습니까?

 

그것이 다 붓다의 교설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아트만사상을 부정하기 위한

그것이 아니다라고 하기 위한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것이 바로 불교의 산법인인

무상--무아가 의미하는 바죠.

 

그래서 붓다의 반힌두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업과 윤회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있고, 그것을 사실로 전제해서 얘기했다기보다는

업과 윤회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교육받지 못한 인도의 사람들에게

그런 게 없고 뭐 딴 거야이렇게 이야기하면은

전혀 접수 자체가 되지 않는

이미 뿌리 박힌 단어이기 때문에

그것을 재해석하고 합리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는 종교적인 단어죠.

업과 윤회라고 하는 것이.

또 도덕적인 상벌과 관련된 단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붓다는 분명하게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주체

전생의 자기 일에 대해서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주체라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도덕적 상벌주의가 아니라

붓다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인과주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원인을 짓는 사람도 나고

결과를 감수해야 되는 사람도 나다라고 하는

자기 책임을 어디서?

현세에서 강조했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붓다도 역시 윤회를 말하기를 삼사라 그러니까

수레바퀴죠.

삼사라는 돌아간다

계속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이렇게 해서 인과법은 철칙이다, 벗어날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인과법을 현세에

자기 책임하에 행동 선택에다가 연결시킨 것이죠.

그런 신비주의적인 종교적인 상벌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과거는 뭐라고 했는가 하면

현재 나의 모습을 보면 되고

만약에 미래의, 내 생애 당신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짓을 봐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붓다는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전생과 내생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재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느냐가

나의 운명과 나의 상태를 결정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강조한 것이죠.

 

그래서 하지만 붓다는 또한

인과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거기에 연이라고 하는

인연과라고 하는 것을 붙여서

연기법으로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인과는 분명하지만

거기에 연이 끼어들면

씨를 뿌리는 것은 인과이고

꽃이 피는 것은 결과지만

그 원인의 결과 사이에

물도 있고, 바람도 있고, 햇빛도 있고, 영양분도 있고, 농부의 손길도 있고

이런 것들이 연이 되어서

그 결과가 좋기도 하고, 결과가 안 좋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을 텐데

그 죄와 벌 사이에

본인이 참회하고 회개하고 여러 가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등등등등

이렇게 하면

나중에 벌 받을 때에도 그것은 참작되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이빨 안 닦으면

이빨이 썩는 충치가 발생해서 이빨을 뽑아야 될 텐데

옛날 같으면 그 충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겠지만은

요즘의 시절 인연을 만나면

과학기술이 의료가 발전해서

그렇게 고생스럽지 않게 이빨을 치료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 이런 게 인과 과사이의 이라고 하는

대단히 복잡한 프로세스가 있다 라고 하면서

이것도 연기법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인과법칙도 굉장히 유연하게

복잡계처럼 설명했습니다.

 

물론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대칭성이

가장 중요한 연기법의 핵심이긴 하지만

어쨌든 원인과 결과 사이에 연이라고 하는

유연한 프로세스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 업이라든지 윤회라든지 이런 것을

삼사라든지 아니면 연기법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살짝살짝 단어를 바꾸면서

점점점점 어떻게 보는가 하면

인간화, 자기 책임, 자기 선택에 의한 운명의 개선

그것이 곧 자유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극락에 가는 것이 아니다.

뭐냐, 처음부터 끝까지 이고등락이다.

 

근데 지금,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락를 느끼는 것은

내세가 아니고 지금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 내가 괴로움이 사로잡히지 않고

지금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되는 거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나온 목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대단히 중시하고

사실은 이것밖에 없다라는 얘기를 조금 더 나아가면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힌두교, 이전에는 브라만교고

붓다 이후에는 힌두교로 발전하는 인도적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열악하잖아요.

사는 게 얘나 지금이나

그래서 참아라, 개기지 말고 참아라

이렇게 주로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래서 만약에 네가 여기서

항의하고 봉기하고 불란을 일으키면

업이 더 두터워져서

다음 생은 더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약간 설득한다라고 할 수 있는데

 

붓다는 인간의 지혜가 깨어나기 시작한 그 시점에서

그렇지 않다.

인간의 운명은 자신이 헤쳐나가야 한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설법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재생은 없다.

진짜는 절대 죽지 않고 영혼 불멸하며

세세생생 몸을 바꾸어서 그 불멸의 영혼의 업장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이런 식의 힌두교적 설명을 거부합니다.

 

그러면 2500년 불교의 논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아니 근데 그럼 윤회가 있는데 나는 없으면

없는 내가 어떻게 윤회를 하냐?

이렇게 무아와 윤회론은 정말 쉽지 않은 상충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고

지금도 완전히 해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점차점차 무아니까 내가 윤회한다이런 말을 못하잖아요.

뭐가 윤회하는가 하면

업이 윤회한다

업 윤회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니 업이 윤회한다고?

그럼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번 생에 내가 죽고, 다음 생에 뭐가 태어나서

그 업을 이어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지 않냐?

그러면 끝나는 거 아니야 논의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그런데 업윤회설을,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설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시키려면

업이 윤회한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파가 있다

이것은 다음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다음 것이 나는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살아나거나

상과 벌을 받는 주체는 없지만

어떤 원인이 있으면 어떤 결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IMF 이후에 한국 경제가

많이 힘들어지고 많은 가정이 깨지고 많은 자살자가 생기고

그 이후에 기업의 종신 고용 관행은 깨어지고

계약제나 비정규직이 많이 양산되고 하는 것들은

다 여파가 있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업보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의 인이 생기면

과는 반드시 나타나게 돼 있다.

이것이 붓다가 이야기한 삼사라(윤회)

돌아간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돌아간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고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고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지려면

과거나 미래로 도망가면 안 되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인식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붓다가 얘기하는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세계거든요.

18, 육근이 육진을 만나서 육식을 만들어 내는 인식의 세계야말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고

세계 자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하는 것을 알 도리는 없다라고 하는데

더 가깝다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인식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그래서 유식이잖아요.

 

이미 그것도 2500년 전에 뇌 과학적인 존재론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인식의 문제가 중요함을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기반을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삼세인과와 육도윤회에 두고 있지만

또한 불교에서 새롭게 제시한 용어는 연기법이고

그 연기법으로 유치할 수 있는 결론은 무아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공이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붓다는 철학적으로 업과 윤회설의

종교적이고, 신비하고, 도덕주의적이고, 상벌주의적인

그때는 그런 정도가 사람을 일깨울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그것을 붓다는 철학적으로 세련되게 정리해서

이 괴로움을 물리치는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최종 병기로

[연기법]을 제시하고

그것의 결과로 [무아]를 제시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연기법, 무아, 공이라고 하는 것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그것을 잘 보면

윤회론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또 다른 자아론,

지금 내가 좋은 일 해서 다음에 극락에 가고

지금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다음에 그 과보를 받고 하는 것은

일관되게 가 있지 않습니까?

 

가 있다는 것

라는 인식 자체가

괴로움의 원천이라고 불교가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는데도

그런 어떤 인과를 윤회에 잘못 적용하면

또 다른 의미의 자아론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미래에 영광과 번영을 바라는

연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윤회가 있냐 없냐? 니가 봤냐 안 봤냐?

윤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 증거를 수집했다.’

이런 것이 붓다가 처음에 제시한 이고득락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뭐든지 올바로 쓰면 올바른 것이죠.

잘못 업과 윤회를 이해하고 적용하변

또 다른 자아론, 또 다른 도피가 될 수 있다 라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교는 마음에 관한 것이고

불교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세계고

불교는 마음이 인식하는 그 세계에서

자유와 평화와 괴로움의 소멸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삼세인과와 육도윤회는

나의 마음 짓는 데 따라서

나는 하루에도 12번씩

육도, 6가지 마음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사는 존재다

이렇게 심리적으로도 해석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2500년간의 논란

아마 영원히 꺼지지 않겠죠.

불교에서 업과 윤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