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우학스님_금강경

우학스님의 금강경 17_1. 무법가득, 옛다! 법 받아라.

Buddhastudy 2017. 6. 16. 20:06


  

반갑습니다. 금강경 핵심강의, 좋은 인연 출판사 책 261페이지 무법가득분 제22 하겠습니다. 무법가득이라,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263페이지 본문을 정성껏 독송해보겠습니다.

 

수보리 백불언

세존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불언 여시여시 수보리 아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무유소법가득 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 바 없음이 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작은 법이라도 가히 얻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느니라.”

 

지금 전체 핵심은

법이라는 것은

주고받고 할 것이 없다.

스스로 맛봐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일승의 세계라 하는데 다 하나의 바탕,

깨달았다 하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이라고 하는 법이

둘이 될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방편상 나는 깨달았다.” 하는 말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도 계속 반복해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자꾸 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쓸데없는 소리고,

또 그 사람은 진정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게 보면 분명합니다.

 

이 세상은 완전히 하나의 세계인데,

중생의 분별심으로 그렇지 못하다.

 

옛날에 조선중기의 일입니다. 벽계정심이라는 스님이 계셨고, 그의 제자 벽송지엄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렇게 4자를 말할 때는 앞에 2자는 법호를 말하고 뒤에 2자는 법명을 말해요.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 벽계정심, 벽계정심이라는 은사가 계셨고, 그 제자 벽송지엄이라는 스님이 계셨다. 이 말입니다. 그 두 분 관계에 얽힌 얘기입니다.

 

그 벽계정심스님은 당시에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피해서, 피난처로 아주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혹시 의심을 받을까 싶어서 그냥 부인 하나 데리고 위장을 해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법을 잇기 위해서는 때로는 또 그렇게 숨어서 지내야할 때도 있어요. 당시에는 절이 다 폐사가 되고 관가에서는 스님들을 전부 잡아다가 노비로 삼고, 그럴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인하고 둘이 지내는 척하면서 산에 사는데, 어느 날 제자 하나가 찾아왔어요.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죠. 그 사람이 후일에 벽송지엄이라는 또 다른 큰 스님입니다. 이 벽송지엄스님은 여진족, 당시에 조선의 여진족과 싸움이 있었는데, 거기서 크게 이겼지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해서 도를 구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전전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벽계정심스님을 찾아갔다. 이 말이죠. 찾아가서 인사를 하니 나는 제자를 둘 생각이 없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벽송지엄스님은 스님,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그래, “그런데 여기는 네가 잘 방이 없다.” 이랬어요. 보니, 그냥 단칸방에 둘이 사는 거지 방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또 스님이 하는 얘기가 제가 방을 하나 만들겠습니다.” “그래. 네가 돌을 쌓아서 방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먹고 살 길이 없다. 너도 보다시피 나는 땔나무를 해서 저 장에 가서 팔아서 그것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데 안 될 일이다.” “먹는 것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요.

 

도를 구할 때는 그런 각오가 있어야 되거든요. 먹는 것도 자기가 다 해결하겠다. 이런 각오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튼 그래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래도 자꾸 묻고 싶은 게 도거든요. . 도를 구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그래서 늘 얘기합니다. “스님, 그래도 저는 도가 궁금합니다. 도를 일러주십시오.” 하고 계속 보챕니다. 그런데 스승 되는 사람은 이리저리 핑계만 되요. 핑계.

 

, 저녁에 가르쳐줄게.” 또 저녁때가 되면 아이고, 피곤하다. 잠 좀 자자.” 그래서 안 가르쳐주고. 산에 같이 나무하러 갔다가 또 내려오면서도 하는 얘기가 도 좀 일러주십시오.”하면 , 지금 배고 고픈데 밥 먹고 얘기해보자.” 밥 먹고 나면 좀 쉬어야 되는데 쉬자.”하고는 이러 저리 핑계대고 계속 미루고 미루고 가르쳐주지를 않는 거예요. 12년이 아니고 10년을 그러고 살았어요. 10. 만약에 부부간에도 이리저리 미루고 10년을 약속했던 것을, 약속은 아니지만 바라는 바를 자꾸 요구하는데 안 들어주면 10년 견딜 여자 있겠나? “아이고, 남자 너 뿐이가?” 하고 딴 데 갈 거요.

 

그런데 10년을 부부관계도 아니고, 이성관계도 아닌데, 10년을 기다렸다니 10, 대단하죠.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오래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10년쯤 지나니까, 모든 것이 다 이 스님이 위장 아니냐? 큰스님이라고 하지만 그냥 부인도 있는 거 같고, 해서 신심이 그냥 떨어졌어요. 가야겠다. 내가 10년을 여기서 청춘을 허비했는데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둘이 산에 나무하러 같이, 나무는 늘 하러 가야 됩니다. 땔나무를 시장에 내다 팔고는 조금 양식을 더 구해오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은사되는 사람하고 둘이가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는 척 하고는 각 골짜기로 흩어졌어. “은사님은 이리가십시오. 저는 저리 가겠습니다.” 딴 골짜기에 들어가서 나무하는 척 하다가 바로 뛰어 내려갔어요. 그러고는 짐이라는 게 뭐 있겠습니까? 걸망하나 있었겠죠. 스님들은 운수남자라 해서 떠나가면 그만이라. 10년 있었는데도 큰 짐은 없어요. 그래서 걸망에다가 대충 옷 조각 몇 개 넣고, 가사 바루 챙기고 짊어지고 내려갑니다. 그러자 그 공양주 보살이 하는 얘기가 부인이 바로 공양주 보살이죠.

 

아이고, 스님한테 인사나 하고 가시지 왜 그냥 가십니까? 뭐가 못마땅해서 가십니까?” “그렇게도 가르쳐달라 해도 안 가르쳐주고, 영감쟁이가, 그렇게 배짱 튕기고 내가 여기서 땔나무 해다가 양식이나 갖다 대는 사람이냐고. 나는 간다고.” 그러고 내려갔어요. 벽계정심 은사스님이 나무를 하시다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요. 그래서 옆 골짜기에 가보니 나무를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제자가 없어요. 그래서 급히 암자로 뛰어내려왔죠. 공양주가 아주 시무룩해서 하는 얘기가

 

그 젊은 스님 갔습니다.” “왜 간다 하더노?” “스님이 하도 배짱 튕기고 안 가르쳐주고 해서 더 못 견디고 간다하는데요. 그래서 저 밑에 내려가고 있습니다.” 저 밑에 보니까 스님이 걸망매고 한참 산허리에 내려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스님이 공양주더러 얘기했습니다. “거 참 사람도 이상하네. 내가 안 가르쳐준 게 아닌데.” “언제 가르쳐줬는데요?” “내가 밥 먹을 때도 가르쳐줬고, 세수할 때도 가르쳐줬고, 장에 나무 팔러 갈 때도 가르쳐줬고, 산에 나무하러 갈 때도 가르쳐줬고, 눈 마주칠 때도 가르쳐줬고, 내가 한시도 내가 안 가르쳐준 적이 없다.” 이랬거든요.

 

공양주는 말뜻을 알아서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그래서 스님이 저 아래 내려다보니 지엄이 내려가고 있어요. 그래서 그 지엄을 불렀어요. 산중턱에 저 밑에 내려가는 불렀어요. “지엄아이렇게 불렀어요. “지엄아늘 듣던 목소리니까, 자기는 분심이 나서 화나는 마음에 터벅터벅 내려갔지만, 늘 듣던 목소리고 은사스님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워요. 그 순간. 그래서 돌아봤어요. 몸을 돌리고 돌아보니 스님이 옛다! 법 받아라.” 법을 던져줬어요. 법 받아라.’ 하는 소리와 그 던지는 시늉, 던지는 모습을 보고, 그때 제자 지엄이 크게 깨쳤다. 그랬어요.

 

실지로 주고받는 게 있었겠습니까? 주고받는 게 뭐가 있습니까? 빈손으로 법 받아라.” 하는데. 그래서 지엄스님은 그 길로 올라와서 삼배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다시 잘 모시고 살았다.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법이라는 것은 주고받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치는 문제라. 그래서 각론에 한번 봐봐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말로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문자나, 철학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이나 문자나 철학을 넘어서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세계는 마치 허공의 세계와도 같아서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얻을 바가 있다면 이미 망상이요, 얻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바른 깨달음이 된다. 보리에 대하여 희구심이 없으며 또한 소득심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 아래 게송에 보시면

구인이 불여구장이니라. -야보-

 

남에게 구하는 것은

자기에게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면 둘이 살면서도 그렇게 섭섭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뭘 자꾸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불교대학에 와서도 나는 이만큼이나 했는데 불교대학에서 나를 안 알아줄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불교대학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죠. 불교대학과 내가 하나인데 주고받을게 뭐 있냐 이거죠.

 

일승이라. 본래 하나의 세계, 가정도 마찬가지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냥 하나가 되어버리면 섭섭한 마음이 일어날 수도 없어요. 그것은 부부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죠. 부부관계가 나는 이만큼 했는데, 저 사람은 왜 나한테 저렇게 해줄까?”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면 이미 둘인 것이거든요. 하나는 아닌 거죠. 그런데 우리가 진리 공부를 많이 해서 어느 경계에 들어가 버리면 그런 마음이 없어져버려요. 다 자기 몸이고, 다 자기 팔다리고, 다 자기 머리고한데 섭섭한 게 뭐 있냐 이거죠. 그래서 우리는 법도 또한 그러하니 삶도 또한 그래야 한다. 그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