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05회) 태중 아기에 대한 참회

Buddhastudy 2011. 3. 23.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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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자식을 보낸 부모로서 마음이 아픈 건 우리가 다 공감을 할만한 얘긴데. 지금 또 아이 생각을 하니까 또 눈물이 나잖아요. 지금 아이가 죽은 건 아니죠? 지금 우리가 여기서 법문 하는 자리에서 무슨 일어난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죠? 그런데 지금 눈물이 난단 말이오. 그럼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어. 지금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러니까 그 아이 생각을 하면 그것을 지금 얘기하기 위해서 그 아이 생각을 할 때, 지금 그 아이 생각에 사로잡힘이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힘 현상. 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머릿속에서 이 뇌나 모든 신체작용이 어떠냐 하면, 지금 내 앞에서 죽을 때와 똑 같은 이 신체정신작용이 일어난다 이거요.

 

그래서 눈물도 나고, 목도 메이고, 이게 마음이 한 동안 가라앉지가 않는 거요. 그러니까 아이가 방안에서 죽었을 때도 아이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니까 나는 밖에서 떠들고 놀 수 있는 거요. 지금은 아이가 죽은 상태도 아닌데도 왜 슬프냐? 이거는 그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러니까 아이가 죽고 살고 이거하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과 기쁨과 즐거움 하고, 사람이 죽고 살고 이건 아무 관계가 없어요. 슬픔 괴로움 외로움 이거는 내 생각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거다 이거야.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짓는 바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지금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데. 지금 여러분들의 자녀나 남편이나 부모나 지금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정보가 여러분들에게 입력이 안되면 여러분들 지금 아무 문제가 없어요. 설령 여러분들 몸에 지금 암세포가 있어서, 종양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 정보가 여러분들께 들어오지 않으면 여러분들 아무 문제가 없어요. 실제 사람이 죽었냐? 살았냐? 실제 종양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있어도 돌아가셔도 정보가 입력이 안되면, 거기에 생각이 사로잡히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고. 그러니까 이 슬픔이라는 것은 죽음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 이걸 내가 먼저 얘기하는 거요.

 

그런데도 내가 슬퍼하면 나한테도 도움이 되느냐? 그러면 할 수 있어요. 직접적인 관계가 있던 없던. 그런데 슬퍼하면 나한테 이익이에요? 손해에요? 내 건강이나 손해죠. 그럼 내가 자꾸 슬퍼하면 가족에게 이로워요? 손해요? 손해요. 그러면 내가 슬퍼하면 죽은 아이, 죽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요? 안 되요? 아무 도움 안 되요. 이런 걸 백해무익이라 그래요. 아무 도움이 안되고, 손해만 나는 짓을 계속 한다 이 말이오. 거 왜 할까? 바로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기 때문에 그런 거요.

 

밤에 자라고 이불 펴서 딱 누워있으면 피곤한 몸을 뉘여 잠만 자면 되는데. 그때 악몽을 꾼다. 강도에게 쫓긴다. 살려달라고 고함을 친다. 깨있는 사람이 보면 어때요? 헛소리 한다. 잠꼬대 한다. 이리 말하지. 자면 될 텐데.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우성을 친다 이 말이오. 그러면 아우성을 치는 건 누군가가 괴롭혀서 아우성을 치는 거요? 꿈 때문에 아우성을 치는 거요? 그런데 내가 보니 꿈이지 본인은 어때요? 꿈이요? 꿈 아니오? 꿈이 아니오. 눈을 떠야 꿈이지. 눈 감고 있을 때는 꿈 아니다 이 말이오. 현실이다 이 말이오.

 

그것도 똑 같은 작용이요. 꿈에서 악몽을 꾸는 것처럼. 아들이 죽었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꿈속과 똑 같은 정신 작용이 일어난다. 그럼 몸과 마음에서 이 모든 작용이 눈물도 나고, 마음도 가라앉고, 목에도 영향이 오고, 이렇게 다 작용이 일어나요. 그러니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손해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슬프다. 울먹거린다. 왜 이렇게 할까? 점잖게 말하면 몰라서. 무지. 다른 말로 하면 전도몽상. 좀 적나라 하게 말하면 미쳐서.

 

그래서 자신이 자신에게 불이익 손해가 되는 것을 계속 자초한다 이거요. 그래서 지금 생긴 문제가 죽은 아이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화를 자초한다. 애가 자는 줄 알았더니 가봤더니 죽었더라. 뭘까? 병이. 그렇게 갑자기 무슨 누군가가 코를 막아 목을 졸여 죽인 게 아니라면, 저절로 죽었다면, 병명을 정확하니 모르지만은 다수가 뭘까? 심장마비겠지. 그럼 그 아이가 크면 심장 때문에 고생할까 안 할까? 하겠지. 심장판막증이다. 심근색이다 해서. 죽을 때까지 조심하고 해야 되.

 

그런데 어려서 죽어서 애도 덜 고생하고 나도 덜 고생하지. 만약에 초등학교나 중학교쯤 다니다 죽으면 슬픔이 지금 정도 될까? 열 배나 더 클까? 제가 들어보면 그건 잘된 일이오. 하등 잘못된 일이 없다 이 말이오. 내가 무슨 잘못해서. 그러니까 먼저간 아이에 대해서는 안녕히 가세요 하고 집착을 놓아 버리고. 그것이 그 아이에게 가장 엄마로서 최대로 잘 할 수 있는 일이오. 거 이상 다른 건 없어.

 

그 다음에 지금 아이를 위해서는 기도를 하면서 아이가 어떤 경우에도 내가 감사를 해라. 저게 누구 닮았나? 저게 왜 저러나? 이런 생각을 버려야 된다 이거요. 죄책감을 가지면 안되. 죄지은 건 아니에요.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슬퍼하는 가운데서 애가 자랐지. 내가 의도적으로 애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슬퍼한 건 아니다 이 말이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말이오. 그건 또 제 3의 화를 자초한다. 다만 내가 어리석었구나.

 

이래서 그 과보를 내가 달게 받겠다. 자라면서 지켜보고 그걸 알면 애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미워하고 화나고 이런 거 보다는 오히려 나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 그렇게 기도하시면 괜찮아요. 자꾸 죄책감을 갖는 건 나빠요. 이건 정신질병에 속합니다. 죄책감은. 그러니까 이제 눈물 그만 흘리시고. 아이 얘기를 어디 가서 하더라도 담담하게 할 수 있도록. 눈의 작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흘러도 목이 메이지 않도록. 목이 메인다 하더라도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나에게도 좋고. 가족에게도 좋고. 먼저 간 아이에게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