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선원

10분經 | 법신, 보신, 화신은 한 몸이다!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6. 19. 19:20

 

 

근데 이미 법신하는 데 어긋나버린 거예요.

이거는 법신도 아니고, 화신도 아니고, 보신도 아니고.

그럼 법신이라는 이름은 뭐냐?

방편입니다.

법신이라고 하는 어떤 진실한

청정법신불이라고 하는 이 부처가 있다는 말이 아니거든.

그냥 방편이야, 방편.

 

이런 방편을 가지고 얘기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되는 거

그거를 이제 다른 말로 하면

분별하는 거, 경험되는 거를

사실이고 현실이고 진실이다고 여기고 있거든.

그걸 집착이라고 그래요.

자기가 보는 모습이

뭐 있는 그대로라고 하든,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

지금 이 모습이 사실이고, 듣는 소리가 사실이고, 이 경험되는 느낌이 사실이다.

이러고 살고 있는 거거든.

 

왜냐하면 우리 이 분별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불교에서는 그걸 육근이라고 그러는데

눈으로 모습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이 6가지

이것밖에 모르고 살기 때문에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거죠.

 

그러니까 이 육근을 벗어난

이 모습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그래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고, 생각을 헤아려서 알 수도 없는 이거에 대해서는

분별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거에 대해서는 우리가 외면하고 살았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을 겁니다.

외면하고자 하는 의지나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세상에도

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가깝고

들리는 소리가 가깝고

느낌이나 생각이 훨씬 가까웠어요.

그렇게 살아왔다니까

그게 버릇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하나하나가

본래는 일인데

알 수 없고, 이해되지 않고, 불가사의한 일인데

그러니까 모습으로 이거 하나를 보여주고 있고

소리로 이거 하나를

냄새로, 맛으로, 생각으로, 느낌으로, 감정으로

자기가 경험되는 모든 하나하나로

실은 이거 하나를 보여주고 있거든.

자기가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우주가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 그런 일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보고자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거는.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자기 어떤 생각이나 어떤 의지나 이 뜻에 따라서

이 법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분명하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고,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이런 일은 아니에요.

 

근데 지금까지

평생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살았거든.

내가 봐서 이거다라고 할 때 우리는 안다고 그러고

저게 뭐지?’ 그럼 모른다고 하고

이러고 살아왔어요, 지금까지.

 

그러니까 늘 자기중심이었던 거야.

한 번도 나라고 하는 걸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잠잘 때 꾸는 꿈에서도 자기중심으로 꿈을 꿉니다.

 

그래서 한 번도 이 나라고 하는 걸 벗어나 보지 못한

그거는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자기가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거나 모르는 그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거든.

 

근데 이거는 내가 이렇든 저렇든

내가 이런 뜻과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든 없든

그냥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하나하나에

그냥 저절로 이렇게 드러나 있고, 실현돼 있는 거거든.

 

모습이 나타나려면 이게 있어야 돼요.

모습이 있다, 그러면 이게 반드시 있는 거야.

이게 없이 모습만 있을 수는 없어요.

 

그건 물 없이 물결만 있다라고 하는 말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물결이 있다는 말은 물이 있다는 말이거든.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물결이 일어난다

이 말까지만 하지 물이 있기 때문에 물결이 일어난다.’ 이 말은 안 해요, 우리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겁니다.

 

무슨 모습이 있다, 그럼 이게 있는 거야

소리가 있다, 그러면 이게 있어요.

근데 이거는 이거라고 할 수가 없지.

 

이거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이 생각의 범위라든지, 냄새나 이 맛으로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거는.

어떤 특정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근데 여기 통해 보면

그냥 너무 당연하게 그냥 일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도 쓸데없는 말이 돼

모습이 있으면 이게 있는 겁니다.’

쓸데없는 말이야. 너무 당연한 거거든.

 

 

예를 들어서 이런 거 하고 비슷하죠.

거울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거울을 찾아서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얼굴이 딱 보인다.

그럼 거울이 있는 거지, 그거는.

자기 얼굴이 안 보일 때는 거울이 없었어요.

없지, 거울은 모든 모습을 비추는 거니까.

 

근데 자기 얼굴이 딱 보인다.

그럼 거울이 있는 거지.

근데 이 거울을 찾으러 다니다가

거울에 드러난 모습을 딱 보는 그 순간,

 

그러니까 우리 분별 망상이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모습을 보는 순간

실제로는 거울을 찾으러 다녔거든.

근데 자기 얼굴이 딱 보이니까

내 얼굴이네하고 내 얼굴 찾았다 하는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 얼굴만 보여.

근데 마음속으로는 거울을 찾으러 다녔거든.

이게 우리 분별 망상이라고 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이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늘 그냥 우리가 그렇게 찾고자 하는 이거 하나를

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거든.

귀로 소리를 들을 때는

소리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소리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관세음이라는 말이 있는 거예요. ‘관세음 보살할 때

이 세상의 소리를 본다.

 

소리는 보는 게 아니거든.

듣는 거거든.

우리 육군으로만 보면.

 

근데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냥 이거를 다 보여주고 있으니까

소리를 본다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까.

물론 이것도 이제 표현이지만

눈으로 본다는 말은 아니에요.

소리는 눈으로 절대 볼 수가 없습니다.

귀로 듣는 거지.

 

근데 이와 반대로도 얘기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모습을 듣는다이럴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 모습이

이 법을 다 말해주고 있으니까.

이때 이 말해준다라고 할 때는

이렇게 입으로 말해주고 소리로 말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는 거지.

 

그래서 모습을 듣는다이럴 수도 있고

소리를 본다이럴 수도 있다니까.

근데 우리가 이 육군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게 전부일 때는

이 말이 안 맞는 말이에요.

 

모습은 눈으로 보는 거고

이거는 뭐 어린이집 가서부터 배울 겁니다.

귀는 뭐 하는 거냐? 소리를 듣는 거다.

소리를 어떻게 듣냐?

그 귀에 고막이 있고 달팽이관이 있고

이렇게 배우잖아요.

눈도 홍채가 있고 뭐가 있어서 이렇게 모습을 보는 거다.

 

근데 여기에서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눈으로 듣고.

마음의 눈으로 느끼고. 마음의 눈으로 생각하는 거거든

그 생각을 한다그러면 이게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분별할 때는

이 자기 생각에 대해서 자꾸 나누어 가지고 판단합니다.

이 생각은 나한테 좋은 생각이고, 이 생각은 나쁜 생각이고.

 

그러니까 그 자기가 옳지 않다고 하는 어떤 생각이나 느낀 감정을

좀 바꿔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분별하고 살 때는.

 

근데 여기에 딱 통해 보면은

이 생기고 사라지는 모든 생각이

이거 하나를 보여주고 있고

이거 하나를 드러내고 있고

이거 하나를 실현하고 있거든.

자기가 평생 찾고자 했던 그거를 다 실현해 주고 있는

모습이고, 소리고, 색깔이고, 생각이고, 느낌이고, 감정이기 때문에.

그 생각에 대해서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하고

가치 판단을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저절로 안 하게 됩니다.

이거니까.

 

그러니까 관점이 다르고, 초점이 다른 겁니다.

자기 생각 느낀 감정이 좋으냐 싫으냐, 옳으냐 그르냐에 초점이 가 있을 때는

옳고 그름이 딱 분별이 돼요.

그래서 옳지 않은 생각이나 느낌 감정이 생길 때는

이걸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야.

그걸 우리가 인위라고 하고 조작이라고 하는 건데

 

물을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물결이라고 하는 게 바다에 가서 보시면

수천 수만의 물결이 그냥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하거든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결은 분별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이 물결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어떤 기준이 있다고 쳐요?

이런 물결은 참 이쁜 물결이고 좋은 물결이고

좀 이루지 못한 물결은

좀 이쁘지 않은 물결이고, 생기다 만 물결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물결이야.

 

초점이 거기에 있으면

이 물결을 보면서 수도 없이 분별합니다.

 

초점이 거기에 있지 않고

모든 물결이 조금도 부족함 없이

스스로 무리임을 증명하고, 실현하고, 드러내고 있음에 초점이 딱 가 있어 보세요.

그러면 어떤 모습의 물결이든 조금도 부족함 없이 물임을 다 증명하고 있음을

이렇게 딱 확인이 되는 겁니다.

이거 생기다 만 물결도 상관이 없어요.

 

자기 기준으로는 이쁘지 않은, 생기다 만, 미운 물결이다 하더라도

물을 증명하는 데는 1도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그냥 온전한 거예요.

그런 걸 우리가 온전하다고 하는 겁니다.

 

생긴 게 온전하냐? 성격이 온전하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게 온전하냐?

그건 다 분별해서 하는 소리고

그냥 지금 이대로 온전한 거예요.

 

왜 이대로 온전하냐?

그냥 이대로 자기가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이 진실을

조금도 부족함 없이 다 실현하고 있거든.

그거를 불교에서는 본래 부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기준과 틀을 가지고

자기 삶을 들여다보면은

나는 이런 게 부족하고, 이런 게 불만족스럽고, 이런 건 좋고 이런 건 나쁘고

계속 나뉘어지기만 하고 분별되기만 합니다.

그걸 우리가 갈등이라고 하고 번뇌라고 하는 거지.

그거밖에 모르니까.

좋고, 싫고, 옳고, 그르고.

 

그렇게 비교하고 분석할 줄밖에 모르니까

거기에는 만족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근데 그게 아니고

내가 뭘 보든, 뭘 듣든, 어떤 행위를 하든 그 하나하나가

그러니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이 하나하나가

그냥 그 물결처럼

사실은 물결이거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하나하나는 물결하고 똑같아요.

해가 뜨고 지는 거하고 똑같아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는 거하고 똑같아

그러니까 꽃이 피고 지는 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 하나하나가 그냥 딱 실감이 되고 확인이 되면

그냥 그대로 온전한 거지

이거 하나를 드러내고

이거 하나를 보여주는 데는 온전한 거예요.

 

이럴 때 우리가 이 초점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어디에 지금 발을 딛고 있느냐?

분별에 발을 딛고 있으면

온전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머릿속에서만 그려집니다.

만족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어.

 

근데 초점이 여기에 있으면

이걸 우리가 보통 이름을 마음이라고 그래요.

자기 본래의 마음.

 

초점이 여기에 있으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냥 일일 뿐이야, 일일 뿐.

 

이 세상 모든 일이라고 할 때는

우리 이 개체의 삶이라고 하는

자기가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사람 만나고

이리 살고 저리 살고 하는

이 모든 것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게 그냥 전부 이 일일 뿐이야.

그냥 이거야.

이거 자기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구하고 얻으려고 했던

이 실상이라고 실상.

깨달음이고, 도고, 부처고, 마음이고.

 

그러니까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특정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곳에 이게 있어요.

 

특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정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곳에, 모든 것에 이게 있어

 

뭐가 있다 그러면 이게 있는 겁니다.

생각이 있다, 이게 있는 거예요.

모습이 있다, 이게 있어.

소리가 있다, 그러면 이게 있어요.

근데 이거는 소리와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모습과 떨어져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이거를 우리가 좀 분별해서 나누어서

이 모습 없고 분별되지 않는 걸 법신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는 있어요.

근데 이것도 말이지.

 

이 모습과 이 모습 없는 건 떨어져 있지 않은데

이걸 떨어뜨려서

이 모습 없는 이 청정법신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고

그러면 이 모습은 뭐냐?

화신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거든.

 

모습은 뭐냐? 화신이다.

이 화신이라는 말은

이 모습 없는 이 청정법신이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겁니다.

이런 걸 주로 가르친 이 불교 경전이 화엄경이에요, 화엄경.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은 다 화신이다.

 

화신이라고 할 때는

이 모습 없는 이 법신이 모습으로 드러냈다는 말이야.

근데 이렇게 얘기하는 것부터가

이미 어긋났어요.

왜냐하면 계속 말씀드리잖아.

 

이 청정법신이라고 하는 것과 이 화신이라고 하는 것은

떨어져 있질 않거든.

그냥 한 몸이에요, 한 몸.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우리 분별하는 이 사람들의 그 분별을 깨부수고

자기 스스로의 본래면목, 본래마음을 좀 실감하고 체험해 보라고

나눌 수 없는 걸 나누어서

이렇게 약으로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보신, 법신, 화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