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68회 문제아이 지도하기

Buddhastudy 2013. 6. 30. 06:03

출처 YouTube

 

. 인생은 선택이다. 어차피 내가. 내가 원하는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이룰 수도 없고. 또 그 뿐만 아니라.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다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이게 삶의 현실이다 이거야. 현실은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적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도 매우 적은데. 이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상상이 할 수 있는 일도 매우 많은 것 같고. 또 해 줄 수 있는 일도 매우 많은 것 같은 착각. 또 그래야 된다는 착각을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살이가 가볍고, 기쁘고, 재밌고 그렇지가 못하고. 항상 무겁고, 힘들고 그렇다 이 말이오.

 

그래서 제가 선택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많은 일 가운데에서 내가 어느 부분을 선택해서 하는 거고. 내가 원하고자 하는 것도 많지만. 그 가운데도 선택해서 해야 되는 거고. 또 내가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아요. 이루어지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몇 개만 이루어져요. 이루어지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노력 하는 건 선택인데. 또 사람들이 나한테 원하는 것도 내가 다 해 줄 수가 없고. 그 중에 선택해서 할 수 밖에 없어요.

 

이럴 때 여러 분들이 어떻게 하면 잘 선택 하느냐?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거든요. 잘 선택한다는 것은 이익을 극대화 시키거나 효율을 극대화 시키는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선택에 잘했다, 잘못했다가 자꾸 생긴다. 그런데 선택을 할 때 너무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 닿는 데로 그냥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되요.

 

사실은 제일 중요한 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지금의 문제도 선택을 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되요. 그러면 이 아이를 아이가 조사를 해 보니까 생모로부터 사랑도 못 받고. 또 양모로 부터도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심성이 좀 삐뚤어졌다. 세상 누구도 못 믿는다. 그래서 제 맘대로 라고 하자. 그럼 이 아이를 내가 엄마가 못 준 사랑, 양모가 못준 사랑을 내가 줄 수 있겠느냐? 이걸 내가 선택을 해야 된단 말이오.

 

그럼 선택을 했으면 이 아이는 벌써 배신을 몇 번 당했는데. 내가 또 정을 줘 놓고는 또 배신을 한단 말이오. ? 책임을 못 져서 버리면 아이가 볼 때는 배신이란 말이오. 책임의 문제요. 손을 꼭 잡아 줬으면 꼭 잡아 준거에 대한 책임을 지겠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책임도 못 지면서 일을 벌이면 나중에 그 아이에게 도로 또 한 번의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런 문제에서 내가 볼 때 큰 고민거리는 아니다. 고치든 못 고치든 관계없이. 못 고치더라도 누군가는 그 아이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될 거 아니냐. 못 고치더라도.

 

그럼 못 고치고 말썽꾸러기 아이도 누군가는 그를 따뜻하게 돌봐주는 사람이 한 사람쯤 이 세상에 있어야 안 되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되어 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 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애를 고치려고 하잖아. 야단을 치면 고칠까? 따뜻하게 해 주면 고칠까. 어떻게 고칠까 하잖아. 애는 그냥 생긴 대로 놔 좋고. 다른 사람은 다 그걸 보고 짜증을 내고 미워하고 성질내고 난리인데. 난 딴 건 못해주더라도 애는 그런 아이도 내가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이렇게 결정 해 버리면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거 뭐 그거 특별히 애를 어떻게 고치겠다고 자꾸 생각을 하잖아. 그때 늘 얘기했지만, 우리가 남을 고칠 수 있어요? 아이고, 자기도 못 고치는데 어떻게 내가 남을 고쳐요? 말은 사랑이 부족하다. 애가 어떻다. 뭐라고 하지만, 여기서 내 심리에 가장 근저에는 애를 고치려고 하는데 있다. 그러면 이게 내 능력이 붙이는 거요. 그러면 내 능력이 부족한 걸 자학했다가, 안 고쳐진 애를 미워했다가, 가만두는 부모하고 또 문제제기 했다가.

 

이렇게 되니까 지금 이게 싸움이 애하고 싸우고, 학부형하고 싸우고, 지금 또 자기자학하고. 글 속에 3개가 다 들어 있잖아. 그죠? 애도 하나 제대로 못가리키는 선생으로서 자학. 애 제대로 그런 애 낳아 놓은 부모님 문제. 애 문제. 이렇게 되잖아. 고치려는 생각을 버려버려야 돼. 이럴 때.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라는 거지. 그냥 놔 놓고도 그렇게 행동하면 보통 평소에 보통사람 입장에서 예뻐지나? 미워지나? 미워지잖아. 그 미워하지 않는 수준만 해도 얼마나 나 혼자만 노력하면 되잖아. 그 아이에 대한 깊은 이해만 있어도 미워하진 않게 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를 봐내는, 그 아이를 이해해야 봐내는 힘이 있거든요. 안 그러면 내가 참게 되니까 참으면 어때요? 내 악도 스트레스를 받잖아. 그죠? 그러면 폭발하난 말이오. 그런데 참고 봐내는 거 하고, 그냥 봐내는 거하고 좀 다른데, 참고 봐내면 이제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힘들지. 애가 수업시간에 떠든다. 이거지. 그러면 그게 떠들면 나오라 그래가지고. “이리 나와라.” 해서 앞에서 한번 떠들어 봐라. 이렇게 얘기하면 되잖아.

 

마이크 줘서, 앞에서 얘기해봐. 하고 싶은 얘기가 뭐니? 앞에서 한 번 해 봐라. 이렇게. 우리 아무개 얘기한번 들어보자. 지금 굉장히 말하고 싶나보다. 한 번 해봐라. 이렇게 해서 1시간 정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되지. 안 그러면 수업 끝나고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이렇게 해 본다든지. 그러니까네, 그 아이를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 아이의 그 스트레스를 한 번 이해하는. 그런 관점에서 서서 한 번 접근해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해결이 된 거요? 별 얘기도 안했는데. 너무 무겁게 접근하면 안 돼요. 무겁게.

 

그래서 내 능력을 과신도 하지 말고, 또 그거 안 된다고 자학도 하지 말고. 고치려니까 벌써 이게 힘이 들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이렇게 해서 하다가 보면 자꾸 방법이 생겨.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우선 애한테 내가 들어주는, 아이 얘기도 들어주고. 어떤 사고를 쳐도 내가 애 편이 좀 되어 준다. “잘 했다.” 이 말이 아니에요. 그걸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일단은 너 잘했다 두둔해 준다는 게 아니라. 일단은 오도갈데가 없는 사람을 내가 포용해 준다.

 

그런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임하면서 애가 무슨 일이 있을 때 선생님한테는 선생님은 자기편이구나.’라든지. 자기를 내치지는 않는 사람이구나. 자기를 막 아끼고 사랑하고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내치지는 않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하도 사람들이 내치니까 내 칠거라고 미리 짐작한단 말이오. 그러지만 않아도 애가 조금 감동을 느끼지. 그렇게 해서 이거는 하면서 방법을 그렇게 하면 아 이건 어떻게 얘기 하면 되겠다라든지.

 

그런데 항상 마음에서 조급해져. 왜냐하면 희망이 약간 보이면 야 이렇게 고치면 되겠다.” 이런 생각하면 안 돼. 고칠 생각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라도 내가 좀 수용해 줘야 되겠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편하죠. 아까 얘기한데로 수업시간에 떠들면 앞에 나와 가지고 가끔 발언도 시켜도 보고. 또 끝난 뒤에 얘기도 한 번 나눠보고. 그러니까 네가 수업시간에 떠들었기 때문에 벌로, 자꾸 이렇게 하면 힘들다는 거요. “할 말이 많구나. 나와서 한 번 해 볼래? 둘이가 얘기하면 둘이 나와서 한 번 해 봐라.” 혼자서 떠들면 혼자 나와서 해 봐라.” 또는 끝나고 아까 할 얘기 많던데 선생님하고 얘기 좀 해 볼까? 무슨 얘기냐?” 이렇게 얘기도 해 보고.

 

이제 그것이 만약에 이렇게 해보고 지나치다 싶으면 교장선생님하고 의논하면 되잖아. 이 아이가 조는 것도 아니고. 공부 안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수업시간에 계속 떠들어서 전체 수업을 진행을 내가 좀 할 수가 없는데. 교장선생님이 내 수업할 동안에 이 아이 개인지도 좀 해 주십시오. 요렇게 요청하면 되지. 이렇게 요청을 한다든지. 어쨌든 방법을 찬찬히 연구를 해 보면 되는데. 거기 마음에서 이 놈이 나쁜 놈을 어떻게 해야 되나. 자꾸 이런 생각하면 그 아이가 피해 입는다는 게 아니라.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걸 외면하라는 게 아니라. 해보고 또 질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