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남편과 항상 같이 있어도 행복한 법

Buddhastudy 2016. 6. 27. 06:23



 

그럼 주말 부부 하면 되지, 자기가 직장을 구해서 멀리 가서 주말에만 오면 되죠.

그러죠. 답답한 놈이 우물판다고 자기가 답답하니까 자기가 나가야지 어떻게 해.

에이, 그래도 길어도 100년 안 넘는다. 뭐 길어야 한 40년 정도.

아니 참으면 안 되지. 왜 참아요? 길어야 40년 밖에 안 되는데 참을 게 뭐가 있어요? 요렇게 살고 싶어도 40년 이상 못 사는데. 더 살고 싶어도. 아깝지 않아요? 아니 요렇게 살고 싶어도 40년 밖에 못 산다면 얼마나 아까워요? 11초가. 더 있고 싶어도 40년 이상 못 있는데.

아니 실제가 그렇다는 거요. 바꾸라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어제도 어떤 분이 암이 걸려 몇 년밖에 못산다하니까 그걸 갖고 엄청나게 괴로워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몇 년 밖에 못산다. 그러니까 5년 밖에 못산다하면 굉장히 괴로워해요. 그런데 50년 밖에 못산다하는 거는 별로 괴로워 안 해요? 왜 그럴까? 너무 길어서 그럴까? 아니에요. 그러니까 5년 밖에 못산다 하나 50년 밖에 못산다나 500년 밖에 못산다하는 건 한계 지어진 건 마찬가지 아니오. 그죠? 그런데 왜 5년 밖에 못 산다하면 이렇게 갑자기 조급해질까?

 

자기도 그러니까 아이고, 이 남편하고 아무리 살고 싶어도 40년 이상은 못산다. 아이고, 한 시가 아깝다.”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면, 실제 그러니까. 40년 지나면 더 이상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어요. 최고로부터 길어야 40년 이오. 안 그러면 내일 그만둘 수도 있고 모래 그만 둘 수도 있어요. 인생은. 자기 만약에 그런 생각하다가 갑자기 남편이 교통사고 나서 돌아가시면 자기 아쉬울까? 안 아쉬울까? 왜 죽은 뒤에는 아쉬워하고 있으면 또 귀찮다 그러고, 그게 무슨 심보요. 그러니까 없을 때 생각해 봐요.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이고 행복인지.

 

보통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해서 공부 안한다, 말 안 듣는다. 이래서 애들 때문에 다 괴롭잖아. 맨날 잔소리하고 애들 갖고 큰 소리 치고, 또 그거 갖고 부부가 싸우고 이래요. 한국은. 외국보다 한국은 애들 문제 때문에 갈등이 더 많아요. 그런데 그 찬변에 아이들이 그렇게 죽는 걸 보고, ‘이 아이가 영원히 나한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나.’하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게 영원히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오. 어느 날 아침에 안 보일 수가 있는 거요. 그러니까 아침에 애가 교복입고 학교 나가는 것만 해도 어때요? 그냥 뿌듯한 거요. 감사하다. 저녁에 애가 가방매고 엄마.”하고 들어오는 것만 봐도 어때요? 감사한 거요. 공부 잘하고 못하고 그건 뒷전이고.

 

그러니까 행복은 원래 주어져 있었던 거요. 그런데 그게 행복인 줄 모르고 불평을 하다가 잃어보니까 , 그게 행복이었구나.” 이렇게 자각하는데, 자기도 지금 만약에 이렇게 귀찮게 생각하면 자기가 만약에 종교가 뭐요? 성당 다녀요. 그러면 아니 꼭 종교를 제가 물어보는 이유는 그래요. 불교신자면 불교신자, 무교는 무교. 만약에 성당 다닌다. 그러면 자기가 아이고, 귀찮다. 좀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면 그 소원을 들어줘야 되요? 안 들어줘야 되요? 그러니까. 어쨌든 들어주시면 좋죠.

 

그래서 들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치워줘야 되요. 치워주면 자기가 그때는 거꾸로, 왜 하나님 데려갔느냐고 또 난리를 피워요. 그러니까 이게 영원한 게 절대 아니에요. 이게 잠시에요. 그게 하루일지 이틀일지 삼일일지, 길어야 몇 년 밖에 안 된다? 아무리 길어도 기적같이 길어도 40년을 못 넘어가고, 짧으면 내일로서 끝이 날 수도 있는 그런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이렇게 같이 있게 해 준거에 대해서 주님, 감사합니다.” 혹시 떨어져 있다가 사고가 나는 거 보다, 그래도 조금 더 있다가 이렇게 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이 그래요.

 

처음엔 귀찮다고 했는데 돌아가신 뒤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요. “, 주님께서 부르시려고 하는데, 내가 아쉬워할까봐 나한테 그런 기회를 줬구나. 그런데 내가 그걸 몰랐구나.” 이렇게 자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어요.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습니까? 굉장히 슬프죠. 그래서 1, 2, 5년 지나도 이 슬픔을 못 이겨 내요. 그런데 부모님이 한 3년 정도 집이나 병원에 누워있어서 늘 병수발을 하다가 보면, 사람이 긴병에 효자 없다 이런 말 있잖아. 그죠? 그러면 생각은 안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아이고, 이렇게 편찮으시면 돌아가시죠.” 이런 게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남한테 말은 안하지만, 그러다 돌아가시면 그래도 돌아가시면 슬프고 울고 해도 정신적인 충격은 안 받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별에 대한 준비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돌아가시고 보면, ‘, 엄마가 그렇게 나한테 욕설을 하거나 몸이 아파서 나를 힘들게 한 게 정을 떼려고 그랬구나.’ 이걸 나중에 자각을 하게 되요. ‘, 그게 나를 고생시키려고 그런 게 아니고, 내 정을 떼려고 그랬구나.’ 이걸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지금 주어진 이 기회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게 첫째 필요하다. 그러면 노력이 필요 없고 참을 것도 필요 없어요. 이 기회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내가 정말 깨어있으면 이게 같이 있다 보면 사람은,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뭐, 60되면 죽는다. 80되면 죽는다. 100살 못산다. 이래도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서는 내 생명은 영원할 거라고 여러분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의식은 ‘100살 못산다. 나도 곧 죽는다.’ 이러지만, 밑 마음은 영원히 안 죽습니다. 영원히 살거같이 지금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 연세 드신 분들, 젊은 사람들은 아이고, 저렇게 80 살았으니까 돌아가실 때 다 되었네.” 그리고 본인도 아이고 이제 늙었으니까 죽을 때 다 되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이 마음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이 느낀다. 이걸 알으셔야 되요. 그런데 실제는 영원히 지속이 안 됩니다. 잠시 뿐이에요. 잠시 끝납니다. 그러니까 연세 드신 분들한테 물어보세요. 젊을 때는 이게 인생이 깁니다. 여러분들 왜 저기, 10살 때는 설이 몇 밤 남았냐?” 이래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깁니까? 그런데 나이가 스물, 서른 넘고, 마흔 넘어가면 1년이 하루같이 지나가죠? 휘떡휘떡 휘떡휘떡 지나가요.

 

그래서 지금 연세 드신 분이 가만히 돌아보면 인생 7080이 엊그제 같아요. 금방 지나가 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게 길어야 40이라 하더라도 이게 굉장히 짧은 시간인데, 하물며 그것도 보장이 안 된 거고, 확실한 보장은 없어요. 이게 내일이 될지 모래 될지 글피 될지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주어진 인연, 이 조건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고, 항상 이 하루가 내일 어떤 일이 생겨도 만족할 만큼 우리가 하루를 그래서 부지런히 살라는 거요. ‘.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잘할 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공부 열심히 할걸.’ 이런 후회를 하지 말고 아, 그런 어떤 일이 닥쳤다하더라도 그래 할 만큼 했다. 다시 기회가 온다하더라도 난 그 이상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후회가 안 되거든요.

 

그래서 옛날부터 조상, 부모가 돌아가시면 효자가 많이 울어요? 불효자가 많이 울어요? 다 불효자가 많이 울어요.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죽어서 울고, 제사상 차리고 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찬 물 한 그릇 이라도 제대로 부모한때 떠줘라. 그게 효자다. 이런 말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울고불고 하지 말고, 지금이 굉장히 소중한 줄을 알면, 참을 것도 없고 기도할 것도 없고,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되냐? 이런 말도 필요가 없고, 그냥 이 순간순간이 소중한 줄을 알아버리면, 아무 노력할 필요가 없어져요.

 

그러면 노력을 한다. 참는다. 이거는 소중한 줄을 모르는 거를 전제로 하고, 이제 해결책이오. 그거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영리한 사람은 소중한 줄을 알아버리면 노력할 게 없어지고, 어리석은 자는 소중한 줄을 모르는 무지는 놔놓고, 그걸 어떻게 참는다, 어떻게 한다. 호흡을 한다. 뭐 안 본다. 이렇게 방법을 찾는 거는 어리석은 자를 위한 가르침이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가만히 보니까, 영리해 보여서 제가 그렇게 공연히 노력할 거 없이 딱, 소중한 줄 알아버리면, 이게 오직 나한테 주어진 하루하루가 한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거를 알아버리면, 아무 노력할 필요가 없어져요.

 

그런데 이치는 알았어요. 그런데 꼬라지 보면 될까? 안 될까? 안 돼요. 스님하고 대화할 때 이치는 , 그렇구나.”하는데 딱 보면 안 돼요. 그러면 왜 우리가 가까이 있는 사람, 좋아했던 사람이 미워지지 길가는 사람 미워하지 않잖아. 그죠? 그러면 좋아했던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널 사랑하면 좋아하면, 너도 나도 사랑해라. 좋아하라는 요구조건이 있어요. 길가는 사람한테는 아무 요구조건이 없는데,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는 내가 잘해주는 만큼 너도 잘하라는 요구조건이 있기 때문에, 이 요구조건이 나한테 만족스럽지가 않아. 내가 요구하는 만큼 안 해주니까 미워지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다 그건 장사에요. “내가 너 이만큼 좋아했는데 너는 요만큼 밖에 안 해주나.” “내 사랑한다고 3번 얘기했는데 너는 1번밖에 안했다.” 친구지간에도 내가 술값 3번 냈는데 너는 한번 밖에 안 냈다.” 내가 전화를 5번 했는데 너는 한번 밖에 안 했다. 이렇게 계속 머리를 굴려서 계산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말이 사랑이지 장사 속으로 사는 거요. 그래서 늘 손해났다. 이익 봤나? 아이고, 손해다. 이렇게 손해 볼 바에야 혼자 사는 게 낫지 같이 살면 뭐하노?”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같이 살면서 갈등이 심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는 나의 일이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너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요구를 하면 안 돼요.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데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대가를 하나님한테도 요구해요. “, 요번에 성전 짓는데 돈 많이 냈는데 좋은 일 없어요? 기도해 봐야 아무 효험도 없데요.” 이렇게 늘 계산적으로 산다. 이 말이요. 그래서 이게 사랑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에요. 끊임없이 장삿속으로 계산한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은 이렇게 전부 계산 장사 속으로 한다. 그래서 신앙이 아니에요. 이거는 세속적인 거지.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본질을 꿰뚫으면,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이 소중한 줄 알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이 되는데, 이게 지금 이해를 따지기 때문에 이 사랑이 눈물이 되고 미움이 된다. 원수가 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의도와 결과가 달라졌죠. 그것처럼 지금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하기 전에, 두 사람의 남녀가 모르는 사람이 만났어요. 그랬을 때 나하고 너하고 모를 때는 우리들의 무의식이 마음이 저 사람하고 나하고는 다르다.’ 이게 밑바닥에 깔립니다. 전제가 됩니다. 그런데 얘기를 해보니까 한국 사람이야. “너 코리안? , 같은 한국 사람이다.” 기분 좋아? 안 좋아? 좋지. 난 중국 사람인 줄 알았더니 한국 사람이다.

 

그래서 얘기를 해봤더니 고향이 같은 전라도야. 같은 경상도야. 그러면 더 좋아요? 안 좋아요? 좋지. 그런데 종교를 물어봤더니 같은 천주교야. 더 좋죠. 으흠. 취미를 물어봤더니 등산이야. 같은 등산이야. 이렇게 하나같고, 두 개 같고, 세 개 같고, 네 개 같고, 다섯 개 같으면 굉장히 친해져요. 그래서 , 너하고 나하고 같이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까지 발전해서 결혼을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이 무의식이 마음이 어떻게 바뀌는 줄 알아요? ‘너하고 나하고 똑같다.’ 이렇게 전제가 됩니다.

 

그런데 결혼 한 이튿날부터, 그 다음에 뭐가 발견된다? 다른 게 발견 되요. 아시겠어요? 아이 목욕하고 수건을 갖다가 거기다 안 집어넣어놓고 젖은 거를 그냥 밖에 걸어 놔. “아니 왜 빨래통에다 안 집어넣어놓고 여기다 놔 놓느냐?” 그러니까 아니, 그거 목욕하고 닦은 건데 다시 말려놨다가 닦으면 되지.” “아니 지저분하니 저기 넣어야지.” “아니, 그게 왜 지저분해이거부터 시작하는 거요. 이제 음식을 만들어 놔도. “아니, 이게 간도 못 맞춰.” “간이 안 맞아?”하고 먹어보니 간이 딱 맞거든요. 간이 딱 맞두만.” 짜다 싱겁다 가지고.

 

이런 식으로 살면 하나 둘 셋 넷 백가지, 천 가지, 만 가지 이제 다른 게 나타납니다. 그러니 잔 펀치에 멍 든다고 아이고, 이 인간하고 못살겠다.” 이래서 뚜렷하게 안 맞는 거는 없는데, 큰 사건은 없는데, 뭔가 그냥 꼴보기 싫어. 그래서 못살겠다.” 이렇게 되요. 옛날에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 누가 봐도 이혼할 만한 사연이 있는데, 요즘은 이혼하는 사람들 옆에 사람이 봤을 때 사연을 알 수가 없어요. 뭣 때문에 그러냐하면 자기도 말을 잘 못해. 그럴 때 딱 하는 말이 뭐요? ‘성격차이다.’ 이래요. 성격차이라는 게 뭐요? 별 사유가 없다. 이 얘기에요.

 

오늘 신문에 보니까 한국에서 60이 넘어서 황혼이혼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데요. 그런데 50%가 성격차이래요. 특별한 이혼사유가 없다 이 얘기에요. 옛날에는 작은 집을 하나 애를 가졌거나 무슨 이유가 있어야 되잖아. 그죠? 그래야 이혼사유가 되는데, 요즘은 아무 이혼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다른 거를 따지면 열 가지, 백가지, 천 가지, 만 가지, 십만 가지, 백만 가지가 다를 수 있습니다. 작은 거 다 따지면, 그리고 가까이 있을수록 다른 게 발견 되는 거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가까이 있을수록 뭐가 생긴다?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런데 다르다는 거를 당연하게 인정하면 아무문제가 안 돼요. 다르다는 걸 당연하게. 그러니까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니고, 가까이 있으면 다른 것이 발견이 된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같은 게 눈에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다른 게 눈에 보여. 멀리 있으면 큰 것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티끌까지 다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부가 같은 사업장에서 같이 장사하면, 싸움이 많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가능하면 같이 안하면 좋아요. 거기는 같이 하면 보이는 것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사장이 둘이라서 싸우는 거요.

 

그러니까 같은 식당을 한다하면 남자가 사장하든지 여자가 하든지 하나가 사장을 하든지, 하나는 종업원을 해야 되는데, 둘이 다 사장을 하기 때문에 그게 싸우게 되요. 어느 회사든지 머리가 두 개면, 운영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집에 있으니까 지금 머리가 두 개가 된 거요. 그러니까 남편이 회사 나가버리면 자기가 대장인데. 아시겠어요?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지위가 하나 더 있으니까 불편한 거요. 무의식 세계가 그렇다는 거요. 그래서 아내는 불편한 거요. 남자는 집에 있으면 편하죠. 지 혼자 있으면 지가 커피 끓여 먹어야 되고 뭐 해야 되는데, 이렇게 하니까 좋죠.

 

그러니까네 그 둘이는 원래 지장 다니다 집에 오면 주로 아내가 못 견뎌요. 남편이 못 견디는 게 아니고.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그거는 우리의 상식선에서 보면 힘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조금 진실을 보면, 인연의 소중함을 알면 이거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두 가지 해결책이오. 본질을 꿰뚫어버리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면 이건 문제 자체가 없어져버리고, 그러나 내 마음의 움직이는 대로 보면 힘드는 건 사실이에요. 그럴 때 공부하는 2, 첫 번째 꿰뚫어버렸을 때는 노력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이 문제를 해결할 때는 다르다는 걸 항상 인정해야 되요.

 

그러니까 , 저 사람은 저렇구나해야지, “왜 저러지?” 이러면 안 된다는 거요. “싱겁다이러면 소금 여기 있어요.” 이래야지, “짜게 먹으면 안 돼요.” 이렇게 나가면 안 돼요. 그래서 이 같이 있을 때는 뭐든지 나와 다른 것을 그냥 수용해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이거요. 그러니까 그 두 가지 중에 본질을 꿰뚫는 게 현명한 사람이고, 본질을 못 꿰뚫으면 조금 노력을 해야 되요. 항상 뭐하다? 서로 다르다는 거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되요. 그러면 같이 있어도 귀찮지 않아요. 같이 있어도 귀찮지 않으면 헤어져도 외롭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중생은 어떠냐? 같이 있으면 귀찮고 헤어지면 외롭고, 그래서 또 같이 있으면 귀찮고 또 헤어지면 외롭고. 그래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이거를 방황이라고 그래요. 방황. 그러면 같이 있을 때는 같이 있어서 좋고, 헤어지면 헤어져서 좋고,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고, 같이 있어서 같이 있어서 좋다. 이러면 어때요? 올 것도 갈 것도 없기 때문에 여여하다. 이걸 부처라고 그래요. 여여하다. 여래.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다. 올 것도 갈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그러니까 서로 다름을 인정을 아직 안하고, 자기 무의식 세계가 항상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왜 이래? 왜 이래? 왜 그래? 그것 좀 닫지 어쩌고 저쩌고,” 이게 남아있으니까,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중심성, “, 이거는 내 취향이지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타인을 이해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든 똑같은 말이에요. 그렇게 하면 좀 나을 거요. 그런데 그렇게 함께 있는 거를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이제 자기가 헤어져도 스트레스를 안 받고, 그러면 여여하다 그래요.

 

직장을 구해서 나가도 외롭지 않고, 같이 있어도 귀찮지 않고. 그런데 같이 있으면 귀찮고 또 이렇게 어디 저러다 직장이 하나 구해서 멀리 주말 부부되면 이제 또 외롭다고 난리고 나한테 또 물을 거요. “남편이 멀리 떨어져서 주말부부인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또 이렇게 물을 거요. 그래서 늘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가 되니까 불교 용어로 말하면 뭐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 인연 따라 해라.’ 이거를 천주교신앙대로 하면 뭐라고 하면 좋겠다? 천주교 다니니까 한번 얘기 해봐요. 내가 테스트를 해봐야 되겠다. 이럴 때 뭐라고 기도하면 된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아시겠어요? ‘주님께서 함께 있으라면 함께 있고, 헤어지라면 헤어지고,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주인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간섭하지 마라 네가. 아시겠어요? 주의 뜻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듯이, 남편이 집에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고. 그래야 그게 신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