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자기사랑) #2

Buddhastudy 2024. 5. 20. 19:35

 

 

이번 영상, 자기사랑 두 번째 시간입니다.

저번 파트1에서, 첫 번째 영상에서

내면아이하고 소통하는 법에 대해서 한번 말을 해봤죠.

 

내면아이와의 소통

이게 심리학이 발전하면서

내면아이에 대한 연구는 지금 활발하게 진행이 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엔 뭡니까?

내 안의 감정과 느낌 다루기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감정과 느낌이라는 건 정말 중요한 거예요.

생각, 감정, 느낌이라는 삼총사가

내면의 움직임

삼총사가 사실 고대로부터 수행 전통 안에서는

항상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동양적인 수행전통 안에서는

그 앎의 영역, 앎이라는 것,

직관적인 앎을 조금 더 강조를 하다 보니까

살짝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었고요, 감성적인 면이.

 

반대로 서양권에서는 너무 감수성에만

종교적인 믿음, 종교적인 감성이 강조되다 보니까

치우쳐서

직관적이고 이성적인 앎이 또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었죠.

근데 이건 뭐냐 하면

동서양 캐릭터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생각, 감정, 느낌이라는 것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감정하고 느낌 다루기, 생각 다루기

이것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근데 우리가 받았던 교육이 지금 근현대로 들어오면서

어떻게 보면 좀 서구식 교육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역사가 서양 역사를 또 지배를 해왔기 때문에

조금 알아봐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재밌게 그냥 들어보시면 돼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사막의 수도생들의 시대가 있습니다.

이때가 언제냐면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박해의 시대가 멈추게 되면서 [순교]의 기회가 사라졌어요.

그 당시에는 [순교를 하면 직천당 간다]라는 어떤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순교라는 것이 영광이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였죠.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털컥 로마의 국교가 돼버립니다.

로마의 국교가 돼버리면서 순교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거죠.

그래서 뭡니까?

새롭게 나타나게 된 형태가 은수수도 생활입니다.

은둔수도 생활인 거예요.

그것을 은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사막과 광야의 차이 아세요?

여러분 광야는 그러니까 황량한 바위산들인 거예요.

사막은 모래 언덕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가고, 동굴을 파고 들어간 다음에

은둔하여 수행하는 생활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염성은

항상 조금 이렇게 뭐랄까

속죄의 그런 영성이 있었기 때문에

속죄라는 개념 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고, 속죄해야 된다.

수도 생활의 형태가

고행, 단식, 노동과 기도

이런 것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어떤 생활이었어요.

 

이렇게 살던 목표가 뭐였냐면 모토가

순교하고 관련이 있어요.

순교에서 직천당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고행 생활을 통해서

느리게 순교하는 형태를 만든 겁니다, 일종의.

수도생활 자체를, 수행생활 자체를 느리게 하는 순교로서 받아들여서

삶을 그렇게 만들어 나갔던 거예요.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 형태가

아니면 기타, 수많은 종교들, 다른 종교들도 있지만

수도생활의 형태가 조금 극단적인 고행의 형태를, 힌두교도 많아요.

취하는 그 이유 중에 하나예요.

느린 순교.

3040년씩 걸리는

일생을 다 바쳐서 걸리는 일종의 순교로 만든 거죠.

그러니까 사서 고생을 조금 하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수행은 이렇게 해야만 된다.

?

그래야지 나의 업보를 이 삶 안에서 조금 속죄를 하고 간다.”

그런 사상도 또 있었던 겁니다.

 

여하튼 광야로 나간 이런 수도자들은

내면의 적나라한 현실과 부딪히게 되죠.

자기 자신의 바닥을 보게 되는 거죠.

 

저도 그랬습니다, 제 바닥을 봤어요, 수도 생활하면서.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과 내면의 진실과 딱 맞부딪히게 될 때

생각, 감정, 느낌을 다루는 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죠, 자연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에바그리오 폰티쿠스라는 교구에 의해서

<로기스모이>라고 불리우는 영성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내면의 목소리들 감정, 느낌, 생각, 의도, 욕구 이런 것들을 다루는 법이에요.

 

그러면서 뭡니까?

중세가 지나고 철학하고 심리학이 발달하면서요

인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생각, 감정, 느낌을 다루는 법을

중요한 주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요즘에는 거의 상식이 되어버린

내면아이에 대한 심리학이 출연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우리한테 익숙한 심리치유란 말이 있죠.

심리치료, 치유.

이것은 사실 내면아이의 치유를 말하는 겁니다.

내면아이를 치유라는 거.

 

근데 이게 왜 중요할까요?

중요합니다.

?

[우리 안의 관념이 바로

우리의 현실을 출력해 내기 때문]이에요.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안의 내면아이들이

우리의 현실을 출력해 내고 있기 때문이에요.

무섭죠?

 

관념이라는 것은 생각의 흐름이에요.

그리고 생각의 흐름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인상을 동반합니다, 1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리고 그것이 느낌과 감정의 형태로 작용을 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내면아이라는 용어로 상징되는 감정과 느낌을 치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내 삶을 출력해 내는 카르마, 업장이라 그러죠.

이것을 재정비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저희가 관념 분석반을 운영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예요.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통 현실창조 영성, 시크릿을 접하시는 분들은

이런 거 다 건너뛰고

어떻게 하면 심상화 테크닉을 통해서 뇌를 최면걸어서

원하는 현실 원하는 결과를 도출을 할까

여기에 집중이 되는데요.

이거는 사실 이야기를 하면은

내면아이의 카르마의 재정비

근데 내면아이의 치유가 없이는 그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요.

쓸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심상화를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를

도출하려고 하는 그것 자체에 들어있는 마음도

살펴보셔야 되는 거예요.

어떤 내면아이들이 작용을 하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지.

 

가장 중요한 건 내면아이의 소통이에요.

내면아이의 치유 작업이 바로 자기사랑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자기사랑이 없이

어떤 심상과 테크닉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면아이와 소통]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돼요.

나와 연결되어서 규정된 모든 것을 사랑하고 허용하려면 먼저 뭡니까?

이 내면아이의 치유가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대표적인 영성이 호오포노포노 아니면 세도나메서드

이런 것 들이죠.

 

 

본론으로 들어가서

실천적인 방법을 하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실천적인 방법을.

왜 이게 필요한가?

 

내면아이하고 여러분들이 막상 대화를 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감정을 대하는 순간, 어떻게 된다고 그랬죠?

은이 중에 동일시가 되기 때문에

대하는 순간 거기에 끌려들어 가서 바로 떡이 돼버려요.

떡이 돼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나의 특징 중에 하나인 뭡니까?

스리슬쩍 동일시의 위력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면아이의 소통 작업을 제대로 하려면

대상이 되는 감정, 느낌, 기억, 인상 등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야 돼요.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게 뭘까요?

[구경꾼의 시선]입니다.

바로 [주시자, ‘관찰자의 관점’]이에요.

 

여기서 주시자 관점을 오래 수행을 하다 보면은

오히려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떤 편안함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아요.

빠져버립니다.

잘못하면 주시자 중독이 될 수 있어요.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감성의 영역을 외면하게 됩니다.

? 편하니까.

 

모든 내면의 움직임, 감정, 느낌들이

감성 영역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고 있으니까

너무 편한 거예요.

예전에는 계속 끄달려 다녔거든요, 떡이 돼서.

근데 지금 물건 쳐다보듯이 보는 게 가능하니까

거기에 끌려가지 않는 거죠.

이게 너무 편하니까

여기에 머물러버리고 마는 경우가 또 많이 생겨요.

주시자 명상, 잘못 수행하다 보면

 

이게 잘못 수행하면 이게 뭐예요?

감수성이 결여 된 좀비가 되는 거죠.

행복한 좀비예요.(감성영역이 메마른 그저 보는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러나기는 물러나되

[어머니의 마음]으로서의 주시자가 되어서 물러나면 됩니다.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내면아이하고 대화하고, 사랑을 전해줄

[어머니 의식]을 하나 마련해 주는 겁니다.

 

이때의 주시자는 어머니 의식이 아니에요.

어머니 의식이 아니라

어머니 의식과 내면 아이를 동시에 보고 아는

배면의 앎이 또 생겨납니다.

그것으로 후퇴를 거죠. 전체적인 앎(이것이 주시자).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어머니의식은 자기사랑을 위한 도구로 쓰이게 되는 거죠.

 

그럼, 뭐가 필요합니까?

여러분의 가슴을 잘 개발하셔야 돼요.

감성영역의 수행 또한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감정이나 느낌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볼 수 있는 주시사 명상과 더불어서

내 가슴의 느낌과 감정을 진선미로 채우는 명상,

감성영역의 명상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단순히 주시자만 수행하면 어떻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감성영역이 결여되어 있는 좀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다?

주시자 명상과 병행을 하는 거예요.

주시자 명상과 더불어 이 감성영역, 느낌 느끼기

느낌 느끼는 훈련도 병행을 해주는 거예요.

 

이게 자기사랑 실전 훈련의 첫 번째 스텝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자기사랑이 되어야

여러분의 삶이 실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사랑 자체가 시크릿의 한 축이 되는 것이에요.

어떻게 보면 핵심이에요.

 

왜 그러느냐?

자기사랑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이것 자체가 바로 관념의 허용과 재규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주시자 명상이야 뭐 그렇다고 치고

감성영역을 개발하는 방법은 뭐가 있는가?

뭐가 있을까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매 순간 자체를 충만하게 감사와 사랑으로서 한번 느껴보는 거예요.]

계속 감사와 사랑의 느낌을 한번

의도적으로라도 처음에는 한번 느껴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은 점점 이 가슴이 열립니다.

가슴이 열리는데

이때도 주시자 관점은 유지할 수가 있어요.

 

주시자 관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냥 무미건조하게 계시지 마시고

가슴에서 사랑과 감사의 불길을 일으켜 보는 거예요.

지켜보는 거예요. 계속 계속,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때 감성 영역이 점점 더

이 가슴 차크라가 활성화되게 되고요.

이 활성화된 감성 영역으로부터

내면아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 이것부터 만드세요.

그다음에 내면아이와 대화하는 수순으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심플하게 살펴봤습니다.

자기사랑, 나 자신을 사랑하기

과연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영상을 2개로 나누었으니까요.

첫 번째 영상하고, 두 번째 영상을 먼저 살펴보신 다음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개인한테 맞는 방법들이, 맞는 방식들이 또 나타날 거예요.

 

인터넷은 정보의 홍수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죠.

뭐 어떤 식으로 내면아이와 소통하고 막 그러는 거에서부터

주시자 명상은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정말 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아카데미 카페 내에도 많은 정보들이 있어요.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 편한 대로 이용을 하면 되시고

오프라인의 수업을 들으셔도 되고요.

 

이런 식으로

여러분들이 그 어떤 방법이 되든지 간에

마음부터 한번 만드신 다음에

첫 발자국을 떼어놓는 게 중요해요.

 

내가 첫 발자국을 떼기 시작하면

길은 계속해서 알아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들한테 꼭 필요한 그것이.

 

간단하게 한번 살펴봤고요.

자기사랑에 대한 영상,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또 만나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