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선원

10분經 | 자기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한마디!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6. 5. 18:52

 

 

 

그런 걸 청정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저도.

먹는 거, 입는 거 뭐

이런 게 좀 청정해야 된다

그게 왜 청정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고기도 안 먹고, 밥도 조금 먹고

수행만 죽으라고 하면은

그런 욕구 욕망이라고 하는 걸로 부터 점점 멀어지고

나라고 하는 걸로 부터 점점 멀어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하는 거니까.

해보시라고.

그렇게 되는지.

안 없어져.

 

제가 제 스승님, 선의 가르침을 만나기 직전에

제일 고민했던 게 그거였어요.

밖으로는 내가 뭘 주장하지는 않지마는

화나 뭐 이런 거를 내지 않을 정도는 됐다니까.

웬만한 일에는 뭐 화도 안 나.

 

근데 그래도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가 하고 있는 걸 뿌리째 부정할 때는

좀 화가 나긴 나죠.

근데 나만 알지, 나만

밖으로는 안 나오니까.

 

가족을 이루고 살다 보면

꼭 그런 사람이 있어요.

다른 거는 화 별로 안 나.

그러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적이더라고.

원수더라고 원수.

 

근데 그 원수가 나중에 보면

자기의 가장 큰 스승이더라고요.

아니 이게 어디에 있다가

이 좁쌀만 하게든 이렇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내가 참 그 큰 뜻을 품고 산속에까지 들어가서

어렵게 수행했는데

이 좁쌀만한 이거 하나를 지금까지 못 이기고

이놈을 못 없앴다는

이거 있잖아요, 이거, 자기는 알거든.

 

그러니까 이 뿌리를

실낱같은 이 뿌리 하나를 못해냈다는 이게 딱 있어요.

도대체 이 뿌리를 어떻게 하면 캐낼 수 있을까?

이게 제 최고의 고민이었어요.

제가 제 스승님 만나기 직전에.

이것만 캐내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저는 이게 최고의 고민이었기 때문에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제 스승님 음성 법문을 듣고 쫓아간 것도 아니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쫓아간 것도 아니고

제 아는 어떤 분이

무심선원 소식지 가지고

제가 살고 있는 산속에 오셨더라고.

 

근데 저보고 좀 보라는 거예요, 저보고.

이분은 깨달은 분인지 아닌지 자기가 한번 봐이러더라고.

 

제가 본다고 깨달은 분인지 아닌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런 감은 있어요.

저희가 정말로

이 문제 하나 해결하고자 하는 어떤 진지하고 깊은 뜻이 있다, 그러면

부처를 얘기하고 깨달음을 얘기하고, 도를 얘기하고, 기를 얘기하고, 하늘을 얘기하고 뭐 어쩌고 이런 얘기 들어보면

적어도 사이비인지, 사이비 아닌지는 감이 와요.

 

그리고 무수하게 제가 살고 있는 이쪽을 왔다 갔다 했던

그 수행자들이 있었을 거잖아요.

이 사람들이 와서.

하여튼 말들도 길어

한 번 시작하면 막 3시간 4시간 늘 하시더라고.

 

그걸 이렇게 묵묵히 하시니까

저는 듣는 편인데

저는 주로 많이 듣는 편이에요.

이 공부하고 잘 안 듣는 편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근데 들어보면 알겠더라고, 대충이라도.

저거는 이 바른공부는 아니구나.’

 

뭔가 좀 바른공부 같지가 않아.

그래서 저 교화하려고 저희 집에 오셔서

몇 날 며칠 주무시고 가신 분들도 있어요. 저 교화하려고.

근데 들어보면 제 마음에 안 차더라고

 

저는 어쨌든 실낱 갔다고 하든

아직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뿌리 하나 캐내는 여기에

저도 모르게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소식지 가져와서 저보고 한번 이렇게 보라고

딱 이렇게 펼쳐진, 딱 펼쳐졌을 때, 제 눈에 들어온 게

마음이란 본래 없는 거다.”

이 말 한마디였어요.

 

제가 충격을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저는 지금 제 마음에 있는

어떤 그런 뿌리를 캐내려고

지금 최대의 화두고, 최고의 일인데

그래서 어떻게든 이걸 캐내려고 제 나름대로

참선하고, 화두하고, 이랬을 거 아니에요.

 

근데 마음이란 본래 없대.

아니 이 짧은 몇 자 안 되는 이 글자가

그냥 와서 치더라고 그냥.

그냥 와서 쳐버리더라고.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산에 들어와서 뭐를 한 거지?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이거 하나 없애려고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쳤는데

본래 없다

본래 없다 그러면은

이걸 뭐 없앨 수 있는 겁니까? 뭐가 생겨나기를 하는 거...

아니 마음이라고 할 게 없는데

뭐가 생겨나고 뭐가 사라져.

그리고 어떻게 없애.

본래 없다는데.

 

내가 그 어떤 간격이었어요, 그 간격.

지금 얘기를 해보면

그 간격, 그 틈이었다니까

그러니까 이 말에 그냥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근데 뭐 우리가 그런 말을 안 들어본 거냐?

무아다’ ‘무심이다이런 말을 그럼 평소에 안 들어봤겠습니까?

그래도 불교 공부를 하는데.

 

근데 그때 들었을 때는

이 말을 그냥 이 관전자 입장으로 들은 거야, 쉽게 말해서

무아가 뭐고, 무심이 뭐고 이런 걸로 들은 거예요.

이런 걸로 생각한 거고.

 

그러니까 똑같은 말도

그게 자기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말들이 있어요.

그건 자기 상태가 그렇게 돼야 되는 거야.

 

정말로 무아 무심이라고 하는 이 한마디

무아라는 말 아니어도 좋으니까

자기하고 적어도 정말 이렇게 전면으로

한번 자기하고 이렇게 부딪힌다고 해야 되나?

이럴 때 그런 말이

자기 심장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말이고 뜻이고

아 이런 말 저런 말 앎의 문제야, 그냥 앎의 문제.

 

제가 본래 마음이란 없다

이 말을 알아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서

제 심장으로 들어왔겠습니까?

 

저는 본래 마음이란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경험을 해보지도 않았어, 그때는.

단지 제가

제 마음에 있다고 하는 그 뿌리

이거를 캐내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는 전면전을 하고 있었거든, 제 나름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전면전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이 확 다가오는 거지.

 

그 한마디 때문에 제가 부산까지 갔어요.

그 딱 한마디 때문에.

 

그래서 첫 법회를 참여했는데

도가 뭡니까?”

이겁니다.”

이렇게 가르치시데.

 

도가 뭡니까?

이겁니다.

이렇게 가르치셔.

 

또 여기에서 충격을 어마어마하게 받았죠.

그것도 뻔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뻔해.

 

저는 이 도라고 하는 걸

제가 이 죽자 사자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지금은 없어요.

지금 있는 건 수행밖에 없지.

 

내 마음속에서는 수행이

내 머릿속에서 수행이 있는 거지

도가 있지는 않잖아.

이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어떤 도는 나중에 있는 거지

내 머릿속에서는.

 

도가 뭡니까? 부처가 뭡니까? 하는데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이겁니다. 이겁니다.

이렇게 가르치시는 거야.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처음 봤고

처음 경험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산에서 도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하고 이랬던 게

또 여기에서 한 번 와장창 깨져버렸어요, 와장창.

 

아무리 제가 이 짧은 지식이지만

이렇게 가르치는 걸 부정할 근거가 1도 없었어.

비로소 도가 뭡니까?’

이겁니다하고 이렇게 바로 가르치는

이런 가르침을 접하니까

오히려 제가 그나마

이렇게 짧게 알고 있는 어떤 불교, 또는 이 가르침

이런 것들이 이래야 되는 거구나

이 확신이 생겼어요.

 

왜냐하면 불교공부를 좀 하다 보면

내가 직접 안 읽어도, 들은 얘기로만 해도

도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고

깨달음 아닌 게 없다.

이런 말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들었거든.

 

네 준비하고 아무런 상관없이

네가 준비가 돼 있냐? 안 돼 있냐?

네가 깨달았냐? 못 깨달았냐?하고 상관없이

도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다는 거야.

 

그럼 깨달은 사람 눈에는

이건 생각이었지만, 그 뒤에 생각이었지만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부처 아닌 게 없을 거 아니야.

도가 뭐냐? 부처가 뭐냐?

그럼 이겁니다.

이겁니다.

볼펜입니다.

잣나무입니다.

컵입니다.

막대기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가르치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