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전지전능한 神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

Buddhastudy 2024. 4. 25. 20:49

 

 

왜 수행자들은 나를 완벽하게 만들려는 걸까요?

 

모든 생각이 가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일어나기에

나를 최상의 반열에 올리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더라도 사실과 환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가 잘 될 수 있다면

수행의 가치는 무궁하겠죠.

하지만 그 결과가 환상으로 꾸며진 자기만족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가 온전하게 됐다는

불성이나 참나의 상태를 현실적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 최고로 잘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을 믿어 천국에 가면 될까요?

아니면 마음을 비워 열반에 이르면 될까요?

천국에 가거나 열반에 이르면 정말로 가 잘 된 것일까요?

 

천국이나 열반이 실제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가 잘 되는 것과 별다른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공과 차원의 한계에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국과 열반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이런 한계 역시 훌훌 벗어난 상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공과 차원의 족쇄는

천국과 열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꽁꽁 닫힌 자물쇠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1원인입니다.

 

1원인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존재의 실상을 알 수 없고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천국과 열반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이든 열반이든

환상 속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삼라만상의 시작점,

다시 말해 1원인이 무엇일까요?

 

이 의문은 너무나 근본적이고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수행자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대략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1원인은 나를 해체합니다.

1원인이 화두로 올라오는 순간

가 잘 되려는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맙니다.

1원인이 너무 궁금해 미쳐버리겠는데

어느 순간에 해탈과 열반을 떠올릴 수 있겠나요?

그러다 보니 출중한 수행자들마저도

가 잘 되려는 심리로 인해 1원인을 멀리하게 됩니다.

 

--두 번째 1원인은 진리적 평등을 가져옵니다.

해탈과 열반 같은 것은 증명할 수 없는 체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서열이 갈리고

지배와 종속이 만연하게 됩니다.

 

하지만 1원인을 추구하면

스승과 제자의 서열이 깨지면서 평등해집니다.

왜냐하면 1원인을 모르는 건 둘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체험 속에 숨어야지만

언어도단을 내세우며 스승의 흉내를 낼 수 있는데,

1원인을 꺼내 드는 순간 발가벗게 되어

숨을 곳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세 번째, 아무리 궁구해도 1원인의 답을 찾을 수 없어 쉽게 포기합니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시작점이 있어도 모순이고 없어도 모순이 됩니다.

양자 모순에 걸리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보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지요.

 

 

이상과 같은 3가지 이유에 의해서

수행자들은 1원인을 멀리하고

체험적 수행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해탈과 열반을 체험해서

탄성을 지르고, 오도송을 읊조리는 모습이 좀 괴이하지 않나요?

1원인을 모르는데 무슨 깨달음 타령을 한단 말인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오뉴월의 개가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상팔자 타령을 하는 것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좀 가혹한 말이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른다면

오늘날의 수행문화는

개그콘서트의 단골 소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스승이란 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1원인을 감추기에 급급하고,

제자들은 나가 잘되기 위해

스승의 체험주의 수행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코믹한 수행 문화가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세존이 그 방향을 틀고

용수보살이 브레이크를 밟아도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지적 용량이

한 단계 진보하지 않는 한

이런 현상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깨어나는 소수의 수행자들을 위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이성에 눈을 뜨면서

처음으로 의심을 품었던 1원인에 대한 화두입니다.

 

진리적으로 평등한 가운데

존재를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길

그것은 1원인에 대한 자각에 있습니다.

 

진리는 아느냐 모르느냐의 영역이지

체험으로 느끼는 영역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체험으로 느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체험을 1원인의 답을 찾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인 것이죠.

 

어찌 되었든 결론은

1원인에 대한 자각으로 귀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단예소피아]

지루하리만큼 반복적으로 1원인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수행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