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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종 밀교수행강좌] 제3강 수행은 왜 하는가? (20:56)

Buddhastudy 2011. 8. 14. 06:40

  방송 보기: 불교TV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밀교 수행, 강좌시간에 세 번째 시간으로 수행은 왜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서 수행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또 수행에서 얻어진 어떤 공덕이 있다면 공덕역시 목적이지요. 그러니까 시작과 마침이 모두가 다 수행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불교라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은 시작이면서도 제가 목적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수행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수행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원래 이 불교에 그 가르침은 수행이 목적이다. 이렇게 제가 강조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을 들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몸소 수행을 해 봐야 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과 깨달은 것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아는 것은 즉 현실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가, 책을 열심히 본다든가, 학문을 익히면은 혹은 일에 대해서 어떤 익히기만 하면은 알 수 있지만, 수행은 즉 깨달음은 수행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음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불교가 수행의 종단이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결국은 깨달음이 목적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중생은 누구나 다 두 개의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수행을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성을 찾는 거고 두 개의 눈이 아닌 또 하나의 눈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 두 개의 눈은 수평으로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수평으로 돼 있는 두 개의 눈은 결국 어떤 것과 어떤 것을 비교하는 눈일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상대성이라고 그래가지고 상대방의 어떤 것과 나의 어떤 것과를 늘 비교하는 눈이 이게 두 눈이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 몸의 구조는 눈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귀도 둘로 돼 있는 이유가 항상 나와 상대방의 어떤 소리를 듣고 그것을 비교하라는 뜻이에요. 또 비교를 한다는 뜻이에요. 그러고도 우리 코도 보면은 콧구멍이 두 개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역시 비교하는 어떤 그런 습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과거 생에 인을 지어서 이렇게 귀 둘, 눈 둘, 콧구멍 둘, 이렇게 만든 겁니다. 입도 둘이죠. 여러분 생각에 입이 하나같지만 하나는 말하는 입, 하나는 먹는 입. 그래서 결국은 입도 둘인 겁니다.

 

항상 둘이라는 것은 상대성이에요. 그리고 상대성이라는 것은 늘 비교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은 이 비교하는 생각을 버리셔야 되. 만약에 이 비교하는 생각을 버리게 하는 게 바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들어가면은 인과를 깨달으면은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현실 살면서 항상 상대방과 내가 비교하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물질, 내가 누리고 있는 어떤 행복을 나 혼자는 충분히 행복한데도 상대방과 비교를 하니까 내가 불행한 것같이 보이는 겁니다.

 

만약에 비교하지 않는다면은 지금 현재 주어진 입장에서 얼마든지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 할수 있는데. 나 혼자 있을 때는 그래요. 그러다가 옆에 누군가 딱 나타나면은 저 사람과 나가 어떻게 생겼는가? 물질, 명예, 인물, 학력, 모든 걸 비교해요. 여러분이 자녀들을 교육시켜도 역시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냥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편지글 정도 쓸 수가 있어야 되고, 자기 이름 정도 쓸 수가 있어야 되고, 어떤 물건을 사고 팔 때 수학정도, 그저 계산정도 할 줄 알면 되고. 그저 어디 남 앞에 가서 예의범절 지킬 줄 알면 되고. 이 정도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 상대방은 나보다 더 뛰어난 어떤 것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계속 뭔가를 추구하고 내 자녀들이 그러한 실력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비교를 하다보니까 더 높은 것,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교는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 둘로 돼 있는 이것을 파괴를 해야 되요. 그래서 파괴한다 해서 없애서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다스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지셔야 되. 또 하나의 귀를 가져야 되고. 또 하나의 귀와 또 하나의 코, 또 하나의 입, 또 하나의 몸뚱이를 가져야 되요.

 

우리는 손도 양손으로 돼 있잖아. 발도 양발이잖아. 그러니까 또 하나의 손을 가져야 되고 또 하나의 발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눈으로만 이야기해서 제3의 눈이라 그래요. 혹 여러분들이 저 북방불교 특히 티벳불교쪽으로 가면은 아마 어떤 탑을 보셨을 겁니다. 탑을 이렇게 조성하면서 탑 밖에다가 눈을 이렇게 그렸죠. 그려놓고 한가운데다가 수직의 눈을 또 하나 그려놨습니다. 이 수평의 눈에다가 한가운데 수직의 눈이 있는 거예요. 그 수직이 제3의 눈을 의미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어디서 깨달음이 발산하겠습니까? 바로 부처님의 미간사이에 있는 미간 백호상이라는 게 있어요. 그 눈과 눈 사이에 우리 그 조각품으로 이야기 하면은 보석을 딱 박아 놓잖아요. 이것은 제3의 어떤 겁니다. 눈이면 제 3의 눈, 손이면은 제3의 손, 귀면은 제3의 귀, 혹은 모든 게 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대성을 떠난 그것을 능가하는 그런 하나의 것이 제3의 눈, 그리고 미간 백호상, 사실은 미간 백호상이라는 것은 가는 털입니다. 머리카락이에요. 가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길게 뻗을 수 있냐하면은 삼천대천세계를 덮고도 남는다. 그래요.

 

그래서 그 뻗을 수 있는 머리카락이, 즉 털이 그것을 뻗지 아니하고 모을 때는 눈한가운데에 모이는 겁니다. 그 모이는 모습이 이제 꼭 이렇게 뱀이 똬리를 틀어놓듯이 딱 말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미간 백호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이 앞에 말씀드린 데로 티벳 쪽에 탑에 수직의 눈을 그려놓은 것은 결국 수평의 두 눈을 타파한다는 그런 뜻이에요. 중생은 그 눈을 버려야 되요. 그 눈으로 사물을 보면은 비교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중생의 업이라 그래.

 

그러면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성을 찾는다라고 진각종에서 말합니다. 그 자성을 찾아질 때에 그 자성은 곧 뭐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음이 있고, 나도 마음이 있고, 부처님도 마음이 있고 다 같이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이 아닌, 비교하는 마음이 나닌, 역시 제3의 마음, 그게 자성이에요. 원래 이 제3의 마음은 없는 겁니다. 실지로는. 우리 눈이 없지 않습니까? 두 개 밖에 없지 않아요? 3의 코도 제 3의 입도 없지 않습니까? 없지만 작용하는 능력은 별도로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찾아내는 거예요. 그래 여러분의 몸뚱아리는 다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세계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성을 찾는다는 것은 그 없는 세계를 찾아가는 것인데. 사실은 그 없는 세계가 이 세상을 지배해요. 여러분의 몸이 있고, 마음이 있지만 여러분은 무엇이 여러분을 지배합니까? 몸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음이 지배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삼라만상이 있습니다. 이 삼라만상은 다 눈에 보이는 거예요. 이렇게 눈에 보이지만 이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어떤 진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가 있어요. 봄이 되면 은 여름이 되면 은 가을이 되면 은 겨울이 되면 은 삼라만상은 변화합니다. 변화하는데도 어떤 질서가 있습니다. 규칙이 있어요.

 

그 규칙이 바로 보이지 않는 진리라는 거예요. 그런 걸 합쳐서 우리는 자연이라고 그러잖아요. 얼른 자연이라고 생각하면은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데 실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진리가 있다. 이 부처님의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그 진리를 깨닫는 겁니다. 깨닫는데 그 진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내 마음에 있다라고. 내 마음은 어디 있는가 하면은 내 몸속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분명 어떤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렸죠. 에너지를 지니고 있고, 둘째 시간에도 말씀드렸죠. 빛이라고.

 

삼라만상은 각자의 빛을 지니고 있다. 빛이 내 몸에 있을 때는 내 몸이 살아 움직이고, 빛이 내 몸을 바깥으로 나갔을 때는 어떻게 되요? 내 몸은 죽고 그 빛은 영원한 겁니다. 그게 나의 빛이에요. 지금은 금생의 여러분의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빛이.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은 여러분의 몸이 쓸모가 없을 때 그 빛은 마지막 심장을 통해서 밖으로 나와요. 그 사회인들은 혼불이라고 한다고 제가 분명히 앞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에너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어요.

 

그 빛은 누구나 다 똑같아요. 여러분의 빛이나, 저의 빛이나, 부처님의 빛이나, 보살의 빛이나. ??? 다 같은 빛을 지니고 있어요. 힘도 똑같아요. 그런데 사용하는데 따라서 다릅니다. 왜 다르겠습니까? 여러분은 속세로부터 업을 지었기 때문에. 결국은 업신 때문에 그 빛이 제대로 막혀서 발휘를 못해요. 그래서 업신을 제거를 해야 되. 업신을 제거하는 방법이 우선 먼저 제거부터 하면 안 되니까. 자성을 먼저 찾도록 하는데 흔히들 불교 전반적으로는 그것을 성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 내가 부처님을 믿으니까. 또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니까, 수행하니까. 결국은 얻어지는 것도 부처님이다 이거죠. 그렇잖아요. 내가 부처님을 믿으니까 부처님 법대로 따르니까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니까. 거기서 얻어진 결과도 역시 부처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목적은 성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성불을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중생은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은 지금까지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많은 분들이 성불한다, 성불한다고 수없이 많은 2500년 동안 84천 경전에 앞으로 뒤로 거꾸로 별것을 다 가르쳤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성불 못합니다.

 

저도 성불 못해요. 여러분도 못합니다. 금생에는 끝났어요. 그러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냐 하면은 그것도 모릅니다. 이제 성불은 최후의 마지막 구경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성불하기 이전에 두 단계를 지나야 성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누구나 다 최고의 자리를 성불을 이야기하지만은 사실 앞엣것은 등안시 해버리고 무관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이제 성불하기 이전에 열반의 경지를 얻어야 되고, 또 그 이전에 해탈의 경지를 얻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면은 첫째, 해탈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열반에 들어야 되고, 그리고 성불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탈을 못 하면은 열반에 들지 못하고, 열반에 들지 못 하면은 성불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우선 먼저 성불을 접어 놔두고 아무도 성불 안했으니까. 견성 성불했다 하지만은 성품을 봤지만 부처소리는 아무도 못 듣잖아요. 2500년 전에 싯달태자 석가모니불 외에는 어느 누구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선지식일 뿐이고, 고승일 뿐이고, 보살인 뿐이고, 대사일 뿐이고, 종사일 뿐이지. 어느 누구를 부처라고 부릅디까. 그것은 성불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싯달태자가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신 겁니다. 부처가 되고 나니까 자기가 깨달은 이 부처의 법을 가만 생각해 보니까 현재 중생은 아무도 못알아 들어요. 아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이 싯달태자는 곧바로 열반에 들려고 했습니다. 못 알아들으니까. 괜히 내가 말해봤자 혼동만 일으키니까. 그럴 때에 많은 천신들이 만류를 한 겁니다. 성자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수행해서 부처가 되었지만 그래도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하고 열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설법을 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뭘 하냐 이거죠. 뭘 하냐 이거죠. 내가 깨달은걸 이야기해야 되는데. 깨달았으니까. 깨닫지 않은 걸 이야기 하면 다 망설이니까. 부처되기 이전에는 내가 깨닫지 않는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부처가 되고 보니까 도저히 할 말이 없다 이거죠. 뭘 이야기 하냐 이거죠. 그랬을 때 천신이 뭐라 했습니까? 과거 모든 부처님도 그러했지만 중생 근기 따라서 단계를 낮춰서 법을 설했습니다. 이랬어. 그때에 이 싯달태자도 이제 그 뜻을 받아 들여서 단계를 낮춥니다.

 

낮출 때 어디까지 낮추냐 하면은 일성법으로서 이성법, 삼성법으로 낮춰요. 팔만사천의 경전의 말씀은 삼성법입니다. 일성법이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까지 석가모니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한 모든 법은 삼성법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 선종에서는 그러잖아요. 45년 동안 설법을 하고 난 다음에 열반에 드실 때 나는 한 법도 설한일이 없다. 이렇게. 어떤 법을 안 설했습니까? 불성법을 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팔만사천 경전을 45년 동안 설하셨는데 열반에 드시면서 나는 한 법도 설한 일이 없다. 이 말은 불성법은 설한 일이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팔만사천 경전을 놓고 수행을 하면은 어디까지 갈 수 있냐 하면은 10지보살, 즉 지지보살, 이전까지는 들어갈 수가 있어요. 즉 성문연각까지는 들어갈 수 있지만 보살은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라는 거예요. 성불은 어렵습니다. 성불의 법은 누가 설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의 법이라든가 해탈의 법은 45년 동안 설법한 팔만사천 경전 속에 다 낱낱이 들어있고 후세에 견성성불 하신 분들이 고구정녕하게 수시로 법문을 해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그런 모든 법들은 다 구경에 가서는 해탈의 법이고 보살이 될 수 있는 법일 뿐이에요. 부처는 되지 못합니다.

 

?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되는 법은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부처되는 법은 중생은 설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아무리 상상근기라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해요. 역시 중생이니까. 상상근기라는 말은 중생으로서 상상근기라는 거지. 부처로서 상상근기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생 속에서 어떤 상상근기다 이렇게 보면 되요.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아봤자 뭐가 되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겠죠. 어떤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미국의 대통령 아니지 않습니까? 세계 유엔의 대통령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아무리 높게높게 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세계에서는 아무리 수행을 하고 수행을 해도 팔만사천경전 속에서는 보살까지는 올라갈지언정 부처는 되지 못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겁니다. 그래서 간혹 가다가 조사스님들이 내가 부처다 그러면은 부처가 부처를 죽입니다. 내가 조사다 그러면 조사가 조사를 죽인다는 이유가 그겁니다. ? 아니기 때문에. 왜 진정한 부처님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이제 이 자리에서 밀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탈에 목적이 있는 겁니다. 성불에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밀교에서도 즉신성불을 이야기 합니다.

 

밀교에서 말하는 즉신성불은 이 몸 이대로 해탈하는 경지를 의미하는 겁니다. 실지 성불은 말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것은 스스로 자연의 법리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싯달태자도 설산에 다니면서 6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을 찾아서 법을 배우지만 거기서 부처를 이룬 건 아니에요. 그리고 곳을 나와서 다시 자기 몸을 학대를 해서 그 열이 있는 정글 속에서 몸을 학대하면서 다시 6년을 고행하지만 역시 그 속에서는 부처의 길이 없었던 겁니다. 없기 때문에 마지막 공양을 받고 그 강을 건너서 보리수아래에 이르른 겁니다.

 

거기서 비로소 마지막에 모든 스승의 말을 물리치고 모든 경계를 물리치고 스스로 무사득오를 하신 겁니다. 스승 없이 깨달은 겁니다. 학문을 배울 때는 스승이 필요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배울 때는 스승이 필요하고. 어떤 경지까지 오를 때는 스승이 필요하지만. 마지막 성불의 입장에서는 스승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싯달태자도 무사득오를 하신 거예요. 만약에 부처가 스승이 있었더라면은 싯달태자 이전에 부처님이 있어야죠. 부처님이 싯달태자 앞에 나타나서 가르쳐줘야죠. 안 가르쳐 줬지 않습니까?

 

다만 싯달태자에게 가르쳐 준 것은 현실적인 모든 진리, 현실적인 모든 학문, 현실적인 모든 수행방법 이런 것만 가르쳐줬지, 실지 내용은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는 부처만이 설할 수 있고, 중생은 중생법만 설할 수 있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그럴 바에는 이제 밀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허황된 성불을 구하는 것보다는 아예 중생의 몸을 받아 놨으니까 해탈을 먼저 얻자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