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8)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사회의 부조리 앞에 마음의 평화 지키기가 어려워요.

Buddhastudy 2018. 5. 8. 20:58


최근 몇 년 동안 선불교 쪽에서 진행하는 명상 모임이라든가 스님들이 말씀하시는 곳 가서 듣고 배우고 있는데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미움에서 하지 말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평정을 가지고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하고 평소에 살라는 거를 배워서 나름대로 실천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문제 사회정의라든가 평화 환경문제 남녀차별 인종차별 장애인차별 이런 쪽으로 많이 생각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살다 보니까 이런 문제들은 개인적으로도 나타나고 법이나 정책으로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런 걸 주변에서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지 이거를 그냥 가만히 응시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내 마음의 평정을 찾기까지 기다릴 순 없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세상에 부조리라든가 폭력이나 사별이라든가 이런 거에 대해서도 한 사회인으로서 또 공동체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면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자식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죠. 내 자식이 올바르지 않은 길을 갈 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런 문제에요. 그럴 때 아끼고 사랑하니까 아이하자는 데로 내버려 둬야 되느냐. 올바른 길을 가지 않으니까 화를 내고 아이를 때려야 되느냐.

 

우리가 남이라면 올바르지 않으면 화를 내고 보복을 하면 되고, 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봐주면 되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 바른 길로 가지 않는다면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를 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그럴 때 꼭 미워서 아이를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우리가 가르치지 않습니까.

 

다른 비유를 든다면 호랑이가 우리 어머니를 물어서 죽였다. 그러니 화가 나서 호랑이를 죽인다. 이것은 보복이란 말이오. 보복. 그런데 호랑이가 우리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에 보복으로 호랑이를 죽이는 게 아니고, 호랑이가 이웃집 할머니를 또 물어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이웃집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호랑이를 죽인다. 이럴 때는 보복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정의를 할 때

개인적 보복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공익을 위해서 우리가 그 제재를 가해야 된다.

 

어떤 남자가 나를 성추행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분 나빠서 그 남자에게 혼을 내줄 거냐. 아니면 창피하니까 그냥 참고 갈 거냐. 이런 고민을 하는 데, 그 남자가 나를 성추행한 것은 봐줄 수가 있지만, 그 남자가 그냥 내버려두면 다른 사람을 또 성추행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공익을 위해서 반드시 고발을 해야 된다.

 

내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과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다.

 

내가 화가 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요.

수행의 문제고,

그것은 내가 진정을 시켜야 할 문제고,

 

그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내가 마음이 편안 하냐, 불편하냐하고 관계없이

공익을 위해서 또 해야 할 행동이다.

 

정의로운 행동은

내가 분노하면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분노하지 않으면 정의로운 행동을 안 한다.

이런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평정심을 가지고 해라.

분노로 하지 말고 평정심을 가지고 해라.

 

 

화가 나면

무조건 내 문제요.

 

화가 나는 것은 어떤 이유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해도 화가 나는 것은 내 문제다. 아베총리가 하는 발언을 듣고, 트럼프 대통령이 하는 발언을 듣고 내가 화가 난다하면 화가 나는 것은 나의 감정의 문제이지, 그것은 내문제이지 그것은 트럼프문제도 아니고 아베문제도 아니다. 이 얘기요.

 

그러면 그냥 내버려둬야 되느냐. 그게 아니다. 화가 나는 것은 내감정의 문제다. 그건 내 문제다. 수행자라면 그것은 진정시켜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 발언이 사회적 정의에 어긋난다면 그것을 위해서 행동은 해야 된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그러면 화가 안 나면 행동을 안 하고,

행동을 하려면 화가 나야 되고,

이게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든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미워서 반대할 수도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저렇게 하면 반드시 저 사람에게 나중에 큰 고통이 따를 거다. 그러니까 그걸 반대할 수도 있잖아. 우리가 어떤 피해를 입으면서도 반대할 수 있잖아. 이게 자비심을 가지고도 반대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정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랑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잘못되지 않도록 우리가 미리 막았어야 된다는 거요. 그런데 미리 막는 것에 대한 우리의 그만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은 그 사람이 고통을 겪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잘못만 있는 게 아니라, 방관한 우리의 잘못도 있다. 이런 얘기에요. 그 사람 잘못이 없고, 우리 죄다. 이런 뜻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정의를 향할 때는 미워서 하지 말고, 예수님이 사회정의를 얼마나 강력하게 추신하신 분인데. 부조리를 다 타파하시려고 예수님이 하셨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분노로서 증오로서 한 게 아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오히려 더 그런 정의를 행했기 때문에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마라. 원한으로 하지 마라는 거요.

 

우리가 어떤 성추행범이 있다. 그러면

그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너는 벌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복수고,

그건 교화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네가 앞으로 더 나쁜 짓을 해서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적정한 격리와 깨우침을 줘야 된다.

그래서 징벌이 아니고 교화란 말이오, 교화.

 

그러니까 예수님 이전의 구약의 하나님은 잘못하면 벌을 준단 말이오. 징벌의 하나님이란 말이오. 그럼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사랑의 하나님은 무조건 봐준다는 게 아니야. 그것을

 

제재를 가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제재를 가한다.

 

엄마가 자식을 가르치듯이. ‘너 나쁜 짓 했으니까 벌준다.’ 유황불로 확 지저 버린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는 거요.

 

 

그럴 위험이 있죠. 그럴 위험이 있기 때문에 평정심을 가지라는 거 아니오.

화가 나면 자기 생각대로 상대에게 제단을 할 수가 있다.

넌 나쁜 놈이다.”

그런데 그 나쁘다는 기준이 뭐냐?

 

예를 들면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일제 항거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살해했다든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다든지, 이런 것을 일본 사람 입장에서 보면 테러란 말이오. 요즘 중동에서 일어나는 테러잖아. 그럼 한국사람 입방에서 보면 그것은 저항운동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것을 옳으니 그르니 볼 때,

자칫 잘못하면 자기감정에 의해서

옳은 행동이다,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표현하기가 쉽기 때문에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고,

애민의 마음에서 정의를 실현해야지

복수심으로 정의를 실현하면

결국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래서 운수를 원수로 갚지 마라는 거지,

원수를 내버려둬라,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내러버려둬라.

이런 게 아니란 말이오.

원한으로 하지마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