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8)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375회] 상대방 이야기가 고통으로 느껴져요.

Buddhastudy 2018. 3. 22. 19:58


저는 개인적인 성향이 맞아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담 심리 치료를

몇 군데 직장을 거치면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태생이 23녀의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다 보니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되살려서 상담을 열심히 해 보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오니까 능력의 한계가 느껴졌고요.

 

그 한계라는 것은 상담 상대자의 고통이나 기쁨, 일상생활 이런 것이 어느 순간

너무 공감이 잘 되서 고통은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기쁨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플 정도로 기뻐지고 이런 시점이 어느 순간 오더라고요.

 

이게 나에게 문제가 공감하는 방법이나 나의 상태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가 정토회를 알게 됐고요//

 

 

그러니까 질문의 요점이 뭐냐?

자기가 지금 뭐가 괴롭냐니까.

그럼 안 하면 되잖아.

 

지금 그게 직업이에요?

아니 아니 원래 직업이었어요?

사회복지사 해서 먹고 살고, 상담은 다른 사람이 물으면 잠깐씩 도와주면 되잖아. 의사가 감염된 환자를, 콜레라에 감염되었든 뭐에 감연 된 환자를 치료를 하는데, 의사가 자꾸 세균에 감염이 되는 거요. 만약 간호사다 하면 간호사가 자꾸 감염이 된다.

 

? 간호사가 의사가 면역력이 떨어져서 자꾸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꾸 본인이 감염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치료를 안 해야 될 거 아니오. 아무리 자기가 의사라 하더라도 자기가 면역력이 너무 떨어지는 체질이라서 환자를 돌보면 환자의 병이, 폐렴을 치료하다보면 내가 폐렴에 감염 들고, 감기 환자 치료하다 보면 내가 감기 들고, 콜레라 치료하다보면 내가 콜레라 걸리고.

 

왜 그러냐하고 살펴봤더니 내가 너무 면역력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면 의사를 그만해야 될 거 아니오. 다른데 가서 환자를 보지 말고, 의과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든지, 안 그러면 주로 실험실에서 기초 의학을 하든지, 이런 것을 해야 될 거 아니오.

 

아니, 지금 환자를 상담하면. 예를 들어서 환자의 마음이 나한테, 환자의 심리적 불안이 나한테 전이가 되어서, 그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뻐서 넘쳐서 문제고, 그 사람이 괴로우면 나도 괴로워서 잠 못 잔다. 하는 것은 환자의 정신적인 병이 나한테로 전이된 거란 말이오. 좋게 말하면 자기가 공감을 잘한다고 말하고 나쁘게 말하면 환자의 병이 자기가 전이 됐다. 이 말이오. 감염이 됐다. 이 말이오. 그럼 안 해야지.

 

극복을 할 수 있으면 나한테 왜 물어, 자기가 하면 되지.

방법이 없어. 내 방법은. “그러면 환자를 상담하지 마라.” 이게 내 방법이지.

. 그건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체질이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 그래서 사과를 먹으면 바로 두드러기가 생긴다. 그럼 사과를 안 먹으면 돼. 이 수 많은 과일 중에 사과 안 먹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런데 자기는 사과를 꼭 먹어야 되겠다. 이 알레르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 스님 방법은 그거 복잡하게 할 필요 뭐 있냐? 사과 안 먹으면 되지.”

 

예를 들면 복숭아를 먹으면 알레르기가 있다. 그럼 복숭아를 먹지 마라. 왜 어렵게 자꾸 문제를 풀려고 그러냐. 그런데 밥이나 빵을 먹으면 알레르기가 있다. 그럼 이건 치료를 해야 돼. 이건 안 먹으면 죽으니까. 사람이 살아야 될 거 아니오. 그럼 이건 어떻게 하자. 이런 안이 나온다 말이오. 그러니까 남편하고 도저히 못 살겠다 그러면 살지 마라. 이러지, 못살겠는 걸 어떻게 살아. 안 살면 되지.

 

고칠 수는 있는데, 굳이 그게 힘들게 고칠만한 가치가 없지 않느냐라는 거야.

그런 것을 뭐라고 그러냐? 집착이라고 그래. 그럼 수행이라는 것은 집착을 놓아라. 이렇게 가르치는 게 수행이에요. 어떤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어. 자긴 꼭 그래도 108배를 하겠데. “108배 하지마라.” “아니오. 정토회 다 108배 하잖아요. 정토회는 108배 꼭 하라 그러던데요. 어떻게 108배 할 수 있어요? 아픈 다리를 가지고도.”

 

이렇게 얘기하면 스님이 넌 다리 아프니까 108배 하지마라.” 이렇게 얘기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108배 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108배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108배가 하기 싫어서 108배를 안하고 딴 방법은 없어요. 수행은 싫어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게 수행이기 때문에 오 그럼 300배 해라.” 내가 이렇게 가르쳐 주는 거요.

 

“108배하기 싫은데 이거 어떻게 극복해요.” “, 그럼 300배 해라.” “그럼 300배 더 힘들잖아요.” “그럼 너 500배 해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오. 이것은 싫어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게 수행이기 때문에. 자기는 지금 하고 싶어서 병이 나버렸으니까 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놔 버리면 병이 낫는다. 이 말이오.

 

치료할 게 없다니까. 자기는. 상담을 안 하면 치료 안 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잖아. 자기 말은 상담을 해서 상대의 그 감정이 나한테 전이가 되어서 나도 같이 흥분한다. 이러니까 그럼 그 병 있는 사람을 안 만나면 된다. 이 얘기인데, 자기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데 그게 지장이 있다면 당연히 치료해야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 상황에서 내가 벗어날 수가 없다면

고쳐야 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굳이 그것을 치료한다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야.

 

결혼도 안 한 남자 여자가 이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해요?” “그럼 그만 둬라.” 이런단 말이야. 결혼한 남자도 그만 두는 세상에, 그냥 몇 번 만났는데 그만 두는 게 뭐가 문제고. 이 얘기야.

 

그러니까 그것을 꼭 극복을 해야 될 일은 아니다. 뭐든지 다 극복해야 될 일이 아니라는 거요. 애가 밥 먹기 싫다면 꼭 먹어야 되는 거 아니란 말이오. 요즘은 주로 비만이 문제이기 때문에 안 먹을수록 건강에 좋은 거요. 그럼 먹기 싫은 것을 왜 굳이 먹으라고 그래.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된다.

 

그런데 먹고 싶으면 먹어라. 그런데 너무 비만해요. 이것은 문제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럴 때는 먹고 싶어도 안 먹어야 된다. 이 얘긴데,

 

자기는 그래서 내가 직업이냐고 물어보잖아요. 거기에 밥줄이 걸려서 이거 말고 밥 먹기가 어렵다하면 좀 더 고려되지마는, 자긴 직업이 따로 있고 그게 하고 싶었는데 해보니까 자기가, 자긴 좋게 말해서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이렇게 말하는데, 스님이 볼 때는 상대의 감정이 전이되는 사람이란 말이오. 아시겠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나중에 또 상처받을 까봐 싶어 그런데,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이게 지나치면 무당이 되는 거요. 아시겠어요? 무당은 이렇게 상대를 만났을 때 상대의 무의식이 자기한테 무의식으로 바로 다가오기 때문에 상대 마음을 딱 꿰뚫어 아는 것 같이 보이는 거요. 딱 들어오자마자 조실부모 했구먼.” 이런단 말이오. 그럼 이래서 고꾸라진단 말이오.

 

왜 그러냐하면 부모가 돌아가심에 대해서 무의식세계에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기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이 그럴까요? 부모가 늙어서 돌아가셔서 그럴까요? 어릴 때 돌아가셔서 그러겠죠. 부모가 돌아가신 것이 마음의 상처가 된 사람은 부모가 편안히 돌아가실 때 그럴까? 무슨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그럴까?

 

그러면 그게 우리에게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다. 이 말이오. 무의식을. 그런 것은 보통 사람은 의식이 무의식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의식으로 그게 안 보이잖아. 그죠. 무의식은 공감이 되는 거요. 그런 것이 자기감정이 조절되는 선에서 이루어지면 그건 도에 들어갑니다.

 

이성적인 판단, 이성적인 것이 컨트롤 되는 아래에서 무의식이 작동하는 것을 다 보면 그게 자기 마음을 자기가 주시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이 의식이 사라지면 무의식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러니까 점쟁이가 점을 칠 때 동전 쥐고 이러잖아. ~~~ . 탁 던지고 이럴 때는 자기의식이 잠깐 멈추고 무의식세계로 빠지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일상적으로 이성적인 통제를 벗어난다. 내 감성이 이성이 통제가 잘 안 된다. 그러면 그 부분은 내가 손을 떼는 게 낫다. 이런 얘기야. 그러니까 하지마라 이 얘기가 아니라.

 

그건 종류가 다르다는 거야. 상담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면 상담을 안 하면 되잖아.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상대의 감정이 자꾸 나한테 전이가 된다. 그러면 이것은 병이란 말이오. 일종의.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약간의 정신적으로 내 생활이 불편하니까, 불편하다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거 아니야. 그럼 이것은 치유를 해야지. 그러니까 관점이 다르다는 거요.

 

그러니까 상담은 안하면 되기 때문에 그건 치유고 뭐고 필요가 없어. 안 만나면 되니까. 안 가면 되니까.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할 때는 자식이 있고 이러니까 안 살수가 없다. 그러면 안 살 수가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그런 남편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라. 이런 얘기지, 결혼했기 때문에 살아라. 이런 관점이 아니라는 거요. 어떤 얘기든지.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 묻잖아.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상담을 하니까 감정이 전이되어서 힘들다 하면 상담을 안 하면 되는 거요. 그럼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의 사이에 감정 전이가 일어나서 생활이 어렵다. 이러면 이것대로 생활의 불편하니까 그건 치료를 해야 되는 문제다. 이 얘기요. 어떨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똑바로 얘기해 봐요.

 

 

그래. 그게 중요한 거요. 실제로 일어난 얘기니까. 그럼 그것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가 먹는 것은 욕심이라고 그러고, 남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먹게 해주면 그건 욕심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안 되고, 그러니까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 도움이 돼야 되잖아.

 

쥐가 배고프다가 쥐약 든 음식을 좀 먹게 해달라고 하면 자기는 먹게 해줘요? , 그래도 먹어도 안 된다. 이렇게 말해야 되요? 그래. 먹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에요. 죽으려면 먹어도 되니까.

 

그런 것처럼 그럴 때 너무너무 쥐가 먹고 싶어 하니까 그래. 먹어라.” 이렇게 자기는 허락을 해준다. 이런 얘기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건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 안 되어서 내 감정처리 하는 것 밖에 아니다.

 

우리 정토 회원 중에도 15년 전에 압록강 두만강 건너 북한 아이들이 난민이 많이 넘어와서 중국의 시장 통에 꽃제비로 살았단 말이오. 가서 그 아이들을 보면 맨날 우는 거요. 너무너무 불쌍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거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을 딱 필요한 만큼 안 돕고, 아이들이 얘기하면 어머니 돈이 없어요.” 이러면 돈 주고, 뭐가 없다면 뭐 주고, 이러니까 애들이 이 사람을 놀리는 거요. 조국에 돌아가겠다 해서 돈 달라. 그래서 줘놓으면 이튿날 시장 통에 또 있는 거요. 그러면 나중에 화가 나는 거요.

 

이것은 좋게 말하면

마음이 착하다가 말할 수 있지만,

이건 어리석은 거요.

 

그러니까 시장 통에 10명이 있는데 내가 도울 수 있는 능력이 3명밖에 없으면 3명만 도우면 되는 거요. 그러면 집에 와서 우는 녘에 딴 데 전화하거나 호명을 해서 4명을 돕도록 하는 게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5명 돕도록 하는 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혼자서 집에서 운다고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또 그 아이들이 북한에 가겠다고 내가 돈을 몇 만 원을 줬다. 가니까. 그런데 그걸 갖고 딴 데 써버리고 이튿날 또 시장에 보인다고 화낼 필요도 없다. ? 그 아이들은 뭐든지 돈을 조금이라도 더 얻고 싶고, 더 얻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말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자꾸 거짓말 하면 그 아이를 안 도우면 되지, 그 아이한테 성질내고 괘씸해 할 필요는 없는 거라는 거요. 현실적으로. 그런데 우리가 그게 잘 안 된다면 이건 내 감성조절이 안 되는 거에 속하는 거다.

 

그러니 내가 평점을 한다. 남을 평점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 사람으로서는 낮은 평점이 나오면 기분이 나쁠 거 아니겠어요. 그럼 그 기분 나빠하는 것을 내가 감수를 해야 된다는 거요. 세상이라는 것은. 감수를.

 

그러면 그 감수하기 싫으면 평점을 안해야 된다는 거요. 스님도 인생 상담만 하면 대부분 다 사람들이 그저 109명은 좋아합니다. 그래도 한두 명은 안티세력이 있지만. 그런데 사회적인 질문을 해서 사회적인 얘기를 하면 안티가 아주 강하게 일어나는 거요. 그럴 때 그런 욕이 듣기 싫으면 그런 얘기를 안 하면 되고, 그런 얘기를 했을 때는 그런 욕을 받아들여야 되요.

 

그것을 내가 강제할 수가 없다는 거요. 나는 내 하고 싶은 얘기 다하고, 다른 사람은 다 동의를 해라. 이게 불가능하다는 거요. 어떻게 사람의 감정을 내가 다 조정합니까. 그렇게 되면 북한처럼 되는 거요. 옛날에 왕조시대처럼.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다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그거는 이치적으로 내가 평점을 하는 위치에 있으면 평점이 자기만큼 못 나온 사람은 당연히 비난을 하는 거고, 그럼 내가 비난을 감수해야 되고, 그 비난을 감수하기 어려우면 나는 평점 하는 위치를 포기해야 되는 거요.

 

다른 위치, 서비스만 해주는 위치를 해야 되고, 그 다음에 누가 하도 먹고 싶어서 너무 안 되어서 내가 줬으면, 그러면 안 준 다른 사람의 비난을 내가 감수를 해야 된다. 어쨌든 불평등 하잖아요. 자기는 이미 어떤 시설에 가서 한다 그러면 그것은 공적 업무에요. 그럼 거기에 규칙을 따라야 되는 거요.

 

만약에 내가 사사로이 하면 그 안에 내가 개인감정으로 해서 불평등하게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부당한 거에 대해서 자기가 보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거기 규칙이 만약에 어긋난다든지, 이런 게 있겠죠. 그것을 너무 규칙적으로 해도 안 맞아요.

 

그러면 이제 사람 개인 규칙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을 안 해주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만 먹어도 되고, 어떤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 있잖아요. 규칙은 공정하게 나눠주지만 현장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시행하는 사람은 현장에서 약간 차이를 해야 되요.

 

그런데 그게 지나치면 규칙 전체를 어기게 되거든요. 규칙이 묶이면 경직 된다 그러고, 그 다음에 너무 현장에서 사사로이 하면 규칙이 무너진다 그래. 요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것을 중도라고 그래요. 중도.

 

그래서 우린 늘 중도를 지켜야 되는 거요. 중도는 경직도 안 되고, 무질서도 아니고. 질서를 지키되 그것이 경직되지 않도록, 요렇게 해 나가야 되는, 그것은 연습을 해야 되요. 자꾸 그 안에서 해보면서 연습을 해야 되니까, 자기는 지금 결론적으로 말하면 너무 자기 생각대로 한다는 거요. 자기감정대로 하려고 하는 거요. 요점은 거기에 있는 거요.

 

공감이 잘 되고 가 아니라, 자기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행동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문제가 있다. 그것을 약간 절제해야 되는 거요. 좋아도 안해야 될 건 안하고, 싫어도 해야 될 건 하는, 그런 약간의 자기감정에 대한 절제를 하는 것. 그게 수행이라고 해요.

 

절하는 게 수행이 아니고. 어떤 프로그램 과정을 겪는 게 수행이 아니고, 다만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 프로그램의 본질은 그런 자기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훈련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럼 현재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수련도 참가하면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적절하게 깨닫게 되요. 스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