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5. 무엇에 의지하여 사는가

Buddhastudy 2018. 10. 31. 21:17


안녕하세요. 오늘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엇에 의지해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즉 돌아가신 후에 세상 사람들은 다음 지도자가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아난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누구에게 의지하라고 말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누구도 지명해서 그에게 의지하라고 한 얘기가 없습니다.”

유언이 없었다면 상가는, 즉 상가 대중들이 모여서 누구를 지도자로 뽑았습니까?”

그러니까 아난존자가

우리는 아무도 지도자로 뽑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묻기를

그렇다면 수행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입니까? 다 흩어집니까?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으니까.”

그렇지는 않소. 부처님께서는 의지해야 할 곳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 진리에 의지하라.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또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이게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는 말이 자귀의입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자귀의.

남을 등불로 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자등명.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법귀의.

사람을 등불로 삼지 말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법등명

 

그래서 자귀의법귀의 자등명법등명.

이게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3개월 전에 또한 남기신 유언이에요.

 

이런데서 우리 불자는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에 의지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법에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에 의지하기가 더 쉽죠. 현실적으로 그렇잖아요.

 

그런데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5가지 허물이 생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 있어요.

 

1. 내가 어떤 사람을 믿고, 즉 여러분들이 스님을 믿고. 그러니까 부처님 법을 믿고 법에 귀의한 게 아니고, 스님을 믿고 스님을 귀의했어.

, 우리 스님, 훌륭하시다.” 이렇게 했을 때, 첫째 세상 사람들이 내가 믿고 따랐던 그 사람을 비난하게 되면, 내가 실망하게 된다는 거예요. 고통이 생긴다. 이게 첫째 허물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세상에 비난을 받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훌륭하다고, 한마디로 말해서 미쳐서 따라다니다가 무슨 사고가 생기면 실망을 해서 그럴 줄 몰랐다 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하고 그러잖아요.

 

우리 불교계도 이런 현상이 여럿 있죠? 대표적으로 소쩍새 마을 훌륭한 일 한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다가 또 TV에 잘못됐다고 나오니까 실망을 해서 보내던 돈도 끊어버리고 욕을 하고 이러잖아.

 

또 어떤 스님, 훌륭하다 해서 따르다가 무슨 스캔들 생기니까 또 실망을 해서 난리를 피우고. 늘 이렇단 말이오.

이게 사람을 믿었을 때 나타난 첫째 허물이에요.

 

2. 사람을 믿었을 때, 그 사람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주로 스님을 얘기합니다. 법에 귀의하지 않고 사람이라고 하는 스님 개인에게 귀의했을 때 나타나는 허물을 말하는 거요.

 

그 스님이 파계를 했다. 파계를 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승단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어떠냐? 실망을 하게 되죠.

그 스님이 그럴 수가 있느냐?”

 

3. 내가 사람을 믿고 의지했는데 그 스님이 속태를 해버렸다. 그러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는 식이 되죠? 저희들 불교학생회 어릴 때 다닐 때, 불교학생회 어린 아이들에게 수계를 준 스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 스님이 얼마 있다 속태 해버렸어. 그러니까 너의 계사가 누구냐? 그런데 그 스님은 지금 안 계시니까, 누가 물을 때마다 사람들이 말을 못하는 거요. 사람에게 의지했을 때는 이런 허물이 생기는 거요. 법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에 의지했을 때는.

 

4. 그 다음에 사람에 의지했을 때는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도량에 가지 않는다. 이런 말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해가 잘 안되실 거예요.

내가 어떤 스님을 좋아하게 되면 믿고 좋아하게 되면 그 스님을 좋아해서 그 스님이 세상에 길거리에 있으면 길거리를 헤매게 된다. , 절에 가지 않게 된다.

 

이말 좀 이해가 되요? 수행자는 도량에 가서 정진을 해야 되는데,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 따라다닌다고 절에 가지 않게 된다.

당시의 얘기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믿고 따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길거리에 있게 되면, 수행자가 도량에서 정진 안하고 그 사람이 좋기 때문에, 그 사람 따라 길거리에 있게 된다. 길거리라는 말은 세속이라는 말이오. 저자에 있게 된다. 이런 말이오.

 

5. 또 사람을 믿고 사람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죽었다. 죽는 일이 생길 때 엄청난 실망이 따르게 되는 거요. 울고불고 난리지 않습니까.

우리 스님이 영원히 살 줄 알았는데 돌아가시고 나면 부모 잃은 아이들처럼 허전해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역시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도 일부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그 법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님을 좋아하고, 부처님을 따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니까, 우리는 태양을 잃었다. 우리는 빛을 잃었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이러면서 울고불고 이렇게 했어요.

 

그랬을 때 아니롯다 존자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뭘 가르치셨느냐? 바로 법에 위지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냐?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냐?

 

부처님께서 내가 열반한 뒤에

너희들이 의지해야 할 곳은 사념처다.

 

사념처라는 것은

이 몸은 부정하다. 청량한 게 못된다. 영원한 게 못된다. 관신부정,

우리들의 느낌 기분 여기에 좋다고 하지만 이게 고의 원인이다. 관수시고,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늘 일어나고 사라지고 요리 변하고 조리 변하는 무상한 것이다. 관심무상.

그리고 관법무아.

4가지를 사념처라고 그러죠.

수행자는 이 사념처를 관해서 해탈지도로 나아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걸 놓쳐버리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상에 집착을 해서 그렇게 울고불고하니까, 아니룻다존자가 대중들에게 다시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 앉아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음을 코끝에 집중을 시켜서 먼저 수식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 다음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도록 해서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단 말이오.

 

이렇게 사념처관, 비파사나를 행해서 그 대중이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도 조용하게 마음에 흔들림 없이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흥분되거나 함이 없이 평상시처럼 법에 의지하면서 부처님의 마지막 장례식을 고요하게 치러냈단 말이오.

 

법에 의지하라.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살다보면 이렇게 잘 안되죠. 그래서 우리는 절을 원망하고 스님을 원망하고,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의지하면 법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에 의지하게 되면 첫째는 절에도 잘 안가게 되고, 수행대중을 공경 안 하게 되고, 법문도 잘 안듣게 되고, 선행도 안 하게 된다는 거요. 실망해버리기 때문에.

 

자기가 사람을 믿고 따르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리거나 그 사람이 파계를 해버리거나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거나 하면 낙망이 되고 절망이 되어버려 절에 가는 것도 싫고, 스님에 대한 존경심도 없어져버리고, 법문도 듣기 싫고, 좋은 일도 하기 싫어져버린다. 이것이 사람에게 의지했을 때 나타나는 허물이다.

 

그래서 법을 믿을지언정 사람은 믿지 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수행정진하게 되면,

모든 불자는 다 하나가 됩니다. 일불제자가 되죠.

그런데 사람에 의지하게 되고 사람을 자꾸 따르게 되면

결국은 사람은 다 개성이 다르고 그러죠.

그러다보니까 자꾸 분파가 형성되게 되죠.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종파나 분파나 이런데 너무 휘둘리지 말고,

오직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어떻게 바르게 정진할 거냐.

이런 관점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이 우리들의 육신이나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 하는 것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즉, 쿠시나라 사라수 아래에서 가사를 4겹으로 접어서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우시면서

아난다여, 여래는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리라.”

 

이렇게 마지막 열반을 선언하는 그날, 그 사라수 숲은 때가 아닌데도 다 꽃이 피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노래에는 사라수가 학처럼 희어지고,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하얀 꽃이 피어났다는 거요. 그리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묘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거요.

 

사람들이 너무너무 놀라서 왜 이런 귀한 현상이 있는가 하는 그럴 때, 부처님께 물었어요.

부처님 이 무슨 일이입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가 열반 한다고 하니까.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거라는 거요.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어.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법에 의지해서 수행 정진하는 것이 바로 최고의 복을 비는 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법에 귀의해서 수행하기보다는

, 그러려면 첫째, 법을 이해하고, 법을 믿고, 거기에 따라 실천하고, 그래서 스스로 체험해 가는 이런 수행을 하는 게 아니고,

이건 다 버려버리고, 그저 무슨 짓이든지 해서 복을 받으려고 한단 말이오.

돼지 목을 따서 복을 받는다하면 돼지 목도 따고, 자라를 놔줘서 복을 받는다면 자라도 놔주고, 등에 글씨 써서 놔주면 복이 더 크다하면 놔주고, 뭐든지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이야.

이건 법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는 거요. 법을 따라 정진하는 게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법에 대한 법을 만난 기쁨을 갖지 못하고 있다.

법은 이해되어야 합니다.

법은 그냥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법은 이치이기 때문에, 그 이치가 이해되어야 하는 거요.

 

그래서 이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정진하면 부처님께서 뭐라고 비유를 들었느냐?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뱀을 잡을 때 꼬리를 잡거나 몸통을 잡는 거 하고 같다는 거요. 그러면 뱀이 머리를 돌려서 물어버리지 않습니까.

뱀을 잡으려면 어떻게 잡으면 된다? 머리를 딱 잡아야 돼. 목을 딱 잡아야 돼. 아무리 큰 뱀도 거기를 잡으면 꼼짝을 못하는 거요.

 

그것처럼 수행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게 법이고,

그 법이라는 것은 어떤 올바른 이치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마치 뱀의 머리를 잡는 거와 같은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법문을 듣고

그 법문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면 믿음이 저절로 옵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믿으라니까, “믿어야지. 믿어야지,” 이래도 안 믿어지죠.

자꾸 믿어라 믿어라하는 건 믿어진다는 말이오? 안 믿어진다는 말이오? 안 믿어진다는 말이오.

 

이해가 되어버리면

믿으려고 애쓸 것도 없어져요.

저절로 믿어져.

 

그래서 불교는 신해를 중요시합니다.

믿음과 이해, 그런데,

 

그런데 보통 종교는 믿음만 강조하고 이해는 필요가 없다 그래요. 왜 그런데요? 하고 물어보면 불신자 취급을 당합니다.

그렇게 자꾸 안 믿고 자꾸 의심이나 하고 그러면 벌 받아.” 그래서 못 물어보는 거요.

 

물을 때, 2가지가 있습니다.

불신, 상대를 못 믿어서, 남편이 늦게 들어왔는데

딴 여자 만났어? 안 만났어?” 저게 아무래도 만난 것 같은데. 이래서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거, 이것은 불신이에요. 이것은 불신이에요.

 

그러나 몰라서 물어보는 거, 알려고 물어보는 거, 궁금한 거 하고 다르다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의심이라 그래요. 의심이란 말도 상대를 못 믿어서 하는 의심이 있고, 의문이라고 하면 좋겠죠. 의문. 그래서 선에서의 화두라는 것은 의문이란 말이오. 의문. 큰 의문.

 

사과가 밑으로 떨어질 때, 뉴턴이

사과란 왜 밑으로 떨어질까? 위로나 옆으로는 안갈까? 왜 밑으로 떨어질까?” 이것은 의문이죠. 의문.

이게 화두에요. 큰 의문. 이게 이것이 무엇인가? 이 뭐꼬. 하는 시삼마. 하는 큰 의문이란 말이오. 나라고 하는 이것이 정말 누구인가? 이 큰 의문이란 말이오. 이거하고 못 믿는 의심하고는 다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르면 물어라. 부처님께서는 항상 물어라고 하잖아요. 열반하시는 마지막 그 숨넘어가는 순간에도 물어라. 안 물으니까,

마치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물어라.

내가 열반한 뒤에 그대 부처님께 물어봐야 되는데, 그걸 내가 안 물어봤구나.’

이렇게 후회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털끝만큼도 의심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지금 묻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

이렇게 3번이나 물을게 없다는데도 부처님에 3번이나 물어라 그런 거요.

 

요즘 학교 선생님도 아이들이 질문하면 빨리 나가버려요. 불교는 질문을 잘 받아야 됩니다. 의심 있는 거 다 물어서 의심이 사라져야, 그 다음에 믿음이 굳건해지고 실천의 힘이 나온다. 그래서 이 믿음과 이해가 상충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런데 여러분들 보고 분별심을 내지 마라. 하는 거, 이거 무슨 말이에요?

이것은 질문이 아니고, 그냥 불신의 마음입니다. 아시겠어요?

어떤 결정된 답을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부처님께

강가강에서 목욕한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그럴 때 부처님이

아니야. 없어지지 않아.”

 

그럼 여러분들은 탁 믿어집니까? 의심이 생겨 딴 사람한테 가서 또 물어봐.

없어집니까?” “아니야. 안 없어져.”또 딴 사람한테 물어봐. 그 사람이 없어져.” 그러면

누구 말이 맞나?’ 이건 더 헷갈리는 거요. 이런 게 분별심이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즉, 강가강에 가서 목욕한다고 모든 죄가 다 없어진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나겠구나.”

 

그 모순을 탁 깨우쳐버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부처님, 그 말은 없어진다는 얘기요? 안 없어진다는 얘기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 없잖아. 탁 알아버렸단 말이오.

 

거기는 바로 믿음이 있는 거요.

온전한 이해 안에 믿음이 함께 딱 들어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단순히 믿어라.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거요.

 

그리고 이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온갖 분별심을 내어서 질문을 하면 옛날에 선사들은 어땠습니까? 고함을 한번 콱 지르던지, 머리통을 한 대 탁 때렸죠. 그거는 바보같다고 때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한 생각을 놓아버려라. 그런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가 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굉장히 필요하고,

그 이해를 하게 되면 저절로 믿어지게 되고,

그 믿게 되면 실천이 나오게 되고,

실천을 해보면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체험이 생기는 거요.

그러면 자기의 고뇌가 이렇게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천하 누가 뭐라고 그래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거요.

 

그래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간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이 세상을 굴리는 존재가 되어라.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존재에요.

시류에 그냥 휩쓸려 가는 존재다.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서

바로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그런 우뚝 선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붓다라고 하는 거요.

그런 좀 당당함을 가지고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