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3.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Buddhastudy 2018. 10. 18. 21:19


부처님의 제자들을 비구라고 합니다.

비구라고 하는 말은 걸식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쉽게 말하면 거렁뱅이다. 이런 말이에요.

 

어떻게 걸식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오늘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도 당시에서는 공양을 올릴 때, 어떤 공양을 올려야 공덕이 제일 있는가?

여기에 5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그 공양의 공덕이 제일 크다. 이런 전통이 있어요.

 

1, 그해 농사에서 벼를 벨 때, 첫 번째 벤 것을 공양 올릴 때 공덕이 크다.

2. 타작을 할 때, 맨 첫 번째 타작한 것을 공양 올릴 때 공덕이 크다.

3. 타작을 한 그 곡식을 창고에 집어넣을 때, 첫 번째 집어넣은 것을 공양 올릴 때 공덕이 크다.

4. 밥을 풀 때, 첫 번째 주걱으로 뜬 것을 공양 올릴 때 공덕이 크다.

5. 밥그릇에서도 첫 번째 수저를 뜬 것을 공양 올릴 때 공덕이 크다.

 

그래서 신에게 공양을 올릴 때는 반드시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도록 해서 공양을 올려야 내가 복을 많이 받는다.

이것이 또 자기가 존경하는 위대한 분이 오셨을 때, 공양을 올릴 때는 이런 조건이 맞는 공양을 올리려고 하는 거요.

이렇지 않는 공양은 공덕이 별로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문화였어요.

 

한 바라문이 이렇게 공양 올리기를 즐기는 바라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새 밥을 퍼서 이 바라문이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마침 부처님이 그 집 앞에서 걸식을 하게 됐어. 부처님이 딱 그 집 앞에 섰단 말이오.

 

그런데 바라문이 공양 올리기를 즐기는 사람이니까, 부처님을 딱 봤으면 어떻게 할까? 기꺼운 마음으로 가서 자기 음식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거란 말이오.

그런데 이 바라문의 아내는 굉장히 아마 현실적인 사람이었나봐요.

 

부처님이 대문 밖에 서있는 걸 먼저 봤나요. ‘자기 남편이 부처님을 봤다면 틀림없이 자기 음식을 먹지도 않고 공양을 올릴 것이다.’ 그럼 자기가 밥을 새로 해야 돼. 그러니까 이 여자가 바라문이 부처님을 못 보도록 앞을 가려서 계속 서 있었던 거요.

 

그러니까 이 바라문이 부처님을 못 보니까 일단 밥을 먹었단 말이오. 먹기 전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되는데 못 봤으니까 밥을 먹었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이 금방 갈 줄 알았는데, 부처님이 안 가고 계속 대문 앞에 서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계속 가리고 있는데 안 가니까, 그래서 자기 남편이 못 듣게 부처님께 작은 소리로 빨리 가시오. 빨리 가시오.” 이렇게 했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은 못들은척 가만히 서 있었어요. 고개를 옆으로 까딱까딱 했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대스승인 부처님이 고개를 안가고 까딱까딱 하는 게 너무너무 우스워서 그냥 웃어버렸어.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가 갑자기 웃으니까 의아해 할 거 아니겠어요. 아내가 웃으면서 약간 몸이 비켜졌어. 남편이 아내 웃는 걸 쳐다보다가 부처님을 보게 된 거요.

재미있죠. 경전에 보면 이렇게 재미있는 게 많아요. 온갖 사연들이 다 있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버럭 화를 내는 거요. 나쁜 사람이라고. 석가족 출신의 저 분은 왕자출신이다. 위대한 스승이 되어 만인이 존경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문전박대를 할 수가 있느냐. 그러면서 아내를 야단을 쳤어.

 

그리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갔는데, 지금 먹던 밥이잖아. 그지? 그러니까 얼마나 미안하겠어. 이렇게 위대한 스승에게 공양을 올릴 때는 먹기 전에 공양을 올리고 자기가 먹어야 되는데, 자가기 이미 밥을 반쯤 퍼먹다가 부처님이 오셨단 말이오. 올리려니까 이 먹던 밥 밖에 없단 말이오. 그렇다고 안 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부처님께 사과를 하면서

부처님 죄송합니다. 제가 먹던 밥 밖에 드릴 수가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합니까?”

먹던 밥이라도 좋소.” 하고 받았어.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고 그래요.

 

음식의 윗부분이든, 중간 부분이든, 남은 부분이든 간에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에 의해 생명을 유지해가는 사람은

설사 주먹밥을 받았다 하더라도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처음 밥을 받았다 하더라도 또한 칭찬하지 않나니

그는 현명한 사람, 그는 성자니라.

 

뭘 말해요? 당시에 어떤 그런 문화는 처음 수확한 것, 처음 타작한 것, 처음 창고에 집어넣은 것, 솥에서 처음 푼 것, 숟가락 처음에 뜬 거, 이게 신성하고 이런 생각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처음 펐던 중간 것이든, 끝에 거든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이건 사실은 굉장한 거요. 오늘 우리들은 다 이런 의식, 있잖아. 그죠? 그것이 성스러운 거다. 여기에는 성스럽고 성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우리한테 있단 말이오. 정월 초하룻날, 매월 첫날, 우리는 어떤 그런 개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성스럽다 할 것도, 성스럽지 않다 할 것도 없다.

이게 반야심경 표현대로 하면 뭐요?

불구부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음식은 그냥 음식이지, 그 무슨 음식에 성스러운 게 있고 부정한 음식이 있느냐는 거요. 나는 이미 성스럽다 부정하다. 그런 걸 다 버린 사람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신분에도 귀하고 천하고, 부처님은 인간의 신분에 귀하고 천함이 없다.

 

천한 게 있다면 마음이 악심을 품는 게 천한 거다.

행위를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거짓말 하고 이게 천한 거지,

인간 신분에 무슨 천한 게 없다는 거요.

여자라고 천하고, 수드라라고 천하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요.

 

고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출생에 의해서 고귀한 게 아니라는 거요.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가난한 자를 돕고 위로하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

그가 청정한 사람이다.

이게 붓다의 가르침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은 그대로 연장이 되어서 밥에도 마찬 가지오.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은 왜 불교의 가르침 중에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불구부정이다. 깨끗하고 더러운 게 없다.

이런 말이 왜 그렇게 많을까? 당연한데.’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도 문화를 몰라서 그래요.

 

인도는 모든데서 정부정이 있습니다.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하고, 브라만은 성스럽고, **부정하고, 오른 손은 귀하고 왼손은 천하고, 모든 데 이런 게 있단 말이오.

나무에도 보리수는 성스럽고, 반얀트리는 악귀가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명사 중에도 독일어에도 보면 여성 명사, 남성 명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모든 사물에 정과 부정이 있어.

소는 신성하고, 돼지는 부정하고. 이런 식으로.

 

그래서 먹어야 될 거, 먹지 말아야 될 거, 손으로 만지면 되는 거, 만지면 안 되는 거, 이렇게 하면 재수 좋은 거, 저렇게 하면 재수 안 좋은 거 이런 게 다 있는 거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런 게 없다는 거 아니요.

그건 다 마음이 지은바지 사물에는 그런 것이 없다.

여자의 몸에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처녀는 성스럽고, 결혼하면 이건 성스러움이 없어졌고,

그렇지 않다는 거요.

 

이 몸은

누가 성스럽게 하려야 성스럽게 할 게 없고,

부정하게 하려야 부정할 수도 없는 거요.

그래서 불구부정이란 말이오.

 

우리 전통에도 이런 게 많지 않습니까. 그죠?

여자가 가게 첫 손님으로 오면 그날 재수가 없느니, 택시 기사들은 안경 낀 사람이 첫 손님으로 타면 재수가 없느니, 여자가 배에 타면 출항 할 때 재수가 없느니, 요즘은 이런 거 거의 없어졌어요.

 

방송 듣고 저 스님은 아직도 저렇게 말하나이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옛날에 그랬단 말이오. 그래서 왔다 가면 소금을 뿌리잖아요. 부정을 씻는다고.

그런데 이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거요.

그것이 사견, 잘못된 견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기꺼이 환영하는 거죠.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신분, 이런 것을 따지지 않게 된다.

 

그러니 밥에도 마찬 가지오. 밥을 위에 것 푸든, 중간에 것 푸든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요.

다만 우리가 성의로 먼저 떠서 드린다는 거지,

먼저 뜬 것이 어떤 성스러움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이 바라문이 들으니

, 참 너무 기찬 얘기야. 듣도 보도 못한 얘기야. 이런 얘긴 들어보면 누구라도 합당한 얘기 아닙니까.

밥은 밥일 뿐이지. 그게 처음 밥이고 두 번째 밥이라고. 거기에 뭐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요.

 

설령 자네가 먹던 밥을 준다하더라도 나는 다만 걸식을 하는 사람으로서 고맙게 생각할 뿐이지, 그것을 가지고 왜 너부터 먼저 먹고 난 나중에 주냐?” 이렇지 않다는 거요.

그러니 자기는 미안해서 먹다가 밥을 주게 되니까 너무 미안해하는데 부처님께서 이렇게 마음속에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그래서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컸단 말이오.

 

그래서 물었어. 무엇이 비구입니까? 이렇게 물었단 말이오.

비구가 뭐냐?”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할 말은 여러 종류입니다.

그런데 여자도 법문을 듣고 뉘우쳤어요. 그래서 부처님 법에 귀의를 했는데, 이 두 부부가 굉장히 영리한 사람들이오. 세속에 몸을 두고 살지마는 아주 닦은 게 많은 사람들이었어.

 

일시적으로 눈이 가려서 부인이 그렇게 부처님을 잠시 박대를 했지마는 금방 마음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공경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게

 

색에도 명에도 집착되어 있지 않는 것,

그것에 관심두지 않는 사람이 비구다.

 

색과 명, 명색이라는 겁니다.

명은 이름을 말하는 거요.

색은 물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물질과 비물질,

연필이다 하면 연필은 그렇게 생긴 모양, 무게도 나가고, 부피도 나가고, 모양도 있는 거 있죠. 요게 색이에요.

그런데 명이라는 게 뭐냐? 연필이라는 이름이 명이에요. 그 이름은 그것의 용도를 뜻하죠. 이것은 물질이 아니에요.

 

똑같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같은 막대기라도. 요것이 땔감으로 불릴 때하고, 지팡이라고 불릴 때하고, 매라고 불릴 때하고, 이렇게 그 이름에 따라서 요게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생긴 물질과 그것의 용도인 이름이 같이 결합해야 하나의 사물을 지칭하는 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것의 모양이든, 그것의 이름이든,

거기에 집착되어지지 않는 자,

이게 비구다. 이런 말이오.

 

비구라는 것은

모든 집착을 놔버린 자다. 이런 얘기에요.

 

출가 수행자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한다.

 

걸식을 할 때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요.

우리가 남의 집에 밥을 얻으러 갈 때,

이 집에는 줄까? 안 줄까?’ 많이 줄까? 적게 줄까?’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음식에 집착되어 있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비구는 걸식을 할 때, 아무런 집착이 없어야 된다.

 

그 집에 주든지, 안 주든지, 그건 그 집, 그 사람의 문제에요.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그건 그 사람의 문제요.

빨리 주든지 안 주든지 그 사람의 문제요.

 

그걸 가지고 우리가

왜 적게 주느냐? 왜 늦게 주느냐? 왜 안주느냐?”

이렇게 하면 수행자가 아니다.

 

그래서 집착되어지지 않는 자가

비구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이런 걸식을 할 때의 얘기는 부처님이 어느 날 아난존자와 마하가섭 존자가 공양하는 걸 보니까, 아난존자는 허연 쌀밥을 많이 얻어 와서 먹고 있고, 마하가섭 존자는 아주 빈약하게 먹고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걸식을 하냐고 물어봤더니 아난존자는

저는 부잣집만 찾아다닙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가난한 집에 가면 음식을 저를 줘버리면 자기 먹을 게 없어지고, 안 주면 수행자한테 공양을 못 올렸기 때문에 죄스럽고, 그를 괴롭히는 게 되기 때문에.”

 

부자는 주면서 공덕을 짓는다고 기뻐하고, 나도 공양을 얻고, 그러니까 서로 좋다. 그래서 부자만 찾아가서 공양합니다.”

 

마하가섭 존자여, 당신은 어떻게 걸식을 합니까?”

그러니까 마하가섭 존자는 가난한 사람만 찾아다니면서 걸식을 한다는 거요.

왜 그렇게 하는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서 남에게 줄 것이 없다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복 지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제가 그런 집에 가서 걸식을 함으로 해서, 그 가난한 집에 누가 밥 얻어먹으러 오겠느냐. 복 지을 기회가 없어. 그런 집에 가서 걸식을 해서 먹는 것은 박하지만, ‘라도 그런 집에 가서 걸식을 해서 그 분들에게 복을 지을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는 가난한 집만 찾아가서 걸식을 한다는 거요.

 

그때 부처님께서

다 일리가 있소. 그러나 수행자는 그렇게 걸식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가리지 말고, 집착함이 없이 보상하라.”

이것이 금강경에 나오는 차제걸이입니다.

차례로 순서대로 거르지 말고, 무심히, 그냥 가거라.

이것이 수행자가 걸식하는 방법이에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수행자다운 자세로 음식을 먹는다 그러면, 만약에 누가

제가 오늘 식사 한 끼 내겠습니다.” 따라갔단 말이오. 그럴 때,

자장면 한 그릇씩 하십시오.” 이러면 저는 짬뽕 먹으면 안 돼요?”

이렇게 하면 이것은 수행자가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가 주는 대로, 짬뽕 사주면 짬뽕 먹고, 자장면 사주면 짜장면 먹고,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 되요. 꼭 그렇게 하셔야 되요. ? 그가 그의 형편에 맞게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주는 대로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가 나한테 묻기를

드시고 싶은 것 드십시오.”

아무거나 주십시오. 주는 대로 먹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선택하는 것을 사주는 게 저의 기쁨입니다. 드시고 싶은 대로 드십시오.”

그럴 때는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 뜻을 받아들이는 거요.

그런데 끝까지

우리 스님이 주는 대로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선택을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주어진 대로 먹는 것이다.

주어지는 대로. 이렇게 걸식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두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

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착됨이 없이

그런 것이 진실로 존재치 않음을 슬퍼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진정 비구라 부른다.

 

비구라고 하는 것은 머리 깎고, 가사 걸치고, 남의 집 앞에 가서 밥만 빈다고 비구가 아니다.

라든지, 내 것이라든지, 이런 생각을 떠나버린 자라야

그를 진정 비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벗고, 저자에 살더라도

다만 이 세상이 일러서, ‘이건 네거다.’ 이렇게 이름 지어서 불릴뿐이지,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러서 이것을 너라 할 뿐이지,

사실은 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게 무아, 무소유죠.

한발 더 나아가서는 내가 옳다랄 것도 없다.

무아집.

 

이러한 경지로 나아가게 되면

여러분들이 비록 어떤 형상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비구라 불릴 만 하다. 수행자라고 불릴 만 하다.

 

그러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양과 형식을 떠나서 수행자다운 삶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금방은 안 되더라도, 그런 목표를 세우고, 한발 한발 나아가게 된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물질의 인연이 도래해서 부자가 된다면

 

나는 수행자니까 싫다가 아니라,

재물이 많이 생기면 보시하기가 좋다.

아무것도 없으면 수행하기에 좋다. 이렇게 되는 거요.

 

지위가 높아지면 포교하기 좋죠. 남을 돕기가 좋은 거요.

지위가 낮아지면 인욕하기가 좋은 거요.

 

세상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 교화하기가 좋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면 나의 얘기를 잘 받아들일 거 아니오.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비난할 때는 참는 공부를 하기가 좋죠.

 

그러니까 공부는 이런 거다.’ 하고 정해진 게 아니에요.

주어진 조건이 다 수행정진 하는 데 좋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행정 책임을 맡으라면 기꺼이 맡고,

경쟁해서 맡는 게 아니에요. 기꺼이 맡고,

때가 되어 그만 두라면 기꺼이 그만 두고

 

사람들이 칭찬해도 칭찬에 흔들리지 않고

사람들이 비난해도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런데 나부터도 그렇게 잘 안 되죠.

칭찬하면 입이 씩 벌어지고,

비난하면 인상이 팍 써지고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한은

세상에 끌려 살게 되죠.

 

이것이 현실이지마는 여기서부터

그가 칭찬해도 구애받지 않고, 들뜨지 않고,

그가 비난해도 경직되지 않는

그런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목표에요.

 

그렇게 되지 못하면 다시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면서 그렇게 나아가게 되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자유로워진다.

 

비가 오면 외출 못하고,

비 안아오면 외출하고, 이런 게 아니고

 

외출을 해야 된다면

더우면 양산 쓰고 가고, 추우면 옷 두둑히 입고 가고

비가 오면 우산 쓰고 가고,

이런 식으로 도무지 날씨에 상관없이 사는

날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그것처럼 우리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부닥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