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픽 3화 - 사창가에 뿌리내린 식민지 문화

Buddhastudy 2019. 5. 2. 20:20


사담 속 코너 전우용의 픽입니다.

지난 128일 별세하신 김복동 할머니, 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군의 만행을 밝히시고 남은 평생을 반전 평화운동가로 사셨습니다.

빈소에는 역대 대통령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조문하기도 했는데요,

참 많은 생각이 착정했습니다.

 

<사창가에 뿌리내린 식민지 문화>

그래서 오늘의 픽은 도대체 일본은 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리고 우리 스스로 반성할 점은 없을까

이것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요즘도 한국 신문 지면에 간혹 사창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일상생활언어로 정착했는데요, 사실은 사창이라는 단어는 공창과 대립하면서 상대되면서 그와 병존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공창이 없으면 사창도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공창: 명사, 관청의 허가를 받고 매음 행위를 하는 여자)

 

그럼 우리나라 공창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요?

이걸 보려면 먼저 일본의 공창 제도부터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죠.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5년 자기 성이 있는 오사카 인근에 집창 지역을 만들어 놓고 유곽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 유곽은 처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무사들을 위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공창 제도도 처음부터 군사적 성격이 대단히 짙었던 거죠.

 

미국의 페리 제독의 함포에 굴복해서 개항한 이후 유럽인들에게 이 유곽은 일본의 상징처럼 비쳤습니다.

또 일본인들은 이것을 스스로는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정이 달랐죠.

바로 이 공창 문화를 일본이 한국에 이식한 것이 러일 전쟁 때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0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만주의 전쟁터로 싸우러 갔습니다.

그중에 일부는 서울에 들러서 휴가를 보내고 만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만 명의 일본군이 한반도에 남아서 한국을 계엄 상태로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을 위한 공익시설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재미있어요.

재미가 있기보다는 화가 났죠.

공익시설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본군이 만든 것이 바로 일본식 유곽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공익시설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아니라 민간 최초의 공익사업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일본군 성노예, 위안소와 흡사한 시설로 만들었던 것이 서울의 공창이었습니다.

 

공창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치도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아주 심각하게 훼손하는 곳으로 잡았습니다.

남산 밑에 남소영이라고 하는 군영이 있습니다.

 

1900년에 이 군영에 장충단이라고 하는 국가재단을 설치합니다.

이게 뭐 하는 곳이냐면, 을미사변 때 일본군에 희생된 장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을미사변: 조선 고종 321895년에 일본의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

 

이듬해인 1901년 이걸 을미사변에 희생된 분들만 한정하지 말고 또 장병으로만 한정하지 말고, 문관이든 무관이든 개항 이후에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위패를 모두 모셔놓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승격시키자고 하는 여론이 일어서 그대로 시행됩니다.

 

장충단어떤 이름일까요?

충신열사를 장려하는 재단이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국립 현충원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는 시설이었습니다.

국가를 상징하는 국립 추모 시설인 거죠.

 

장충단은 대한제국의 국립 추모 시설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일본인들은 일부러 유곽을 설치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가 추모 시설을 유곽으로 모욕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죠.

 

그래서 해방 이후에도 장충단 공원에 퇴폐적인 이미지가 씻기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분이 장충단을 대한제국의 국가 추모 시설로 기억하기보다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라고 하는 대단히 로맨틱한 노래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때 이 장충단에 국가 추모 시설로서의 지위를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장충단장충사로 이름을 바꾸고, 전사자들을 모시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죠.

 

그러나 곧 6.25전쟁이 발발하고 전사자가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장충단이 너무 좁아서 동작동에 당시에는 국군묘지였습니다.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 장충단 옆에 유곽은

일본인들이 식민지 청년들의 정신을 퇴폐시키고

이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그런 공간으로 활용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런 부류의 이른바 성 산업 시설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무수하게 만들어졌고

우리의 문화를 타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죠.

 

해방 이후에 여러 영역에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자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언어생활에서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자는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보았죠.

공창은 비록 소멸했지만, 그 문화 자체는 진지하게 식민지 잔재로써 성찰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일본군이 전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 군대는 하지 않았던 이른바 성노예제도를 운용한 것은 일본인들의 형질 인류학적 기질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형질 인류학: 생물로서의 인간을 생물학의 입장에서 연구하는 학문

인류의 진화, 변이, 적응 따위가 중심 과제가 된다.)

저는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래 이른바 군사적 성격이 깊이 새겨진 그런 성문화를 만들어 왔고, 그런 성산업 시설들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이 전시에 군위안소를 운영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 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성하시라는 것이죠.

우리 스스로 이 문제에 관해서도

이것이 바로 일본이 심어놓은 왜곡된 문화라는 것을

성찰하고, 인식하고, 극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실천해 나갈 때,

일본군 성노예제도 운용의 범죄성을 더 명료히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고요,

 

그것이 이른바 보편적 인권의 확대와 발전,

그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새로 생각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전우용의 픽이었습니다.