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Pleia] 그동안 이원성 극복이 어려웠던 건, 불가능한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Buddhastudy 2024. 6. 12. 19:01

 

 

이원성에서 벗어나는 법

 

이원성이란 무엇일까요?

이원성을 양극성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현상들이

서로 대립되고 반대가 되는 두 극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극은 서로 쌍을 이룬다 표현하기도 하며

그 예로는

차가움과 뜨거움, 어둠과 밝음, 사랑과 두려움, 풍요와 빈곤, 긍정과 부정 등등

음과 양의 법칙이라 할 정도로

모든 물질적 경험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립되고 반대로 보이는 이원성은

따로따로 떨어진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모두 하나에서 나왔으며

이 두 극은 같은 대상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이원성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원성은 우리에게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경험하기 위해선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거나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선 비교 대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의 극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면

경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차가움이 없으면 뜨거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작은 것이 없으면 큰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비교하여

원하는 것, 필요한 것, 선호하는 것 등을 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물질계 역시

영적인 세계와 극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또한 하나에서 나온 것으로

정도의 다름으로 서로를 비추고 비교하여

인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경험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며 근본 원리가 됩니다.

 

 

이원성은 양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도 다양한 각도로

정도의 차이를 이루는 스펙트럼이 있기에

우리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을 택하든

바로 그것 또한 이원성이 시작하는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원성은 태생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스펙트럼 안에서

어디서 차가운 것이 멈추고

어디서부터 뜨거운 것이 시작되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그 차갑고 뜨거움의 정의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

어린 아이에겐 뜨거운 물이 어른에겐 미지근할 수 있으며

50도의 목욕물은 뜨겁게 느껴질 수 있으나

차를 우려내기엔 결코 뜨겁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같이 각각 다른 양극처럼 보이는 성질이라도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음과 양의 상징적 부호에도 나타나듯

각각의 양극들은 서로 반대로 보이고

상대되는 듯한 성질의 극을 역시 자신 안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성적인 성질을, 여자는 남성적인 성질을

어느 정도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게

그 하나의 예가 되겠습니다.

 

이원성이 없다면

나를 비추어 나인 것과

나 아닌 것을 알아보게 하는 상대적인 요소가 없다는 말이기에

나 자신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활동 역시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원성은 지향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까요?

이원성은 앞에 설명대로

경험을 하며 삶을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원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이원성의 양극을 두고 가치 판단을 하여

한쪽의 가치를 없애려 한다면

이것이 바로 지양해야 하는 점입니다.

 

즉 이원성 자체가 아니라

이원성을 통해 하게 되는 편협한 가치 판단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입니다.

 

어떤 현상이나 상황을 놓고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으로 판단하여

한쪽의 가치를 없애려 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흑백 논리가 대표적인 이원성, 혹은 이분법적인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이원성,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원성의 모든 존재 가치를 똑같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있고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에겐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두 극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그것을 해석, 판단,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원성의 성질을 인식한다고 하여

즉 뜨겁고 차가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분법적 사고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이러한 것을 인식하는 자체가 이분법이라는 것은

잘못 알려진 개념입니다.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억누르겠다는 말이며,

실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이분법은 나쁘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힌 예이며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 나쁘다라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해석을 하고 있다면

그 대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에서 나오는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소위 영성에서 그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에고에 관한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마음, 생각, 몸 등으로

이들이 방해가 된다, 악이다 등등으로만 판단하여

그것의 다른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어떠한 것도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사고가 나빠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나빠서 피해야 한다면

이 또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딜레마이죠.

 

이분법적 사고로 가치를 폄훼하게 되면

가치를 박탈받은 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지속되도록 에너지를 주게 됩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면

그것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 안에도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이 없으면

무엇이 우리의 밝은 면인지 인식할 수 없기에

이 둘은 모두 똑같이 중요하며 같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도 반드시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로 하는 가치 판단은

온전한 진리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음과 양, 긍정과 부정을 모두 인정하고 똑같은 가치로 판단하여

내가 더 선호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균형의 자리이자 중립의 자리이며

이원성을 벗어나는 사고이기도 합니다.

 

중도라는 명분 아래 이쪽저쪽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를 쓰고

오로지 중간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도 이분법적 판단,

이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중립적인 자리는 양극을 모두 포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양극의 가치를 모두 수용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가치도 함께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원성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