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4.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진실하게 살아간다

Buddhastudy 2018. 10. 25. 20:29


안녕하세요. 오늘은 계율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계율은 어떻게 해서 제정이 되었는가? 처음부터 이것이 진리다. 수행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먼저 정해져 있었는가? 아닙니다.

 

계율은 부처님을 따르던 수행자들이 살아가면서 생겨난 여러 문제들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 수행자가 그러면 안 된다.” 이렇게 하나하나 지적이 되면서 점차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교화의 10년이 될 때까지는 계율에 대한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건 뭘 말하냐 하면 초기 출가수행자들은 마땅히 계율을 지켰다.

, 아무도 수행자로서 어긋난다고 할 만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요.

 

그런데 왜 후대에 가게 되면서 이런 계율이 생겨나게 되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제자 중에 수행자로서 행하지 말아야 할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얘기죠.

 

그것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확연히 깨치고 출가를 해서 정진을 했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부처님의 명성과 또 비구승단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마음의 큰 깨침 없이 좀 세상의 유행 따라 출가하듯이 이렇게 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행자로서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행자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나무라면서 계율이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후에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단다.” 이렇게 해서 하나씩 하나씩 형성되게 된 거죠.

그 가운데 첫 번째 계율이 생겨난 것은 수행자로서의 음행에 관계되는 겁니다.

 

 

어느 해에 가뭄이 아주 심해서 흉년이 들었어요. 그래서 승려들이 한 군데에 모여 살면서 안거를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걸식을 하기가 너무 어려워지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구들이여, 인연 있는 곳을 따라가서 안거를 보내도록 해라.”

이렇게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각자 다 자기 고향이나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주변에서 안거를 보내게 됐습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어요. 왜냐하면 출가하기 전에 집이 부유했고, 마땅히 집으로 가면 충분히 공양을 얻을 수가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가게 된 거요.

그런데 이 비구는 출가하기 전에 결혼생활을 하다가 출가한 사람이었나 봐요. 집에 돌아갔더니 부모가 보고 매우 기뻐했고, 아내도 기뻐했어요. ‘드시어 수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하고.

 

그러나 비구는 자기가 수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 게 아니고, 바로 안거 한 철을 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부모가 실망을 하고는 수행을 그만둘 것을 계속 요구를 했습니다.

 

그래도 이 비구가 굽히지 않으니까, 그 부모가 제한한 것이

그렇다면 집안의 재물을 상속시키려면 손자가 있어야 된다. 그러니 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려면 자식이라도 놔두고 가거라.”

이렇게 해서 그 비구는 자기도 수행생활 할 수 있고, 부모도 만족시킬 수 있고, 이렇게 생각해서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 거요.

 

그렇게 해서 부인에게 애기가 있게 되자, 그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했다 생각하고 안거가 끝나자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이 계시는 정사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수행생활을 하는데,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거요. 늘 마음이 들뜨고, 초조하고, 집중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그런 들뜬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 불러서

비구여, 어떻게 수행하는가?” 물으니까

, 제가 요즘 마음이 들떠서 공부가 잘 안됩니다.”

왜 그런가? 지난번에 안거를 어디서 보냈던가?”

, 집에 가서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집에 가서 있었던 일을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부처님께서 가만히 들으시다가

비구여,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감이 좋도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는 음행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지시를 함으로 해서 불음계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 출가수행자는 남녀 간의 관계는 일절 금지인가?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비구니가 정진 중에 평소에 그를 좋아하던 남자가 그를 덮쳐서 성폭행을 하게 된 거요. 그 비구니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대중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중들이 그 얘기를 듣고는

 

그 비구니는 파계를 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음행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음행을 하게 되었다. 비록 본인은 아니지마는 자기의 의사와 반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계율을 범한 것이다. 이렇게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된 거 아니냐.’

이런 문제 제기도 있었고,

 

그는 원래 정진이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구니가운데서 신통이 제일이다. 이렇게 알려진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가 정말로 거부를 했다면 그는 신통력이 있기 때문에 능히 거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거부를 안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이런 문제 제기도 받게 되고.

 

또 한편에서는 아직 그는 젊은데, 어떻게 남녀관계가 있었는데, 쾌락이 없었겠느냐. 만약에 그가 나무덩굴처럼 아무런 쾌락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쾌락이 있었다면 그것은 계율을 범한 것이다.’

 

뭐 이런 문제로 특히 비구들 사이에서 이 얘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 됐다.

그러니까 이 비구니 스님은 자신의 문제를 갖고 사람들이 계속 논쟁을 하게 되니까,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이것은 계율을 파한 것입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어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구니 스님이

다만 아픔이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했더니, 부처님께서

그 비구니는 계를 파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남녀의 만남이 있었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굉장히 효도도 하고,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서 자신이 선택을 잘 했다고 했는데도 부처님께서 계율을 어겼다고 말씀을 하시고,

후자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계율을 어겼다고 제기를 했는데도 부처님께서 계율을 파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데서 보면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할 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면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규칙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원칙과 규칙이 없다면 어떤 새로운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이나 규칙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는 그 원칙이나 규칙들이 다시 사람들을 가두게 되죠. 이런데서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원칙이 사람을 속박하는가?’ 이런 문제에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계율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반응이 있죠.

계를 받으면 내가 자유가 없지 않는가? 여러 가지 제약을 받지 않는가? 속박을 받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율이라는 것은 우리가 괴로움이 없는, 고통의 원인을 짓지 않는 쪽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헤치게 되면 작을 행위를 하고도 큰 재앙이 따릅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헤치게 될 때는

 

첫째 단명을 과보를 받게 된다.

둘째는 병고의 과보를 받게 된다.

셋째는 좋은 일을 하고도 늘 비난을 받는 그런 과보를 받게 된다.

 

왜 이런 과보를 받게 됐는가?

누가 내 가족을 죽였다고 해봅시다. 그럼 우리는 당연히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첫째 그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 만약에 그를 죽인다면 그의 입장에서 갑자기 비명횡사를 하게 되죠. 단명하게 된다.

2. 그런데 그를 죽이지 못하고 병신을 만들었다. 그럴 때는 죽지는 않았지만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되겠죠. 그러니까 늘 몸이 아프고 비실비실하게 고통 속에 살아야 된다.

3. 세 번째 그를 그렇게 보복할 수 없다면 그는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할 거 아닙니까. 만약에 그 사람이 나에게 돈을 좀 줘서 무마를 하게 되면 잠시 뿐이고, 또 비난을 하게 된다. 이런 얘기죠.

 

그러기 때문에 이 원인을 알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굉장히 억울한 인생이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평생 아픈 몸을 끌고 살아가야 될 과보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하고도 늘 비난 받는 이런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나쁜 인연은 조그마하게 하고 그 받아야 할 과보는 너무 크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거요. 누가 현명한 사람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느냐.

 

이 계율은

속박이 아니라

참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큰 재앙이 올 작은 원인을 짓지 않으므로 해서

미연에 그 모든 재앙을 방지하는 길이다.

 

그래서 우리 옛날 말에 욕 얻어먹으면 오래 산다. 이런 말이 있죠?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이런 인연과보에서 나온 말입니다.

 

세상 사람으로 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할 일에 비난을 받고 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비난을 받는 것은

사실은 큰 고통이 아니고 굉장히 가벼운 갚음이라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살생한 인연의 과보가 있는 줄을 알면

이러한 비난에 억울해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비난은 명을 연장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유 없는 욕을 얻어먹게 되면 오래 살려고 그러나보다

이런 말이 생겨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속박하는 게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다.

 

 

또 우리가 방생을 하게 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면 큰 공덕이 따른다.

누군가가 내가 죽어갈 때 나를 살려주면

나는 그 생명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전생에 동안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할 거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작은 공덕을 짓고,

즉 작은 인연을 짓고 큰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 일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서 어리석은 자는 나쁜 과보를 불러오는 그런 작은 인연을 지으며

현명한 사람은 좋은 과보를 불러오는 그런 작은 인연을 기꺼이 짓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살생하지 않으며 방생을 한다. 이런 얘기요.

 

이럴 때 이 계율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속박으로 느끼고, 그걸 불편해 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이 계율을 어기게 될 때는

바로 깊이 참회해야 된다.

 

금방 알아차리고

! 내가 또 과거의 업식에 끌려서 습관대로 살았구나.”

그리고 바로 되돌이켜야 한다.

 

 

그런데 이 비구스님은

마음속에 자신의 그러한 욕구를 따라가는 과거에 행해온 습관의 길에 서 있었어요. 그것이 다만 그 깊은 자기 내면을 보지 못하고, 부모의 청을 들어준다라고 하는 그런 자기 속임,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거요.

그런 속에서 행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계율을 파했다고 말했고,

그런 입장이라면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서 세속생활을 하면서 복을 짓는 행위가 오히려 더 낫다. 이렇게 했던 거고,

 

이 비구니 스님의 경우는

어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과거의 어떤 습관으로 인해서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라는 거요. 그것은 길을 가다가 위에서 돌멩이가 떨어져서 머리를 맞는 것처럼 자신이 알든 모르든 어떤 까르마 하고는 관계가 없는 우연한 사건이다. 이런 얘기죠.

 

거기에 이 비구니는 그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거기에 조금도 마음이 뺏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담담하게 사람들에게 사실 그대로 드러내놨고, 사람들이 그 문제를 갖고 왈가불가할 때도 괴로워하지 않고 그것을 부처님께 가서 여쭈어서 그 판결을 받으려고 하는, 이런 데서는 마음의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는 거죠.

 

혹시 자신이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혼자 숲속에서 공부한 게 잘못된 건가. 아니면 이런 불행한 사건을 당했을 때도 아무튼 그런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음행에 해당되는가? 그건 부처님 처분에 맡기겠다.

이렇게 아무런 숨김없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던 거죠.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는 비록 여자이지만 이미 수행이 깊기 때문에 능히 홀로 숲에서 정진해도 좋다. 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는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마치 뺨을 한 대 맞듯이 그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고, 그에 따른 육체적인 아픔만 있었다. 그 외에 그의 마음에 어떤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계율을 어겼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데서 우리는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해진 문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고,

,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보시를 행하고,

그 몸을 청정히 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

이게 마땅히 행할 바에요.

 

또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은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으며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

이것이 계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계율이 무엇인지 다 일일이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진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약간 미혹이 있다 보면

알게 모르게 계율을 범하게 된다.

 

그때 부처님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나는 안 범한 것 같은데 부처님께서

그것은 수행자로서 어긋난 행동이니라. 그것은 수행자로서 합당하니라.

이런 지적이 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계율을 어겼다 할 때는 참회를 했고,

또 사람들이 계율을 어겼다 하더라도 본인이 견주어 보고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는

부처님께 가서 또 검증을 받고,

이런 과정이 부처님 당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불자들도 출가한 스님뿐만 아니라 세간에 산다 하더라도

해탈의 길로 가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인 이 계율을 청정히 지키려고 하는 그런 마음 자세가 필요하고,

또 어리석어서 순간순간 계율을 어겼을 때는 진실하게 참회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이런 실수들을 반복해 가면서 우리도 언젠가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그런 수행자로 한발 한발 다가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