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픽 2화 - 광화문과 세종로 그리고 충무공 동상

Buddhastudy 2019. 4. 26. 20:22


사담속 코너 전우용의 픽입니다.

요즘 광화문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光化광화, 세상을 빛나게 한다는 뜻이죠.

세상에 빛과 같은 존재인 왕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춘다.

그런 이름을 가진 문이었습니다.

 

그 앞 광장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가 논란거리인데

오늘은 광화문과 세종로, 그리고 그 앞에 논란거리가 되는 충무공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광화문과 세종로 그리고 충무공 동상>

다들 아시다시피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이자 생활윤리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이른바 국가이념인 유교를 도시 조형에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그게 바로 서울의 원형이었습니다.

 

유교의 도시 조형 원칙은

주례고공기라는 책에 설명돼 있습니다.(주례 고공기: 중국 주시대의 사회조직과 정치제도에 대한 기술과 해설을 담고 있는 유학의 경전)

 

궁궐을 중심으로 해서

궁궐 앞으로 조정으로 하고

궁궐의 뒤에 시장을 놓는다.

그걸 전조후시라고 했고요,

 

궁궐의 왼쪽, 그러니까 동쪽에 종묘를 두고

서쪽, 오른쪽에 사직을 둔다.

이걸 좌묘우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궁궐 앞길은

천자일 경우에 수례 9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넓이, 구궤

제후국일 경우에 7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넓이, 칠궤

이런 원칙을 정했죠.

 

그래서 광화문 앞을 보면 이 나라가 유교 국가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조선 초기에 경복궁과 광화문 앞거리를 조성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직후에 바로 훼손하려고 했던 것이

유교국가로서의 정통성과 권위였습니다.

 

1915년에는 경복궁 내부의 전각들을 대부분 허물고 거기에 임시 건물을 지어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행사를 열었고요,

뒤이어서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를 이전하려는 공사에 착수해서

1926년에 바로 광화문 안쪽에다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어 놓습니다.

 

많이 헐려 나간 경복궁의 전각들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건물로 우뚝 선 조선총독부

이걸 통해서 일본은 무얼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일본이 문명의 표상이고, 과거 조선은 낡은, 아시아적 후진성의 표상이다.

선진과 후진, 문명과 야만 그리고 진보와 퇴보

이걸 대비시킴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 거리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식민지의 상징가로였습니다.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으로 헐려고 했다가 일본인 자신도, 일본인 중에도 그걸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헐어버리지 않고, 옮겨서 경복궁 동쪽에 옮겼죠.

광화문은 이 거리에서 사라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이 거리에 광화문통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총독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광화문통이라는 말은

전각, 관각 이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일본인들이 도시 이름은 경성부라고 바꾸었고요

거리 이름도 일본인들 마음대로

어디는 혼마치, 어디는 코카네쵸, 다케조에 마치, 하세가와 마치 하는 식으로

자기들의 역사, 자기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붙여놓은 이름을 되돌려야 하겠다 라는 여론이 일어서

1946년 해방 이듬해에 서울시에서 가로명제정위원회라는 것을 만듭니다.

국가를 상징할 수 있는, 또는 서울의 가장 중심적인 간선도로들에는

우리 역사상의 위인들 이름을 따야겠다고 의견이 모여서 그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일본인의 중심지, 혼마치라고 불렀어요.

한국식 발음으로 하면 본정이죠.

일본의 근본이 되는 땅이다, 또는 일본의 땅이다해서 본정, 일본어 발음으로 혼마치라고 했던 곳에는

우리 역사상 일본과 싸워 가장 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충무공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게 지금의 충무로입니다.

 

임오군란 이후에 진수당, 원세개 등이 한국 정부를 압박했던 중국인들을 가장 크게 무찔렀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였죠.

 

국가 상징 가로였던 광화문통, 정치 중심이었던 이 광화문통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정치를 잘한 임금의 묘호를 따자 해서 모두가 합의해서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세종로라는 이름에는 세종과 같은 정치를 앞으로 우리나라가 계속 펼치는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었던 거죠.

 

1966년에 우리 역사상 위인들 동상을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요.

당시 순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듭니다.

여기에서 기업체들 또는 민간의 성금을 모아서 동상 건립을 시작하죠.

계획은 그랬습니다.

 

세종대왕 동상은 세종로에 서야 하고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에 서야 하고

을지문덕 동상은 을지로에 서야 하고

율곡 선생 동상은 율곡로에 서면

가로에 이미지와 동상의 메시지가 일치할 거다.

 

1968년도에 동상이 완성됐는데

세종대왕 동상과 충무공 동상이 거의 같은 때 완성 됐어요.

그런데 세종대왕 동상을 세종로 입구에 세우려고 할 때

우리나라의 국가 상징 가로에는 군인이 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고 그래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자기 자리를 빼앗기고 충무공한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세종대왕 동상은 연고도 없는 덕수궁 한편에 물러나 있었죠.

 

그리고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익숙해진 거죠. 시민들이.

왜 거기에 충무공 동상이 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2005년에 광화문 광장 조성하면서

그때에도 충무공 동상 자리를 세종대왕에게 되돌려주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를 했습니다.

여론조사를 했더니 절대다수 시민이 충무공 동상 이전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세종대왕 동상을 궁여지책으로 충무공 동상과 광화문 사이에 하나 더 세우는 것으로 결론이 났죠.

 

지금 제가 볼 때는 좀 그렇습니다.

외국인한테 물어봤어요.

한국 역사를 모르는 외국인에게.

 

왜 왕이 궁궐 밖에 쫓겨나 앉아있느냐

또 충무공 동상은 흡사 연결해서 보면 세종대왕을 호위하는 호위무사처럼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세종로라는 길 이름과 그 길의 상징성이 많이 혼동되고 있는 그런 실정인 겁니다.

 

재구조화 설계안을 두고, 특히 세종대왕 동상과 충무공 동상을 광화문과 경복궁, 백악과 북한산이 하늘로 이어지는 시각적 연계를 확보하자는 제안을 설계팀에서 처음에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열화와 같은 반대 때문에 결국 충무공 동상은 이전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됐습니다.

 

 

시민 사회에서 어떤 현상이든 예컨대 도시의 개발이든 한 가로의 재정비든 무엇이든 간에

논란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 논쟁이 활발히 벌어지는 것은 굉장히 좋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논쟁의 기반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있습니다.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고 토론을 한다면

조금 더 바람직한 삶의 공간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전우용의 픽,

세종로와 충무공 그리고 광화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