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손석희앵커브리핑(2018)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달렸다. 손기정은… 나혜석은…'

Buddhastudy 2018. 6. 5. 19:00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도쿄 발 베를린 행 열차표.

193624살 마라톤 선수인 손기정은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올림픽에 참가 했습니다.

 

일본은 대륙과 끊어진 곳이기에 청년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뒤에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2년 전.

기차로 대륙을 건너갔던 나라 잃은 젊은이는 차창 너머 풍경에서 무엇을 읽어냈을까

 

화가 나혜석 또한, 31살이 되던 1927년에 용산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샀습니다.

기차는 40km 속도로 평양을 지나 시베리아 평원을 거쳐서 유럽으로 향했지요.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던 기나긴, 그리고 기약도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범한 어머니이기를 거부했던 화가는 파리에서 더 넓은 세상과 조우하게 됩니다.

 

"남녀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나의 그림은 어떤가"

-나혜석 < 조선 여성 첫 세계일주기 >

 

아득히 먼 과거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누려왔으나 언제부턴가 꿈꾸지 않았던 과거.

적어도 그 시절 한국인의 마음속 지도는 한없이 위로 뻗어나가 있었던 것이죠.

 

서울 발 평양 행 기차표.

27000원 자유석.

어제 오후에 서울역 플랫폼 전광판에는 행선지 평양을 알리는 주황색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물론 실제로 평양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조금 특별한 행사였지요.

 

기차는 평양이 아닌 도라산 역에서 멈추어 섰지만, 기차를 탄 사람들의 마음만은 애초에 적혀있었던 종착지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남과 북의 그 만남 이후에 한반도를 둘러싼 파고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냉정한 분석가들은 한 사람의 행보를 우려하고 또 한 사람의 속내를 두려워하지만

 

돌이켜보면

역사는 결국 필연이었다는 것을 믿고 싶은 지금

 

서울 발 평양행 기차.

사람들이 어제 손에 쥔 그 평양행 열차의 종착역은 비록 평양은 아니었으나

 

1936년 베를린으로 향하던 나라 잃은 청년과

1927년 파리로 향하던 여성화가가 꿈꾸었던 미래를 우리라고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의 열차는 놀멘 놀멘(평안도 말로 '천천히, 쉬엄쉬엄') 가도 한 달은 안 걸릴 터이니 말입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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