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1_3. 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아들의 성격을 고칠 방법은 없을까요?

Buddhastudy 2017. 10. 18. 21:16


아마 이 부부는 이 부분만이 고민이 아니고 요즘 모든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고민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못 먹고 못 살 때, 다 자녀를 가지고 자식을 양육했을 때는 유치원 교육이 특별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와진 상태에서 그들을 통해서 양보할 줄 알고 화합할 줄 알고, 그리고 타협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하나내지는 둘밖에 낳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다 왕자고 다 공주입니다. 유치원을 가서도 배워야 되는 부분은 한글교육이나 숫자교육을 배우는 부분에 우선해야 될 것이 아니고,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

영원히 부모의 슬하에서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거든,

그 세상을 어떻게 조율하고

어떻게 타협할 건가를 가르치는 부분이

유치원 교육의 기본이 되어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님들은 이 인성이라고 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기적 사고의 동물로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방치하는 경우들이 너무 많고, 그래서 오직 내 아이가 딴 아이들보다 우월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경우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가르침인 겁니다.

우리 과거에 어머니들이 자녀에게 뭘 가르칩니까?

모든 중생은 누구에겐가 받았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교육을 통해서 주는 기쁨을 가르쳐야 됩니다.

 

과거에 우리 할머니가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뭘 귀한 것을 만들어놓고 한입만 달라고 그래요? 안 그래요? 한입만 달라고 그러면 그 한입을 아이가 줬을 때 그 아이를 큰마음으로 리액션을 해서 칭찬을 합니까? 안합니까?

 

그럼 그 아이는 , 줬을 때 상대방이 저렇게 기뻐하는 거구나.” 저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기쁨을 보는 것이 저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하나내지는 둘이 낳다보니까 이런 부분의 생각이 거의 없어져버려요. 그리고 소위 말하는 맞벌이 부부는 아이들에게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만이 부모가 해야 될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이것은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미 고등학교까지 자란 아이의 보며 후회를 한들 엄청 많이 늦은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때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 아이를 이제는 보호해서 기르기보다는 뭔가 풍진 세상에 내놔서 서로 타협할 수 있는 방법, 이런 부분을 가르쳐야 되겠는데, 그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요?

 

바로 학생회 서클 같은데 보내는 겁니다. 일반 서클에 보내면 잘 안되니까, 우리 행주스님같은 사문사 학생회 같은데 보내면 교육을 잘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님들이 귀하디귀한 내 자식 하나만을 바라다보고 지원하는 부모가 되지 말고, 그 학생의 활동을 위해서 뒤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을 통해서, 내 아이 하나만을 통해서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우름이라고 하는 자체를 통해서 교육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많은 내 자식만 귀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청소년들이 내 자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로 그들이 양육되어지고, 그들이 교육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의 지원 같은 것도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은

귀할수록 엄하게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하디귀한 아들을 하나 얻었어요. 너무 가난했죠. 과거에 부자로 살았던 사람이 몇 집이나 있겠습니까? 지금은 땟거리 걱정 안하는 사람이 거의 다수이고, 땟거리 걱정하는 사람이 적은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지만, 과거의 우리들은 인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어떻게 했냐하면 진지 드셨습니까?” 하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살았어요. 얼마나 굶고 사는 것을 밥 먹듯 그렇게 굶고 살았으면 진지 드셨냐?”라고 하는 것이 인사였겠습니까? 그 가난했던 시대에 어떤 귀한 아들을 둔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부부는 너무나 귀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꽁보리밥으로 삶을 살면서도 아이를 위해서는 종발에다가 쌀을 일어 안치고 보리밥 위에 쌀을 얹어 밥을 했습니다.

 

항상 아이는 그 쌀밥을 아이에게 주고, 두 부부는 보리밥으로 일관했죠. 그런데 어느 날 밥을 맛있게 먹다가 아들이 유심이 아버지 밥을 쳐다보더니 아버지 밥에 쌀이 하나 들어가 있던 것을 봤습니다. 그 쌀밥을 쳐다본 아들이 뭐라고 그랬냐하면 아버지 밥에 내밥 들어갔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런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일까? 쌀이라고 하는 것인 저만 먹는 밥이 되는 거고, 그 험한 보리쌀은 아버지만 먹는 밥이라고 하는 일관했던 그 교육이야 말로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듯이 바로 귀할수록 밖으로 더 많은 교육을 시키고, 더 많은 여행을 시키고, 더 많은 체험을 시키는 부분자체가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저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을 아우를 수 있는 그런 행사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체험교육 같은 것도 좀 자주 가시고, 또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교육들을 자주하시고,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어우러져서,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여행도 함께 하시고 견학도 함께 하셔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눈높이를 좀 어느 정도 맞추어줄 수 있는 교육이 된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우러져서 함께 사는 부분의 삶, 거기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기적인 부분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나눠줄 줄 알고, 나눌 줄 알고, 화합할 줄 아는 부분의 소통의 방법을 가르치는 자체가 하교에서 우등생을 만드는 것보다도 우선되어져야 될 장르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그 부분에 가장 멋진 부분은 여러분, 월도스님 세상을 잘 사는 것 같죠?” 잘사는 방법이 제가 어렸을 때에 구인사가서 봉사활동 많이 했거든요. 방학 때만 되면 구인사가서 국 퍼 나르고, 밥 퍼 나르고. 그럴 때 스님들이 한 번씩 칭찬해주고, 그 스님들 칭찬이 너무 좋아서 지금 이렇게 스님으로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의 교육은 희망입니다. 비난하기 보다는 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그 희망에 대한 칭찬을 했을 때, 그 아이는 그것이 인격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인생의 목표일 수 있습니다. 모쪼록 지금도 물질적으로 그냥 그렇게 배려할 것이 아니고,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부분의 행위를 일컬어내셔서 더욱더 멋진 청년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많이 해주시고요, 항상 찬사를 보낼 수 있는, 그리고 항상 부모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사실을 일러줄 수 있는 행위를 통해서 멋진 아이로 성장되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