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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經 | "문득 깨닫는다!"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6. 12. 19:04

 

 

그래서 여래선을 문득 깨달으면

돈각, 여래선이다 이렇게 나왔는데

 

보통 우리 깨달음을 돈각 또는 돈오라고 그러죠.

돈오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돈오라고 쓸 때 이 오자는 깨달을 오자예요.

돈각이나 돈오나 다 같은 말이에요.

 

돈오라고 하는 말은, 이 돈각이라고 하는 말은

문득 깨닫는다는 말이에요.

문득 깨닫는다.

 

이 말 하나 이해하는 데도 저도 몇십 년 걸린 것 같아요.

문득 깨닫는다는 말을, 돈오라는 말을 제가 안 들었겠습니까?

저도 그래도 불교나 이 마음공부에

젊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20대 때야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 하고

조금 더 지나서 내가 본격적으로 이 불법을 공부해야지

이런 생각이 더 강했죠.

 

그렇지만 20대도 당연히 돈오라든지

특히 그때는 아무래도 머리로 불교를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게 강했기 때문에

젊을 때는 아무래도 더 그러죠.

젊을 때는 머리가 막 팍팍 돌아가잖아요.

 

그러니까 불교든 종교든 세계의 종교든

막 자기 머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가

그때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게 이 돈오돈수 돈오점수였어요.

 

왜 그러냐?

이거 가지고 송광사하고 해인사하고 서로 논쟁을 했거든.

기억나시죠?

성철 스님 믿는 해인사 쪽에서는 돈오돈수를 주장했고

송광사 쪽에서는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뭔가 다르니까 서로 논쟁을 했겠지

하고 저도 본 기억이 있어요.

이게 뭐가 다를까? 어떤 게 그럼 더 옳을까?

이런 관점으로.

이런 관점으로 그걸 제 나름의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기도 하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근데 그 의문이 제가 깨닫기 전까지 안 풀어졌어요.

돈오돈수가 옳은가? 돈오점수가 옳은가?

이 생각이.

 

근데 그거는 둘째 치고

돈오라는 말을 이게 뭐지?’ 하고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 이거 가지고

그렇게 나름 생각도 해보고, 고민도 진지하게 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 두 가지가 공통으로 쓰고 있고, 인정하고 있는 게

돈오입니다.

 

양쪽에서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건 돈오예요.

돈오 뒤에 점수냐 돈수냐를 가지고 논쟁한 거거든.

 

근데 저는 돈오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그냥 말로만 알아듣는 거지

문득 깨닫는다

 

문득 깨닫는 게 어떤 건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말로만 알아요.

문득 깨닫는다이렇게

 

그러니까 문득 깨닫는 게 뭐냐고.

그러니까 점수냐 도수냐 가기도 전에

돈오에서 걸렸어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해요, 우리 생각은.

그냥 자기가 안다고 넘어가 버려.

돈오는 안다고 넘어가 버린다니까

돈오가 뭐냐? 문득 깨닫는다 하고 넘어가 버려.

그러니까 문득 깨닫는다는 게 뭐냐고.

 

이거에 대해서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한 거예요.

그냥 안다고 넘겼을 뿐이지.

그러고 거창하게 돈오점수가 옳으냐? 돈오돈수가 옳으냐?를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니까.

돈오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러니까 이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거하고 똑같죠.

 

대부분 저같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 불교를 깊이 있게 공부를 못하시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저같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말을 안다고 넘어가버리기 때문에.

 

사전적인 의미는 알지.

돈오, 이 돈 자가 그냥 순간이라는 말이거든.

오자는 깨달을 오,

그러니까 순간 깨닫는다.

 

국어시험 보면 우리 맞출 수 있는 말이에요.

근데 순간 깨닫는다. 문득 깨닫는다가 뭔지는 모른다니까.

그렇게 쓸 수는 있다니까 초등학교 6학년생도 쓸 수는 있어, 시험 문제 나오면.

 

그렇게 사전에 나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정작

돈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도

실제로 깨닫기 위해서는 뭘 하고 있냐 하면

수행을 하고 있어요.

수행해서 깨닫는 게 돈오입니까?

점오지.

 

그래서 돈오와 상대말은 점오입니다.

점차로 깨달음에 가는 걸 점오라 그래요.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거나 또는 이 마음공부를 하거나

깨달음을 위해서 뭔가 이렇게 공부를 하신다는 분들 한번 둘러보십시오.

돈오를 하고 있는지 점오를 하고 있는지 .

100% 점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깨달으면 돈오라고 그러고

입으로는 돈오야.

근데 실제 하고 있는 건 점오야.

 

왜 그러냐?

점오는 우리가 이해가 돼요.

왜 이해가 되냐?

우리가 서울을 광주에서 가려면

저희 선원에서 간다 그러면

송정역까지 버스를 몇 번을 타고 가서

송정역까지 가서

KTX 표를 끊어서

몇 번 홈에서 그걸 타고

어디 아산역을 거쳐서 광명 지나서 용산역에서 내린다.

이게 되거든

이게 우리 세간에서 하는 일이야.

우리 세간에서는 거기에 익숙해져 있어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목표까지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제가 좋게 말해서 익숙해져 있다, 그러는 거지

오염돼 있어요.

 

그러니까 깨달음도 그렇게 해서 깨달아진다.

그럼 우리는 너무 쉽게 이해가 된다니까.

이해가 되니까 , 그렇지하고 그렇게 해버려요.

저처럼.

 

근데 돈오다 그러면은 말만 알고

돈오가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릅니다.

당연히 돈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어떻게 함이 없으니까.

 

문득 깨닫는데 어떻게 합니까?

순간 깨닫는다는 말인데

이걸 뭘 어떻게 해야 순간 깨닫습니까?

뭘 어떻게 하면 점오가 돼버린다니까

그걸 유위라고 그러죠, 불교에서는.

 

그러니까 유위무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그런 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위를 알고 있다 그러면 제가 인정을 합니다.

유위는 우리가 다 알고 있어,. 이해하고 있어.

 

근데 거기와 상대되는 말은 무위

사전적 의미밖에 몰라요.

뭐가 무위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함 없이 한다라는 말이 뭔 말인지 아무도 몰라요.

 

근데 말로는 불법은 무위법이라고 그러거든.

유위법이 아니라고 그러거든.

육조단경에서도 육조스님이 딱 말씀을 해놓으셨으니까

부정은 못하죠.

근데 실제 하고 있는 건 유위를 하고 있다니까.

그러면서 깨달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 그러고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고 있어요.

앞뒤가 안 맞잖아, 무위법인데.

 

 

근데 하여튼 이런 거에서 제가 이렇게 벗어날 수 있었던 거는

참 오래 걸렸어요.

실제로 굉장히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생각으로는 뭐 다 그렇게 돼버리는데.

 

당연히 무위는 뭔지 모릅니다.

무위가 이건데 어떻게 알아요?

돈오가 이건데 어떻게 알아?

 

그래서 돈오를 알려면은

그냥 문득 자기 스스로 이런 데서 문득 깨달아야 되는 거야.

깨닫지 않으면 돈오가 아니지.

 

그러니까 생각이 거기에서 딱 멈춰요.

아니 이어지는 사람도 있겠지.

어떻게 문득 깨닫지?”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도 있겠지.

어떻게가 들어가면 이건 점오가 된다니까, 유위가 돼버리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잖아.

내가 뭔가를 하는 게 유위지 무위겠습니까?

 

실제로는 우리가 경전이나 불교에서

돈오다, 무위다, 실상이다, 뭐 이런 얘기 있잖아요.

그게 뭔지 모릅니다.

공이다, 특히 공.

반야심경에 공 나오죠?

오온이 개공이다, 뭐 색즉시공이다

공중에는 할 때 공 나오잖아요.

그건 우리가 우리 머리로 이해되고 알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이해되고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면

그건 불법이 아니지

진실이 아니라고.

 

실상이 어떤 거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거죠. 그거는 이해가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그런 말을 하려면

유위니 실상이니 돈오니 이런 말을 하려면은

거기에 통해야 되는 거야.

이해가 아니고, 말이 아니고, 생각이 아니고, 그냥 통해야 돼요.

그걸 여기에서는 돈각료라고 표현한 겁니다.

료는 마쳤다는 거예요. 마쳤다.

 

그래서 어떤 불법을 제대로 이렇게 가르쳐 놓은 거를

그런 경전을 료이경이라고 그러거든, 료이경

조금 가르침이 철저하지 않다 그러면 불요의경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거 마쳤다는 거예요.

마쳤다는 건 이거예요.

그래서 돈각료다.

 

돈각료는

그냥 이 실상을, 이 진여자성을 문득 깨달으면

그걸 또 여래선이라고도 하고, 조사선이라고도 하고, 또 여래 조사 빼고 그냥 선이라고도 하고, 도라고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하여튼 여래선이라고 하는 건

돈각료도 이 진실을 얘기하는 거고,

여래선이라고 하는 것도 이건데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간단히 얘기하면 돈오돈수를 지금 얘기하고 있어요.

 

여기에 문득 깨달으면 육도만행이 체중원이다.

그냥 여기에 다 갖춰져 있다.

이 말이야. 육도만행이

육바람일과 우리가 하는 모든 이 만행.

그러니까 온갖 수행이라고 해도 좋고

삶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거라고 해도 좋습니다.

여기에 다 갖춰져 있다는 거야.

이게 돈수를 얘기하는 거거든.

 

여기에 통하면은 할 게 없어.

이미 여기에 통했는데

여기에 통하기 위해서 뭐 할 게 또 있겠습니까? 이미 통했는데?

그걸 돈오돈수라고 그래요.

 

물론 이 돈오돈수는 육조단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돈오돈수라고.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그건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이게 어떤 말인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자기가 여기에 통해 보면

그냥 이런 말이 그냥 저절로

그냥 내가 뭔가 무슨 말인지

내가 사전을 찾아보고, 누구한테 듣지도 않았는데

그냥 저절로 확인이 되고, 실감이 되고, 공감이 된다니까.

 

이 진실을 통해 보면

여기에 그냥 온 우주가 다 드러나 있는데

육바라밀만 있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여기에 있는데.

삼세 모든 부처님이 다 여기에 있는데.

 

그래서 이미 여기에 통했는데

여기에 통하기 위해서 뭔 수행을 할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통하기 위해서 할 수행도 없고

통하고 나서 해야 될 수행도 없어요.

그걸 돈오돈수라고 그러는 거야.

 

그럼 돈오점수는 뭐냐?

그러니까 돈오돈수하고 결론 먼저 얘기할게요.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논쟁할 대상이 아닙니다.

주제가 똑같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보는 눈이 없으니까 그래요.

보는 눈이 없어.

서로 다른 주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돈오점수는

수행이 아니고

물론 똑같이 수행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도

이 내용이 좀 다르게 쓰죠.

다르게 씁니다.

사실은 선을 공부해 보면

이 수행이라는 이 단어를 쓸 필요가 없어요.

선을 공부해 보면

 

근데 하도 그냥 마음공부를 하고 불교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그냥 온갖 수행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하고 있는 그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여튼 그렇게 하고 있는 그게

이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고, 장애하고 있다는 걸 얘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행이라는 이름을 쓰긴 써요.

수행을 긍정해서 쓰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돈오점수는

돈오점수가 돈오돈수를 부정해서 나오는 말이냐?

전혀 그렇지가 않죠.

돈오돈수를 부정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못 깨달은 사람입니다.

깨달아 보면 돈오돈수인데, 이걸 어떻게 부정을 하냐고.

 

자기가 여기 통해 보면 돈오돈수예요.

할 게 없다니까.

 

그러면 돈오점수가 이 돈오돈수를 부정해서 나온 말이 당연히 아니겠죠.

그래서 제가 주제가 다르다고 그러는 겁니다.

당연히 주제가 다르죠.

 

그럼 왜 돈오점수를 얘기했냐?

이 돈오점수를 얘기한 경전은

이 말이 나오는 이 경전이 어디에 있냐면

능엄경에 나와요.

이즉돈오理卽頓悟나 사비돈제事非頓除다 이렇게 나와.

 

이즉돈오라는 말이 돈오잖아요.

거기서 리_ 라고 하는 것은

한자로는 이치 할 때 리인데

이게 우리가 한자로 표현한 리가

이 도를 얘기하고 깨달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깨달음이라 하면

돈오_ 그냥 곧장 깨닫는다, 문득 깨닫지만

_ 이 사라고 하는 게 그러니까

이 돈오점수는 첫 번째 돈오까지는 똑같이 얘기하고 있어요.

근데 이 두 번째 주제가 뭐냐 하면 이 사예요.

돈오돈수에는 이 사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법만 얘기하지.

그래서 주제가 다르다고 제가 그러는 거예요.

 

이 사라고 하는 건 뭐냐?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오염된 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분별 망상에 오염돼 있는 거.

그게 사람이죠.

그걸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근데 실제로는 분별 망상 탐진치 삼독 속에서 살았다하더라도

우리가 타고난 이 마음

그걸 본래 마음이라고 그러고, 진여자성이라고 그러고,

깨달음, , 부처, 실상이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우리 본래 마음이 깨끗해지고 더럽혀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럼 분별 망상이라고 하는 게 뭐냐?

그러니까 희한한 거야, 중생의 병이

 

우리 본래 마음이 희한한 게 아니고, 깨달음이 희한한 게 아니고

이 중생의 분별 망상이 희한한 거예요.

왜 희한하냐?

도깨비놀음이기 때문에.

 

뭐가 없는 데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죄가 있다, 업이 있다, 전생이 있다, 다음 생이 있다

이런 일이 있다 저런 일이 있다.

이렇게 착각하고 있어.

거기에 그냥 길들여져 있어.

그걸 이제 오염이라고 그래요.

버릇이 돼 있다는 거예요.

 

그게 평생 버릇된 겁니다.

옳고 그름, 이럴까 저럴까, 평생 버릇된 거예요.

 

근데 딱 통하고 보면 그런 일이 없어.

내가 현실이라고 그러고,

사실이라고 진짜라고 하는 그런 일이 없다니까.

 

그러니까 한번 가만히 보세요, 경전에서 하는 얘기들을.

경전에서 눈병 얘기하죠.

자기 눈에 병이 있으니까 허공에 꽃이 보인다고.

근데 허공의 꽃은 본래 없습니다.

근데 자기는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병이 있어서.

그 병이 무슨 병이냐 하면

착각하는 병이야.

 

이 착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착각이에요.

그래서 꿈 비유도 하고, 막 꿈 얘기도 하고 이래요.

이 경전을 보면은.

 

희한하게도 그런 착각하는 병에 걸려서

없는데 있다고 여기고

그걸 가지고 씨름하고 몸부림친다는 거야.

그래서 제가 귀신놀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분별 망상 속에 살 때는

절대 귀신놀이라고 생각을 못하지, 진짜니까.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거니까

진짜라고 여기는 거지.

그걸 현실이라고 여겨요.

그걸 현실이라고 여기는 한, 불교의 가르침이 들어가겠습니까?

불교의 가르침은 간단한 건데

반야심경에 딱 나오는데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 공이라고 딱 나오잖아.

공이다라고 딱 얘기하는데 자기는 그게 현실이야.

내 눈으로 직접 봤어.

귀로 직접 들었어.

내 손으로 이렇게 만져서 내가 이렇게 촉감을 느꼈어.

그걸 현실 사실이라고 여기는 거야.

그게 중생의 병이에요.

 

그러면서 반야심경은 외워.

조견오온 계공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면서 외운다니까.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네가 진짜라고 여기고 있는 그게 네 착각이다.

그게 네 분별이고 네 망상이다.

그게 사라지면 그게 사라지는 게 깨달음이다라고

수도 없이 경전에서 얘기하고 있거든.

반야심경도 그거 하나 얘기하고 있고

 

그래서 심지어 반야심경 뒤에 뭐라고 표현합니까?

전도몽상이라고 표현하잖아.

그게 네 뒤집어진 생각이다.

그래서 원리 전도몽상

그 뒤집어진 네 꿈 같은 생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게 뭐다?

구경열반이다.

 

근데 계속 진짜라고 그래

내가 봤다고 그러고, 내가 직접 들었다고 그러고

세상이 이렇다고 그러고

그걸 진짜라고 그래.

 

그 병이에요.

그 병을 사라고 그러는 거예요.

. 우리 공사할 때도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거 할 때 그 사 자입니다.

 

근데 그놈의 사는

우리가 평생 5060년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냥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이 되어버려요.

자기도 모르게

내가 그렇게 꼭 생각을 해야 되겠다 해서 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 흔적과 자취가 남아 있어.

우리가 여기에 통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 흔적과 자취는

우리가 이 법을 문득 깨닫듯이

흔적과 자취도 문득 다 사라지고 없어진다.

이 말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건 비돈재야

그건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여기에 통해서

우리가 이걸 깨닫는다고 그러는데

여기에 통해서 공부를 해보시면 살아보면

이 돈오점수라고 하는 게 어떤 말인지 너무 잘 알아요, 너무 잘 알아.

사전에서 읽을 것도 없고, 외울 것도 없어, 기억할 것도 없어.

 

물론 돈오점수도 너무 잘 알고, 돈오돈수도 너무 잘 알아.

여기에 통해서 우리가 지내보면.

둘은 논쟁할 게 아니라니까.

 

머리로 헤아려서

이건 이런 뜻이고 저런 뜻이고 하니까

뭐가 다르니까 서로 논쟁을 막 하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들은 머리로 헤아리니까 그러는 거지.

 

자기가 깨달아 봐.

여기에 통해 봐.

그러면 다른가.

논쟁거리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사라고 하는 게 있으니까 그래도 수행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는데

이건 수행을 통해서 극복되는 게 아니라니까.

왜 수행을 통해서 극복되는 게 아니냐 하면

이 사라고 하는 건 환상이에요, 환상.

착각이라고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우리가 이렇게 물들어 있는지

그런 건 모르지만

그냥 자기도 모르게 뭘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할 때

그 버릇된 이 버릇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거야.

그걸 아상이라고 그러죠, 아상

나라고 하는 게 튀어나와 자꾸.

 

근데 이 나라고 하는 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내 위에 있는지, 간에 있는지, 심장에 있는지, 폐에 있는지, 발바닥에 있는지

이런 건 몰라.

그래서 버릇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부딪히는 개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말로 생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도 그랬다고 그랬잖아요.

어떤 게 옳은가?’ 이 생각에서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그냥 끝까지 뭐가 옳고, 뭐가 그런가만 따지려고 하고 있는 거야.

?

옳은 게 좋으니까.

 

그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이 진실에 통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거.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그런가? 이 생각.

그게 갈등이잖아.

자꾸 취사선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