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사담 2화 - 광화문과 세종로 그리고 충무공 동상

Buddhastudy 2019. 4. 25. 20:25


정책과 역사가 함께하는 시간 전우용의 사담

오늘은 지난 121일 서울시에 발표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설계안과 관련해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17개국 49개 팀을 물리치고 당당히 발표된 당선작은

'깊은 표면(Deep Sutface) 과거와 미래를 깨우다.'

 

설계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셨던 서울시립대학교 김영민 교수를 모시고

설계에 담긴 깊은 의미에 대해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광화문광장 국제설계 공모전 당선작을 만드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경복궁 앞의 거리를 조성한 사람을 정도전이라고 하잖아요.

정도전의 광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에 못지않은 이름을 앞으로 광화문광장에 남기실 텐데 일단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당선작 제목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요.

 

사실은 거기에서 나온 의미가 깊은 서울이라는 것이 역사책 그리고 사극 생각하면 큰 어떤 정치적인 이슈들 큰 사건들 갖고 하는데,

정말 소소한 이야기부터 큰 이야기까지 그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랑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들을 계속 이야기를 해줘서

이런 측면에서 깊구나. 여러 측면에서 서울이 깊구나.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도 깊이를 해석하는데 그러한 포인트를 갖고 왔죠.

 

사실은 깊이와 표면이라고 하는 것이 정반대괴는 개념이잖아요.

그런데 광화문광장 자체가 그런 반대되는 것, 상반되는 것을 조화시켜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는 공간이지 않습니까.

그동안 (공모전과 관련해) 여러 가지 절차가 있었는데 채점하는 팀은 만장일치로 1등 상을 깊은 표면(Deep Sutface)’ 팀에게 주었던 거죠.

정말 대단합니다.

 

<광장과 대로의 공존>

첫 번째는 이런 거였습니다.

사실은 유럽역사를 보면 트라팔가 광장이라든가, 바스티유 광장이라든가 고대 로마에서는 광장을 포럼이라고 했고, 그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신전, 행정청, 정청 그리고 법원,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면서 하나의 공적 공간으로 만들어졌었거든요.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우리 고구려 때나 발해, 또는 당나라 제도에서 나타나듯이 궁성 앞에서 길게 뻗은 도로를 주작대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유럽도시에서는 광장이 중심이고 아시아 도시에서는 동아시아 도시에서는 대로가 중심이에요.

그런데 아시아적 대로와 유럽적 광장, 우리가 광장이란 개념을 도입을 하면서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죠.

아까 깊은 표면(Deep Sutface) 이라고 하는 제목이 배치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었어요.

 

사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가 좀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주제이고, 고민이긴 했어요.

제가 한 3년 전에 또 다른 광장을 설계한 게 있거든요.

세종시의 도시상징광장인데, 재미있게도 되게 비슷해요. 길쭉하게 생겼어요, 광화문광장이랑 흡사하게 생겼고,

그런데 유형을 보면 서양의 광장은 길쭉한 광장이 많이 없어요.

 

그렇죠 스퀘어죠. 보통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 광장을 완전히 새로 만드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똑같이 광화문광장이 도로처럼 양쪽에 도로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 느꼈던 것은 우리 아직 광장이 낯설구나.

결국에는 이동성이 계속 중심이 되고, 우리나라의 광장이 황토현 광장이라던가 이러한 광장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원래는 교통광장이었더라고요.

 

일본에 의해서 들어온 개념인데 일본, 동아시아 전체가 광장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동 중심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움직이는 대로의 성격과 머물러야 하는 광장의 성격에서

서양의 광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왜 머무느냐?’ 하면 공간 구조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건물과 붙어있어요.

 

사실은 광장 자체를 완전히 머묾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일단 대로로 만들어진 광장이었고 그것이 600년의 역사가 있고

근대화로 넘어가면서도 그것은 어떤 어마어마한 관성이 붙어있다고 보고

갑자기 머물자고 할 때는 잘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일단은 움직이는 흐름 자체는 받아줬어요.

지하를 머묾의 공간으로 만들고

위는 주로 이동의 공간, 비어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비어있는 광장 사이에 다른 팀과 다르게 나무들을 아기자기하게 심었어요.

그것이 움직이면서 머물게 할 수 있는 공간이죠.

 

그래서 사실은 아마 주변 건물에 아기자기한 카페라든가 이러한 것들이 많으면 오히려 머물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데, 정말 큰 건물들이잖아요.

세종문화회관, 그리고 정부종합청사, 이러한 건물들이라서

오히려 층을 2개로 만들고, 밑에는 거의 머묾의 공간, 위에는 이동과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면

수직적인 어떤 기운이 나면서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공간으로 서양 것도 아니고 동양 것도 아닌데

오히려 새로운 한국적인 광장과 대로의 묘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유교와 민주주의의 이념 대한민국의 상징>

에펠탑을 보면 파리가 연상이 되고, 자유여신상을 보면 뉴욕이 연상이 되고

빅벤을 보면 런던이 연상 되고, 콜로세움을 보면 로마가 연상이 되고

그럼 한국과 서울이라고 하는 공간은 뭘 보고 연상을 할 것인가

이제까지는 남대문이 그런 역할을 한다든가 그래왔었어요.

그런데 이 광화문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2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군주가 주권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의 상징공간을 일반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상징공간으로 바꿔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역사성을 살려야 하니까.

유교적 정치이념과 민주공화국의 정치이념이라고 하는 것이 서로 상충되는 데

이 상충 되는 가치를 한 공간에 어떻게 하나를 죽이지 않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느냐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왕조국가의 어떤 것은 민주주의와 상충이 되고 이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옛날 관아라든가 궁이라든가 이런 것을 그린 그림들을 봤어요.

숙천제아도라든가 동궐도도 보고 경기감영도도 봤는데, 재미있게도 저희는 나무가 그렇게 큰 역할을 안 할 것이라고 봤는데, 건물은 정형적이거든요.

건물은 전형적인데 항상 자연에서 뒤에 있는 산에서 나오는 흐름이 있고

재미있게도 나무를 그리는 방식이 달라요.

나무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묘사가 돼 있어요.

서양에서 저희가 보는 풍경화는 이것이 하나의 덩어리거든요, 하나의 흐름.

민주주의로 왔을 때, 개인의 의견이나 가치가 살아있는 것이죠.

하나로 뭉뚱그려서 이것은 3열의 플라타너스 식재,

 

어떤 파, 어떤 집단이 아니라 개개인을 중시했다는 것이죠?

 

그렇죠. 그래서 보시면 나무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또 재미 있는 것은

하나의 정현적인 나무가 아니라 배치도 일부러 간격을 다르게 했어요.

왜냐하면 나무가 달라지면 나무의 크기라던가 주종에 따라서 달라져야 되고

그러면 작은 공간, 큰 공간 중간 공간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어떤 일상의 행위가 일어날 거라고 봤고

사실 북측을 보면 경복궁과 백악과 옛날 왕조의 어떤...

 

시각 정점이 하늘에서 산에서 왕궁으로 내려오는 체계가 보이죠.

 

그렇죠. 그게 보이고, 오히려 그 반대로 보면 이것이 혼재되어 있지만, 다양성을 보여주고, 과거와 오늘의 시선에서 바뀜과 같은 것이 있었다고 봐요.

왕만이 볼 수 있었던 시점과 그 백성들이 볼 수 있었던 시점이 서로 뒤바뀌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하는 것이죠.

 

구조적으로는 북측은 역사 광장, 옛날 어떤 유교 이상을 상징하던 광장이 돼 있었고

남측은 시민에게 돌려주는 광장이 돼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로 묶느냐로 봤을 때, 백악에서 나오는 자연을 최대한 도시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자연이라는 것은 위계가 없고, 정치적 권위에서 벗어나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유재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이러한 것들을 큰 공간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주면, 까다로운 2개의 이윤적 상징들을 같이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던 거죠.

 

산과 연결된 경관 속에서 유교국가의 이념과 민주공화국의 이념이 같이 녹아들 수 있도록, 자연에 같이 얹힐 수 있도록 이렇게 설계하셨다는 거죠.

 

<광장과 뒷골목의 공생>

우리가 조선시대를 연상을 해보죠. 그 앞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경복궁이 있을 때, 관리들이 출퇴근을 했을 거 아니에요? 궁궐로요.

출퇴근을 하면 문관은 가마를 타고 무관은 말을 타요. 거의 앞까지,

어디까지냐 하면 지금 세종문화관 있는 자리에 사헌부라고 하는 관청이 있었고요,

그 사헌부를 기준으로 해서 도로 양측에 해태상이 있었잖아요.

 

그 해태상이 하마비 역할을 했거든요.

(*하마비: 조선시대 종묘 궐문 앞에 세워놓은 석비 하마비에는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하마비 역할을 해서 그곳에서 문관은 가마에서 내려야 해요. 무관은 말에서 내려야 해요.

한 사람당 평균 56명이 붙어요.

관리가 100명이면 600, 700명 정도의 가마꾼들이 있어요.

어떻게 했겠어요?

문관이 등청을 하면 퇴청할 때까지 사람들이 어디선가 기다려야 해요.

도로에 쭉 서서 기다리진 않잖아요.

골목골목에 들어가서 가마를 내려놓고, 대기하면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할 거 아니에요?

심심하니까.

우리 대감마님은 어떤 분이다.’ ‘너희 대감마님은 어떤 분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요.

영의정이 되실 것이다이런 이야기도 했을 것이고요.

누구는 인품이 나쁘다 좋다.’ 이러한 이야기도 했을 것이고요, 요즘도 써요, 그런 말을요.

 

개각 무렵이 되면 하마평이라고 하죠. 하마비 주변에서 인품에 대해서 사람의 관직, 승진 가능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하마평이라고 해요.

전체적으로 이른바 관청 거리로서의 광화문 거리, 이것이 가지고 있었던 골목 네트워크가 있었어요.

 

특징이랄까요? 역사성이라고 할까요?

이건 권역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이고, 나아가서는 이 권역이 옛날 한양도성, 혹은 서울 도심부 전체에서 갖는 특별한 위상과 의미가 있었거든요.

당장 그 공간만이 아니라 주변의 골목이라든가, 그 바깥의 서울 공간 전체와 관련된 관련성, 이걸 인식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려내라. 이게 세 번째 질문이었거든요.

어떻게 보셨습니까?

 

해태상에서 가마라든가 말에서 내려야 하잖아요.

서울시도 대중교통을 강화하고 앞으로 자율주행차도 나오게 되고 공유경제도 활성화되면

사실 차를 지금처럼 많이 타고 이동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면 일상성이 이제 중요해지는데, 사실 일상의 생활이 중요해지려면 거기에 소소한 일상을 담아낸 카페들, 가게들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거든요.

 

또 버스를 타기 전에 잠시 머물다가 갈 수 있는 야외 공간들, 이런 것들도 필요한데, 너무 다 큰 거죠. 큰 공간, 큰 건물들,

그래서 저희는 사람들과 일상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사이에 많이 놓으려 했어요.

 

그리고 상상을 해보시면 주민들도 있지 않습니까.

주민들이 이곳이 국가상징이 되고, 뭔가 큰 이야기만 하면 주민들에겐 와 닿지 않아요.

그런데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매력적인 어떤 공간들이 있거든요.

이것들이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광화문광장을 떠올리면 (공간이나 건물 등) 큰 것들만 생각하는데

작은 공간들, 일상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여러 공간들이 있고, 지금 설계를 통해서 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주고 싶었던 것이죠.

 

<광화문광장 그리고 상징>

이번 광화문광장을 둘러싼 여러 논란 중에 하나가 충무공 동상을 옮기고, 심지어 북한의 주체사상을 만든다는 헛소문도 돌았고요, 바닥의 그림까지 봐가면서 이것이 촛불을 생성한 것이다.

그래서 촛불의 이미지로 광화문광장을 덮으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장이 인터넷 사이트나 뉴스댓글이나 SNS에서 굉장히 많이 돌아다녔거든요.

이것에 대해 해명 좀 해주세요.

 

원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어떤 저희가 특별한 정치적인,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 주작대로부터 만들어진 축이 동상들이 점유하고 있진 않았어요.

그래서 원형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옮겨 놓고, 세종대왕 동상도 옮겨 놓고 원래 축을 보면서 열린공간, 원형 공간을 생각해보고 거기에서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를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보자 했었고요,

 

촛불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요, 사실 저희가 형태적으로 (오해를 산)패턴을 만든 계기는 엄밀히 말하면 종묘의 전돌 도장과 김환기 화백의 점묘화, 네모 안에 여러 점을 찍은 회화였어요.

실질적으로 특정한 사건의 의미를 담았기보다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보면 각각의 점들이 서로 개성을 살리면서 한걸음 떨어져서 봤을 때 하나의 형상을 만들거든요.

 

그런데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는 것이죠.

보편적인 민주주의 가치를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민주주의 회화적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오해는 저희가 바닥에 조명을 넣었거든요.

그런데 야간 모습을 보면 바닥에 조명에 점들이 들어오니까, 그것을 (촛불로) 연상하는 분들이 있으셨나 봐요.

 

그렇죠? 예술작품에서 모티브를 딴 민주주의 상징성이다. 이렇게 이해하셨을 거라고 보고요.

바쁘신 중에도 다시 한 번 광화문광장의 설계 공모 지침에 당선되신 것 축하드리고요,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또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우용의 사담, 오늘은 이 말씀으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광장이란여론이 형성되는 공공의 공간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유럽의 도시의 자치성, 공공성, 민주주의는

모두 광장으로 형성이 됐습니다.

한국의 현대 민주주의도 광장에서 탄생하고 성장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