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25회 진언의 효력

Buddhastudy 2013. 6. 2. 20:59

출처 YouTube

 

뒤로 부터하면 진언은 어느 나라 말로 된 것이냐? 진언은 범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겁니다. 범어. 산스크리트어. 그거를 해석하지 않고 발음을 그대로 따서 한자로 썼어요. 그러니까 이 때 한자는 뜻글자로서의 한자가 아니고 중국 사람들이 발음하는 것을 따라서 쓴거다. 그거를 다시 우리식으로 읽어서 지금 나무라다나다라야야나막알랴. 이렇게 하는데. 또는 아제아제바라아제. 이렇게 하는데 그거는 인도말로는 나모나트나 이런 식이오.

 

지금 우리가 하는 거는 뜻을 모르니까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고 안 읽고 어떻게 읽는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 가신다하고 같다. 이 말이오. 발음도 좀 틀리고. 범어다. 이것이. 그런데 범어의 원어적 발음이 아니고 우리식대로의 발음이다. 리어카. 이게 원래 발음은 리캬 원래 발음인데 우리는 리어카 이렇게 읽듯이, 우리 식대로 읽은 발음이다. 이것을 외우면 어떤 효력이 있느냐? 이것을 외우면 어떤 효력이 있느냐? 어떤 마음으로 외우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마음으로.

 

핵심은 이걸 외우는데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노력의 결과가 달라지듯이 어떤 마음으로 외우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이 진언은 하나의 글자, 하나의 문장에 정신을 딱~ 집중해서 외우게 된다면, 집중효과가 나게 되고, 그 집중 효과는 정신통일 효과가 나게 되고, 거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잡념이 없어지니까 번뇌가 사라지는 그런 효과가 나기도 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마음이 안정이 되니 때로는 질병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효과가 난다. 또 집중해서 하지 않으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진언은 어떤 효과가 나느냐? 그렇게 말해져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병을 나으려면 이런 진언을. 저병을 나으려면 저런 진언을. 이렇게 있는데, 그게 다 인도 말을 해석해보면 아무 뜻 없는 말이 아니고 그냥 내용이 아주 간단해. 그냥 암 낫게 해주세요. 눈병 낫게 해주세요. 귓병 낫게 해주세요.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그거를 외국 사람이 우리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들린다? 다 주문이 같나? 다르나? 발음이 틀리죠.

 

눈병이라는 말하고 귓병이라는 말하고 어떻게 같아? 틀리지. 그래서 그 내용을 다 분석해보면 정구업진언. 이렇게 읽은데 이걸 분석해 읽으면 그게 정구업진언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오. 아시겠어요? 입을 깨끗이 하게 하여 지이다. 이런 뜻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입을 깨끗이 하여지이다. 입을 깨끗이 하여 지이다. 이렇게 자꾸 마음에 새기면 말할 때 조심하나? 안하나? 조심하지? 효과가 있는 거지.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다고 하는데요, 부처님 보다 더 먼저 있었습니다. 어느 때 있었다? 브라만니즘에 힌두이즘에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고. 부처님 이후에도 있다. 부처님 당시에 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질문자는 그런 뜻은 아니겠죠? 부처님이 이런 거 외우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죠? 부처님은 이런 것을 외워가지고 업장을 소멸한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이치를 깨우쳐서 법의 이치를 깨우쳐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거요.

 

그런데 일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늘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주문,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주문.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주문. 이런 걸 늘 외웠어. 그러면 병도 낫고 뭐도 낫고 뭐도 낫고 그렇게 생각했어. 요즘 우리가 올해는 대장군이 어디 섰고, 오늘은 길일이고 아니고 이런 거를 늘 해요? 안 해요? 늘 하지. 그러다보니까 이런 걸 안하니까 대중성이 없어. 대중이 그런 걸 자꾸 묻는데 스님이 그런 건 일체 안 가르치고 마음을 닦아라. 어떻게 해라. 이런 것만 가르치니까.

 

스님은 법의 이치를 갖고 공부하는게 좋은데, 이 어리석은 대중들은 이치 같은 거보다 당장 오늘 이사를 가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물으니까. 그래서 불교로부터 대중이 멀어졌어. 그래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대중의 욕구를 받아들였어. 그래서 이런 진언이 생겼어. 그래서 이 진언은 불교적으로 좋은 진언으로 만들었어. 아시겠어? 뜻을 병 낫게 해주세요.” 이런 진언을 안 만들고 관세음보살께 귀의합니다.” 이런 말로 만들었어.

 

나모라다나다라야야나막알약바로기제. 그런 말이 다 나무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뜻이다. ? 관세음보살 이름이 뭐라 그랬어? 아보라기테보디사트바잖아. 그런 말이 발음이 바뀌어서 그런 거란 말이오. 나쁜 말 아니오. 해석을 하면. 아시겠어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뭐에 귀의합니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병 낫게 해주세요. ~ 어느 귀신한테 산신님 용왕님 하는 거 보다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하는 게 불자는 효력이 더 낫다. 이래가지고 내용은 불교가 됐는데 하는 방식은 정통방식이 되다보니, 이렇게 여러 가지 주문이 나오게 됐다.

 

그러니까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게 딴 얘기가 아니다. 이 반야심경 공부를 다 하면, 아까도 법문 들었지만 결국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요? 깨닫는 거요. 그래서 가세가세 저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건너가세.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이루세. 이런 얘기에요. 그런 노래야. 다 듣고 나니 할 일은 이거 밖에 없어. 그래서 가자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자. 이런 얘기란 말이오. 그런데 가자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에 이르러 깨달음을 이루자 하면 눈병이 낫는다. 좀 안 맞잖아. 그지?

 

그런데 눈병이 난다면 안 맞을지 몰라도 마음의 눈을 뜬다. 이 말은 맞나? 안 맞나? 맞지. 눈병하고 비교가 안 되는 더 큰 거를 얻는다. 이러면 말이 맞아. 그래서 생긴거다. 주문을 외우면 부정이 안 탄아 이 말이 맞아. 왜 그럴까? 반야심경을 읽으면 모든 부정이 사라진다. 이 말이 맞아. 반야심경의 내용이 부정이라 할 것이 본래 없다 이런 뜻이니까. 탈래야 탈 수가 없어. 그런 원리에요. 그러니 진언이란 말 자체는 다라니라는 뜻인데 진언은 진짜 어느 말 아니에요. 그지? 말 가운데도 무든 말이다? 진짜배기 말이다. 이게 부처님의 말을 진짜배기 말이라 그래.

 

이 말은 일체 중생의 병을 번뇌를 다 없애는 말이다. 맞잖아. 그지? 너무너무 귀하니까 번역하는 것도 어때요? 불경스러워서 통째로 인도말로 외우자. 이랬어. 내가 저기 외국에 가서 불교를 가르칠 때 만약에 기도하는 걸 가르치면 관세음보살을 해석하겠나? 그냥 나 따라서 그 사람도 관세음 보살 해야 되나? 나 따라 해야 되겠지? 그래서 생긴 문제요. 그 사람도 그냥 한국식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래. 그 사람 관세음보살이 무슨 의미인지 아나? 모르나? 몰라. 아무튼 부르면 좋은 일이 생긴다. 이렇게 생긴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굳이 따지면 틀린 것은 아니야. 그러나 깨달음의 이치에서 볼 때는 깨달음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얘기다. 왜 그럼 이런 게 생겼냐? 다시 얘기하지만 나쁜 의도에서 생긴 건 아니다. 대중이 대중의 습성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해야 되는데, 습성을 움켜쥐고 불법이 대중의 비위를 맞춰서 생기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거요. 오늘도 마찬가지잖아. 절에 이 제사 지내는 게 본래 필요하나? 안하나? 안 해. 그런데 여러분이 다 제사를 지내. 이 비유를 안 맞추면, 이거 참, 항상 이중적으로 여러분이 또 따로 해야 돼.

 

그래서 절 한쪽 구석에다 차려서 지내라. 이렇게 대중의 비유를 맞춰서 생긴 거란 말이오. 아시겠어요? 이건 법은 아니야. 아시겠습니까? 이거는 뭐다? 문화다. 문화는 나쁘고 좋은 게 없다. 아시겠어요? 문화다. 필요 없는 게 아니야. 우리가 사는 게 다 문화잖아. 옷도 지금 이렇게 입는 거 다 문화란 말이야. 유행 따르는 것도. 저거 자체는 담마. 법은 아니야. 제사 지낸다고 해탈하는 건 아니란 말이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이거는 우리의 의례.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서 태어나면 돌잔치한다고 애가 건강해 지나? 그래? 돌잔치 안 해주면 건강 안하고 돌잔치 해주면 건강해지나? 아니지. 그래도 우리는 돌잔치하면 애한테 좋다. 해주는 거란 말이야. 문화야. 문화. 똑같은 날인데 어느 날 정해서 설날이라 하고, 중추기도를 하고 하는 건 문화다. 아시겠습니까? 꼭 그날 해야 되느냐? 그렇지가 않아. 그건 문화란 말이야. 전통적으로 우린 그렇게 해왔어. 똑같은데 굳이 날짜를 바꿔서 딴 날 할 필요가 있나? 없나? 없지. 으음. 그러고 또 그날 안하면 안 되나? 그것도 아니야.

 

[마음을 새롭게 내는 게 새날이야.] 이 법의 이치로는. 그러나 우리는 현실 속에 살기 때문에 인류는 이런 문화를. 우리가 산다는 게 다 문화야. 문화야 제사를 지내는 거는. 여러분이 스님께 삼배하는 거를 문화라 하는 경우도 있고 담마라 하는 게 있어. 문화라 하는 거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게 문화고. 스님만나면 삼배해야 된다. 부처님한테 가서 삼배해야 된다. 이건 문화야. 아시겠어요? 담마라 할 때는 뭐다? 법에 귀의한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돼. 그러니까 **하고 삼배할 때는 삼배를 해야 되는 게 아니야. 그건 문화이기 때문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돼.

 

그런데 안해야 될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까 뭐한다? 하는 거지. 예의로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나 이걸 담마라 할 때는 이 좋은 법을 들으려 할 때는 법이 다 법이 설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을 귀가 있어야 돼. 그래야 들려. 그래서 내가 들을 귀를 준비하는 게 삼배야. 아시겠어요? ~ 저를 위해서 좋은 법을 설해주십시오. 하고 정법을 하고 그다음에 그 들을 귀를 갖기 위해서 내가 세 번을 절하면서 정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잘 듣겠으니 설해주십시오. 하는 이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는 시간이야.

 

법륜스님 뭐 잘나가지고 절하는 게 아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스님은 절을 하는 건 여러분들의 예의고, 이렇게 법을 청해주니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그 좋은 법을 듣고자 하니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기쁜 일이가? 안 기쁜 일이가? 기쁜 일이니 저도 여러분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아이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좋은 생각을 내주니 내가 막 기뻐 못살겠소. ”그래서 나도 삼배하는 거요. 너무너무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